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입술, 따뜻한 변태처럼2021.10.06.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신문, 신문을 가져와.”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린 이블린이 티테이블로 향하며 손짓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움직임에는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묻어났다.
“알리에타?”
“네, 여기요, 공녀님.”
이블린의 재촉에 알리에타가 품에 안고 있던 신문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신문의 종류를 확인한 이블린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어디 질 나쁜 가십지인가 했더니, 제국 내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황실 소식지 하나만 빼고. 쯧, 하고 혀를 찬 이블린이 <프레세>를 집어 들었다. 그나마 가장 객관적이고 신뢰성 높기로 알려진 신문이었다. [이블린 티에르 공녀의 마음을 훔친 남자는 누구?] 유치한 제목이었다.
“훔치다니, 도둑맞은 적도 없는데.”
눈이 세모꼴이 된 이블린이 본격적으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간 사교계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티에르 공녀. 그녀에게 선택받는 행운의 사내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그런데 드디어 우리의 티에르 공녀가 마음도 몸도 내준 상대를 찾은 모양이다.]
“뭐?”
얇은 종이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공 모양이 된 종이를 옆으로 휙 던져버린 이블린이 다른 신문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 황궁에서 열린 연회의 화제는 단연코 티에르 공녀의 임신 소식이었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듯이, 입덧 또한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게 기사야, 로맨스 소설이야? 입덧 아니었거든?”
이블린의 손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쓰레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아이의 아빠 후보로 두 명의 남자가 거론되고 있다. 첫 번째는 그녀와 오랜 친우이자 집안끼리도 가까운 황궁 근위대장 휴이터 공자, 두 번째는 무려. 함부로 입에 올리기도 송구한 황제 폐하이시다.]
“뭐? 누구? 미쳤나 봐!”
마지막 문장을 읽은 이블린이 벌떡 일어섰다. 힘에 밀린 나무 의자가 요란하게 쓰러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가 이런 기사나 보려고 2년간 환자 행세한 줄……!”
“공녀님! 목소리가 너무 커요.”
알리에타가 문 바깥의 기척을 살피며 진정하라는 듯 이블린의 팔을 붙잡았다. 이블린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자 가느다란 백금발이 한데 모였다 흩어지며 찰랑거렸다.
“후우.”
허리춤에 손을 얹고 깊이 심호흡한 이블린이 마지막 신문을 집었다. [티에르 공녀가 쓰러지자 가장 빠르게 움직인 사람은 황제 폐하였다. 공녀를 가볍게 안아 든 폐하께서는 그대로 연회장을 떠났고, 그 뒤를 휴이터 공자와 다베르 후작이 따랐다. . . . 티에르 공녀는 호위기사단장 직을 사임하고 태교에 전념할 것인가? 그리고 아이의 아빠는 대체 누구인가?]
“뭐라는 거야?”
신문을 패대기친 이블린이 방 안을 서성이다 창가로 향했다.
“그런데 공녀님.”
이블린의 등 뒤로 다가간 알리에타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 이블린의 배로 향했다.
“정말, 아니……시죠?”
“알리에타!”
이블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유모까지 왜 그래?”
“알죠, 저야 당연히 아닌 거 알죠.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나…… 아니, 그럼! 대체 왜 이런 기사가 난 걸까요? 남사스럽게!”
알리에타가 입을 꾹 잠그는 시늉을 하다가 뒤늦게 씩씩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블린 티에르다. 황실의 여자들을 제외한다면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는. 그 말은 즉, 확실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흥미 위주의 기사를 쓰기에 만만한 사람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연애는 자유롭게 해도 혼인만큼은 정해진 사람과 해야 하는 게 제국의 문화였다. 당연히 혼전 임신은 터부시되며 귀족에게는 명예롭지 못한 일로 치부되었다. 한마디로 가문의 수치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기사단장직에서 물러나길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설마 공작님께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알리에타가 창백해진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글쎄.”
팔짱을 낀 이블린이 손가락을 토독 움직였다. 냉정을 찾은 이블린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사가 터졌다. 그것도 어젯밤 우연히 벌어진 ‘사고’를 엮어서. 이블린의 차가워진 눈동자가 조용히 옆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침대 밑 판자 아래에 숨겨둔 작은 종이. 2년 전, 마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모친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직후에 받은 편지였다. [이블린 언니에게. 언니의 동생, 마르다예요. 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편지를 써요. 언니를 위로해주고 싶었거든요. 아아, 우리가 같은 집에 있었다면 곁에서 안아줄 수 있었을 텐데. 하루빨리 같이 사는 날이 오기를 바라요. 언니도 나처럼 우리가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어요. 우리는 정말 좋은 자매가 될 거예요. -언니를 사랑하는 동생, 마르다.] 편지를 밀봉한 인장은 분명 부친의 것이었다.
“이런 편지가 제게 왔어요.”
이블린은 편지를 곧장 부친에게 내보였다. 그 아이가 순수를 넘어 멍청해서든, 아니면 영악해서든. 어차피 제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편지였다. 그러니 부친의 반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마르다…… 얌전히 있으라고 그토록 일렀건만.”
“……부정하지 않으시네요.”
그리고 부친의 반응은 지나칠 만큼 뻔뻔했다. 이블린은 그렇게 부친에게 숨겨둔 아내와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딸이 그녀보다 고작 두 살 아래라는 것도. 모친을 떠나보내며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어머니를 사랑하신 거 아니었어요?”
티에르 공작가의 귀한 무남독녀와 몰락한 하급 귀족 사내. 두 사람의 결혼은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이런, 이블린.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네 어미를 닮았구나, 어리석기는.”
“!”
“때가 되면 두 사람을 데려올 생각이니, 그때까지는 입 다물고 조용히 살아라, 이블린. 너도 티에르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싶겠지?”
“……어떻게 그런!”
“명심하거라, 이블린 티에르. 지금 이 가문의 주인은 나다. 네 조부도, 모친도 이제는 세상에 없으니 말이다.”
“…….”
적나라한 부친의 검은 속내를 보며 이블린은 의심의 싹을 틔웠다. 어쩌면, 모친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한 어린 공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블린은 고민 끝에 환자 행세를 하며 집 안에 틀어박혔다. 부친의 눈을 속일 생각이었다. 공작가의 명예를 지키면서도 부친을 끌어내릴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렇게 숨죽이며 때를 기다린 지 2년. 기회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새로운 황제가 그녀를 호위기사단장에 임명한 거였다. 황제의 최측근이자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직책으로, 티에르 공작가의 가주가 대대로 거쳐 온 자리였다. 단 한 사람, 그녀의 부친만 빼고.
“그 여우 같은 어린 놈의 새끼가, 감히!”
임명장이 공작가로 날아온 날,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던 부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은 이 자리부터 지키는 게 우선이야.’
이블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허위 기사의 배후가 누구이든, 목표는 이블린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일 테니까.
“알리에타,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 일단 폐하를 먼저 뵙……”
서둘러 지시를 내리던 이블린이 그대로 굳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수습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미치겠네.’
어젯밤 일을 되짚은 이블린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 . .
“으음.”
연회에서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이블린이 가장 먼저 본 건 칠흑같이 까만 무언가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까만 머리칼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광경이 어쩐지 익숙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자 몸의 감각들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 부근에 닿는 단단한 무언가. 입술에 맞닿은 촉촉하고 말캉한 것. 입술을 문지르다 부드럽게 벌리는 가벼운 힘. 그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뜨거운 숨결이라든가……. 잠깐. ……숨결? 이블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블린은 곧 기묘한 감각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그녀의 직속 상관인 황제 바스티안 엘가이스트.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높은 콧날이 이블린의 코를 스치고 볼을 꾹 눌렀다. 빨간 입술이 미끄러지며 이블린의 입술 끝을 스쳤다. 황제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묘하게 울렸다.
“…….”
이블린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상했다. 몸 안 어딘가가 뜨거운 것도 같고 시원한 것도 같고. 무겁던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후으.”
이블린이 저도 모르게 여린 숨을 토해내자 녹색 빛이 섞인 짙은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맞닿았던 입술이 촉촉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블린?”
이블린의 턱을 붙잡은 황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관찰하는 것도 같고, 걱정하는 것도 같은 묘한 눈빛이었다.
“……폐하.”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이블린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정신이 들어?”
“네, 매우 제정신입니다만…….”
“하아.”
이블린의 목소리를 들은 황제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평상시에는 나른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가 안도의 빛으로 물드는 게 조금 이상했다. 당황한 나머지 이블린은 황제가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폐하, 그런데 왜 제 위에 계신 거죠?”
이블린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거나 다름없는 황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눈으로 보면 서운해지는데, 단장.”
황제의 표정이 금세 나른해졌다. 약간 거만하고 묘한 경멸감을 얹은, 오만하다 싶은 평소의 모습이었다.
“제가 어떤 눈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좀 비켜주시겠어요?”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짚은 이블린의 손바닥이 아래로 푹 들어갔다. 원인은 푹신한 이불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이블린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황제의 침실이었다. 아니, 왜 하필 여기로 데려와? 황제의 침대 위에 누운 호위기사단장이라니,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이블린이 속으로 투덜대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드레스 자락이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본능적으로 가슴 부근을 짚은 이블린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헉.”
혼자서는 절대 벗을 수 없는 드레스가 가슴 언저리까지 풀어 헤쳐져 있었다. 내내 몸을 조이던 코르셋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제멋대로인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변태인 줄은 몰랐는데? 이블린의 형형해진 녹안이 정면에 앉은 바스티안에게 향했다.
“글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모욕적이라는 듯 바스티안이 혀를 찼다.
“……숨을 제대로 못 쉬기에 조금 도운 것뿐이야.”
“아.”
감히 날 뭐로 보고. 그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간 곁에서 지켜본바, 황제는 여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경계심을 푼 이블린이 스르르 눈의 힘을 뺄 때였다. 똑똑.
“폐하, 다트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궁의가 찾아왔다.
“들어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제 외투를 이블린의 어깨에 걸쳐 준 바스티안이 침대 밖으로 긴 다리를 내렸다.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다트가 빠르게 다가왔다.
“단장님, 실례하겠습니다.”
다트가 이블린의 상태를 요리조리 살피는 동안, 바스티안은 그 뒤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
바스티안이 채근하듯 물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한 듯 보이기도 해서 이블린은 의아해졌다.
“걱정하신, 그런 부분은 아닙니다. 그저…….”
다트가 이블린의 눈치를 쓱 살핀 뒤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저?”
바스티안의 눈썹이 위협적으로 꿈틀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