소설리스트

1. 내, 내가 임신이라니 (1/95)

1. 내, 내가 임신이라니2021.10.03.

황궁 내에서도 가장 화려한 중앙 연회장. 금실 자수로 꽃과 나무를 수놓은 붉은 카펫 위는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귀족들로 북적였다. 엘레모트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자 젊은 황제, 바스티안 엘가이스트의 즉위식이 열린 지 딱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덕분에 황제의 생일 연회에 초대된 손님들은 황실에서 특별히 선정한 이들뿐이었다. 연이은 행사가 번거로울 법도 하지만, 귀족들의 표정과 몸짓에서는 선택된 자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이들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16550797790372.jpg“오늘 이블린 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티에르 공녀? 아니면, 폐하의 호위기사단장?”

바로 이블린 티에르,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자. 황실 다음으로 권력을 자랑하는 티에르 공작가의 무남독녀인 것만으로도 금줄을 붙잡고 태어났는데, 눈만 마주쳐도 숨이 멎는다는 미모까지 가졌다. 최근 공녀는 또 다른 이유로 화제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16550797790372.jpg“폐하께서 공녀에게 호위기사단장직을 맡기실 줄이야.”

16550797790372.jpg“네, 그래서 티에르 공작이 난리였잖아요.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공녀에게 그런 위험한 자리를 맡겼다고요.”

16550797790372.jpg“공작의 딸 사랑이 어디 보통인가요? 불면 날아갈까, 그간 외부활동도 안 시키고 애지중지했는데.”

16550797790372.jpg“그야, 공녀가 아팠잖아요. 데뷔탕트도 못 치렀을 정도니…….”

16550797790372.jpg“그런데, 정말 아팠던 거 맞아요? 듣자 하니 무예도 그렇게 출중하다면서요? 한데 공작님은 왜 검도 안 잡아 봤다고…….”

16550797790372.jpg“쉿, 입조심 하자고요. 속사정이야 알 수 없는 거니.”

여인들은 황급히 부채로 입을 가렸고, 사내들은 헛기침하며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16550797790372.jpg“어쨌든, 두 분 다 빨리 오셨으면 좋겠네요.”

16550797790372.jpg“그러게요.”

모두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황제와 실제 주인공이 될 공녀가 도착하기를 애태우며 기다리는 동안.

16550797790453.jpg“목련이 폈네.”

모두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당사자는 응접실 창가에 기대어 선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을 살짝 열자 미세한 바람이 이블린의 얼굴을 스쳤다. 노을빛이 내려앉은 백금발이 바람을 따라 가을 녘 보리밭처럼 물결쳤다. 얇은 리넨 원피스만 입은 이블린이 창틀을 짚고 서서 꽃향기를 들이마셨다.

16550797790453.jpg“너무 그리웠어, 이 풍경이.”

붉은 입술을 달싹인 이블린의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 때였다.

16550797790372.jpg“누가 보면 몇 년은 집 떠나 있던 사람인 줄 알겠네!”

콧방귀를 낀 알리에타가 이블린을 끌어다 거울 앞에 세웠다.

16550797790372.jpg“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요? 자,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씨! 숨 들이마셔요!”

복숭앗빛이 도는 뺨을 도닥여 준 알리에타가 코르셋의 끈을 쭉 끌어당겼다.

16550797790453.jpg“윽. 차라리 기사단 정복을 입는 게 낫겠어.”

몸이 휘청대는 걸 가까스로 버틴 이블린이 투덜댔다. 이래서 드레스는 입기 싫었다.

16550797790372.jpg“무슨 그런 말씀을! 오늘은 무려 황제 폐하의 ‘파트너’자격으로 참석하시는 거잖아요?”

아, 파트너. 그렇지. 그랬지.

16550797790453.jpg“…….”

이블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졌다. 갑작스레 황제의 호위기사단장이 된 지 이제 딱 한 달. 이블린은 그 시간의 대부분을 황제의 곁에서 보냈다.

16550797819692.jpg“단장, 지금 하품한 건가?”

16550797790453.jpg“아닙니다, 폐하.”

16550797819692.jpg“이런, 내일부터 특훈이라도 해야겠는걸. 단장의 건강을 위해서 말이야. 새벽에 훈련장에서 보지.”

16550797790453.jpg“……네?”

괴롭힘인지 배려인지 알 수 없는 황제의 말과 행동을 견뎌내며.

16550797790453.jpg“왜 갑자기 파트너람.”

16550797790372.jpg“그만 좀 투덜대시고요, 오늘 이 알리에타가 인생 역작을 만들 거니까, 아까운 미모 썩히지 말고 실컷 뽐내고 오세요.”

16550797790453.jpg“아니, 그럴 필요 없…… 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블린의 붉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한 번 더 끈을 조여 맨 알리에타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16550797790372.jpg“늦었어요, 폐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서둘러…….”

16550797790372.jpg“시녀장님, 폐하께서 도착하셨어요!”

16550797790372.jpg“아이고, 이걸 어째. 향유 목욕은 짧게 할 것을. 아가씨, 만세, 만세 하세요.”

어찌나 급했으면 어릴 때나 쓰던 애칭까지 튀어나왔다. 알리에타가 서두르자 인형에 옷을 입히듯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됐다. 목걸이와 귀걸이가 착착 위치를 찾아가고 땋아 내린 금발머리 곳곳에 장신구가 꽂혔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 거울 속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16550797790372.jpg“세상에, 갈수록 아름다워지시기만 하니 이 알리에타는 뿌듯하기 그지 없…….”

16550797790453.jpg“유모, 늦었다며?”

16550797790372.jpg“아차.”

말리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극찬했을 알리에타를 일깨운 이블린이 심드렁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16550797790453.jpg‘……좀 답답한데. 살이 쪘나.’

복도를 걸으며 이블린은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몰래 먹은 케이크가 문제였을까, 아까부터 묵직한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16550797790372.jpg“아이참, 우리 공녀님, 웃으셔야죠?”

등 뒤에서 들리는 잔소리에 이블린이 반사적으로 표정을 바꿨다. 마치 투명한 물에 분홍빛 물감 한 방울이 톡 떨어져 번지듯, 은은한 미소였다.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중앙계단이 나타나기 직전. 성큼성큼 걷던 이블린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우아한 걸음으로 사뿐 걸어가니 저택 로비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16550797790453.jpg‘호위기사단장을 에스코트하러 오는 황제라니.’

이블린은 한숨을 참으려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설마 도망칠까 싶어 데리러 온 건 아니겠지. 이블린이 속으로 합리적 의심을 키울 때였다. 인기척을 느낀 황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칠흑같이 까만 결 좋은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황제는 평소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녹색이 오묘하게 섞인 짙은 회색 눈동자와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순간,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짧은 침묵 끝에 곧 황제의 눈이 사르르 휘었다.

16550797790372.jpg“이블린 그거 알아? 폐하는 정말 멋있으셔, 세상에, 할 수만 있다면 난 그분께 내 온몸을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야.”

언젠가 셀리메 후작가의 영애가 편지에 적어 보낸 내용이 떠올랐다.

16550797790453.jpg‘음, 정치라는 게 얼굴로만 할 수 있는 거라면 저분은 세상 살기 편할 거야.’

그래, 얼굴 하나는 인정.

16550797819692.jpg“내가 너무 서두른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16550797790453.jpg“아닙니다, 폐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16550797819692.jpg“이런.”

이블린이 딱딱하게 읊자 황제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곤란하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건 덤이었다.

16550797819692.jpg“공녀께서 아무래도 잊은 듯하군. 오늘은 내 호위 기사가 아니지 않나.”

16550797790453.jpg“아.”

이블린이 탄식하자 씩 웃은 황제가 계단 위를 성큼 올라왔다. 그가 이블린이 있는 곳에서 세 칸 정도 아래에서 멈추자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16550797819692.jpg“가실까요, 티에르 공녀.”

황제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블린은 그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얹었다.

16550797790453.jpg“감사합니다, 폐하.”

황제의 커다란 손은 생각보다 뜨거웠지만, 이블린은 내색하지 않았다. 알리에타의 철저한 교육하에 연습한 미소는 꽤 쓸모가 있었다.

16550797911436.jpg

* * * 두 사람이 오른 마차는 가장 마지막으로 연회장에 도착했다. 거대한 문 앞에 선 이블린은 모처럼 느껴보는 긴장감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기사단장 임명식이야 간단한 절차만 밟는 거였으니,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16550797819692.jpg“그러고 보니, 오늘이 공녀의 데뷔탕트나 다름없군. 2년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말이야.”

16550797790453.jpg“아.”

이블린이 짧게 탄식했다. 그녀의 상사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16550797819692.jpg“뭐, 썩…… 아팠던 사람으로는 안 보이지만.”

이블린을 빤히 응시하던 황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0797790453.jpg“…….”

설마, 뭘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아니야, 꾀병이었다는 걸 황제가 알 리가.

16550797790453.jpg“……칭찬 감사합니다, 폐하.”

이블린은 침착하게 미소 지었다.

16550797819692.jpg“감사는, 덕분에 나도 결혼이 미뤄졌으니 고마울 따름이지.”

16550797790453.jpg“……네?”

16550797819692.jpg“앞을 봐야지, 공녀.”

커다란 손이 이블린의 턱을 가볍게 쥐고는 정면을 바라보게 했다.

16550797790372.jpg“황제 폐하와 티에르 공녀님이십니다.”

곧장 문이 열리고 눈 부신 빛이 쏟아졌다.

16550797819692.jpg“공녀의 성공적인 사교계 데뷔를 응원하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황제의 뜻 모를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블린은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주인공이 등장하자 연회가 시작됐고, 곧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황제와 첫 춤을 완벽하게 끝낸 이블린은 곧 다른 가문의 영애들에게 둘러싸였다.

16550797790372.jpg“세상에,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었어요!”

16550797790372.jpg“이블린,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뻐요.”

16550797790453.jpg“반겨줘서 고마워요.”

이블린이 한 명씩 눈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나갈 때였다.

16550797790372.jpg“그런데 이블린이 폐하의 호위기사단장이 되다니!”

16550797790372.jpg“정말, 깜짝 소식에 모두가 놀랐답니다.”

16550797790372.jpg“부러워요, 이블린. 매일같이 폐하의 곁을 지키는 거잖아요? 폐하는 어떤 분이세요?”

한바탕 소란 끝에 누군가 이블린에게 질문을 해왔다.

16550797790453.jpg“음, 폐하는 어떤 분이시냐면.”

이블린은 부채로 얼굴을 슬쩍 가리고 황제를 눈으로 좇았다. 귀족들을 응대하는 그의 얼굴은 퍽 서늘했다. 그녀를 괴롭힐 때는 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데, 그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이블린은 기사단장에 임명된 직후 황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16550797790453.jpg“폐하, 제게 이 자리를 맡기신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기회를 엿보다 조심스레 물은 거였다.

16550797819692.jpg“글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작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지만.

16550797819692.jpg“또는, 내 곁에 가장 오래. 그리고 가까이 붙어 있는 자리니까?”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느른하게 웃던 황제의 얼굴이 생각났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황제가 그녀를 호위기사단장 자리에 앉힌 이유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실상은 그냥 괴롭히려고 그런 건지도.

16550797790453.jpg“…….”

16550797790372.jpg“이블린?”

옆에서 들리는 재촉에 상념에서 깨어난 이블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16550797790453.jpg“가까이서 뵌바, 폐하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랍니다.”

16550797790372.jpg“역시!”

16550797790453.jpg“그럼 저는 잠시.”

적당히 둘러댄 이블린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꽂히는 시선들을 의식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였다. 순간 눈앞이 빙글 돈다 싶더니 헛구역질이 울컥 올라왔다.

16550797790453.jpg“우욱.”

이블린이 입을 틀어막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16550797790453.jpg‘이런.’

어지럼증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휘청거리던 이블린이 쓰러지기 직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16550797819692.jpg“이블린?”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찰랑거리는 황제의 금빛 견장이 보였다.

16550797790453.jpg‘알리에타, 그러니까…… 내가 너무 조였다고 했…….’

이블린의 눈이 까무룩 감겼다. . . . 다음 날 아침.

16550797790453.jpg“……머리 아파.”

16550797790372.jpg“공녀님!”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이블린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16550797790453.jpg“알리에타, 왜 그리 소란이야?”

16550797790372.jpg“신문, 오늘 자 신문에…….”

신문에 뭐? 이블린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보나 마나 1면에 실렸을 기사의 제목이야 뻔했다. 대충 그녀의 미모를 극찬하거나, 황제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하지만, 알리에타가 말한 건 그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내용이었다.

16550797790372.jpg“고, 공녀님이 임신했다는 기사가 떴어요!”

16550797790453.jpg“뭐? 지금 뭐라고 했어?”

처음으로 이블린이 큰 소리를 냈다.

16550797790372.jpg“이, 임신이요!”

알리에타가 울먹거렸다. 임신이라니. 말이 돼? 난 그럴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이블린의 녹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1655079791143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