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지, 아무튼 금지2021.10.10.
“체한 겁니다. 귀족 영애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아무래도 코르셋이…….”
“아.”
짧게 탄식한 황제가 제 이마를 짚었다. 안도와 당황,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반응이었다.
“단장께서 무언가 맛있는 걸 드셨나 봅니다.”
“그, 케이크를 좀…….”
인자하게 웃으며 묻는 궁의를 본 이블린은 조금 민망해졌다. 아무래도 알리에타의 눈을 피해 몰래 먹은 게 문제가 됐나 보다.
“어떤 케이크이기에 이 사달을 냈나, 나도 맛 좀 보고 싶군.”
“네, 뭐, 티에르 가 특제 단호박 케이크인데…… 괜찮으시다면 한 번 가져오겠습니다.”
어차피 창피한 상황이었다. 뻔뻔해지기로 한 이블린이 태평히 대답하자 황제가 헛숨을 뱉었다.
“단장.”
“네, 폐하.”
“앞으로 코르셋 금지야.”
“……네?”
이블린의 동그란 눈이 황제에게 향했다.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쓰러지는 것도 금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선 황제는 황당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대가 나의 호위기사단장으로서 자각이 있다면, 따라주리라 믿지.”
“폐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꺼억.”
되묻던 이블린이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침실 내에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 . .
“으으.”
기억을 떠올린 이블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속이 좀 편안해졌냐며 묻던 다트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황제의 눈빛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이블린 티에르의 인생에서 유일한 오점이었다.
‘기억을 지울 수만 있다면! 그 케이크만…… 아니, 망할 코르셋만 아니었어도!’
움켜쥔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팡팡 내리친 이블린이 이내 표정을 굳혔다.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스캔들을 해결하는 게 더 시급했다. 혹시나 황제가 이 허위 기사 때문에 그녀를 자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나가봐야겠어.”
냉정해진 이블린이 침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찰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사내 둘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공작가의 사병이었다.
“……뭐 하는 거야?”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본 이블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궁에서 근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 당분간 외출을 삼가시라는 공작님의 명령입니다.”
“황궁의 지시?”
진짜일까, 아니면 부친의 장난질일까. 이블린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아버님은 어디 계시지?”
“조금 전에 영지 시찰을 떠나셨습니다.”
영지 시찰? 이 시국에? 딸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부친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관망하시겠다는 거군요, 제 손발은 묶어놓으신 채.’
이블린의 미간이 깊게 팼다. 부친의 의도가 뻔했다. 이블린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수록, 그가 숨겨둔 딸을 데려올 정당성은 더욱 커질 테니까. 다른 건 몰라도 부친이 이 스캔들을 기꺼워한다는 건 알겠다.
‘만약, 이게 진짜 당신의 짓이라면.’
이블린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니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배후가 누구이든, 이미 이것저것 손을 써놓았을 테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위험한 기사를 내지는 않았을 거다. 그녀 또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알겠어.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게, 그럼 되지?”
이블린의 대답을 들은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공작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그들이 모진 매질을 당하거나, 직업을 잃게 된다. 부친은 이블린의 약점을 알았다. 그녀가 아끼는 가문과 공작가의 식솔들, 수많은 영주민.
“이해해,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절대 안 나올게. 진짜야. 밥도 침실 내에서 먹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죄송합니다, 공녀님. 대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응, 고마워.”
되레 두 사람을 위로해 준 이블린이 몸을 물렸다. 2년간 환자 행세를 한 것도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식솔들이 손발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녀님, 정말 안 나가시려고요?”
침실 문을 닫고 이블린에게 다가온 알리에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공식적’으로만 안 나가면 되는 거잖아?”
“공녀님!”
“뭘 그리 놀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시큰둥하게 말하는 이블린을 보며 알리에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이블린은 무척 지혜롭지만, 가끔 그 똑똑한 머리를 위험한 방향으로 쓴다는 게 문제였다. 숨겨두었던 검을 꺼내는 이블린을 보며 알리에타가 속을 끓이는 그 시각.
“폐하?”
황제의 침실을 찾은 다베르 후작은 정원으로 향하는 발코니 문을 열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하얀 셔츠를 입은 황제는 테라스 울타리 위에 눕듯이 앉아 있었다.
“배후는?”
눈동자만 움직여 손님을 확인한 바스티안이 덤덤하게 물었다.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익명의 제보를 받았을 뿐이라며 발뺌하더군요.”
기사를 본 바스티안의 명령으로 언론사부터 쓸고 온 참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연회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기사라는 겁니다.”
“어차피 터질 기사였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이블린이 쓰러진 건 우연이었지만, 결국 허위 스캔들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바로 수습한다 한들, 귀족회의에서 공녀의 단장직 자격을 걸고넘어질 겁니다.”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거겠지. 이런 식의 공격은 생각 못 했는데.”
긴 손가락 끝으로 붉은 입술을 문지른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건국 이래 첫 여자 호위기사단장이었다. 몇몇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스티안이 독단으로 밀어붙인 일이었고.
“처음부터 황후 후보로 밀고 나가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들어앉은 사람을 무슨 수로. 그리고, 황후는 할 일이 많잖아. 내내 붙어 있으려면 호위기사단장만 한 게 없지.”
“그야 그렇지만…… 어쨌든 이제 어쩌실 겁니까? 아직도 안 나온 걸 보면 단장에게 문제가 생긴 걸 텐데요.”
평소라면 출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이블린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글쎄.”
고개를 기울여 침대를 바라보는 바스티안의 무료한 눈동자 위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어젯밤, 이블린이 누워 있던 자리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폐하.”
“그냥 여기서 쉬고 가지?”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새빨개진 얼굴로 옷을 정돈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씩씩하게 도망치던 이블린이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이블린의 주특기였다. 사고를 쳐놓고도 아닌 척, 아파도 괜찮은 척. 늘 도도하게 품위를 유지하던 이블린 티에르.
“……그러게 자고 가라니까.”
기어코 말 안 듣고 가더니만. 혀를 찬 바스티안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신문이 날아와 다베르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블린의 임신 스캔들 기사가 실린 면이었다.
“……폐하?”
“생각해 보니, 이쪽도 나쁘진 않을 듯해.”
의아해하는 다베르를 본 바스티안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올라섰다.
“일이 이렇게 된 거, 일단은 기다려볼까.”
“네?”
“이블린은 좀 깨달을 필요가 있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기에 가장 빠르고 좋은 지름길은 바로 내 옆에 붙어 있는 거라는 걸. 느른하게 머리를 헝클어트린 바스티안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착착 깔끔하게 접힌 신문이 그 뒤를 따라 둥둥 떠갔다.
‘하아,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바스티안의 뒷모습을 보는 다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황궁 내, 본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정원의 한구석.
“너는 누가 아이 아빠였으면 좋겠어?”
꽃을 관리하던 하녀들이 소곤댔다. 티에르 공녀의 남자는 과연 누구인가! 며칠 사이에 임신 스캔들은 점점 더 규모를 부풀려가고 있었다.
“나는 역시 휴이터 공자님이 좋아. 로맨틱하잖아.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던 사이에서 불꽃이 파바박. 얼굴도 미남이시고.”
“음, 그래도 나는 역시 공녀님과 어울리는 상대는 폐하이신 것 같은데.”
하녀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졌다.
“우리 폐하는 정말 미남이시지만…… 그분은 절대 아니야. 멀리서 보기만 해도 냉기가 풀풀 흐르는걸?”
“맞아, 웃으시는 걸 본 사람도 없어. 그런 분이 ‘사랑’에 빠졌다? 게다가 임신? 기자가 미친 게 분명해.”
열정적으로 숙덕대는 하녀들 곁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후, 후작님.”
뒤늦게 불청객을 인지한 하녀들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혹시 대화를 들었을까 싶어 눈치만 보던 이들이 후다닥 도망치듯 사라졌다. 하녀들이 손질하던 화단을 지나친 다베르가 담쟁이덩굴이 드리워진 높은 돌담을 돌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베르는 옅은 초록색 잔디 위에 느긋하게 누워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폐하.”
한숨을 쉰 다베르가 황제의 얼굴을 덮고 있는 책을 걷어냈다.
“무례하군.”
눈을 찡그린 바스티안이 책망했지만, 다베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후에 회의가 있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음, 일어나려고 했어.”
“이제 황태자가 아니라는 걸 자꾸 잊으시나 봅니다.”
“그대도 내가 황제라는 걸 자꾸 잊는 것 같군.”
말이나 못 하면.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상사에 다베르 후작이 한숨을 삼켰다.
“다베르. 그대도 들었나?”
“무엇을 말씀입니까?”
“내게 사랑이 안 어울린다는데.”
어째서? 나만큼 순정남도 없지 않나? 하녀들의 이야기를 줄곧 듣고 있던 바스티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폐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엉뚱한 소리를 하는 상사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다베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왜? 공작이 사죄문이라도 보냈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바스티안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묻자 다베르의 눈썹 끄트머리가 위로 치솟았다.
“이런, 이렇게 뻔하다니. 내용은?”
다베르의 반응에 바스티안이 코웃음 쳤다.
“중요한 영지 시찰이 있어 바로 복귀하지 못해 송구하옵고, 스캔들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공녀에게 책임을 물어 호위기사단장직을 내려놓게 하겠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공작이 날 더 만만하게 봤나 본데.”
“그런 것 같습니다.”
야망으로 가득 찬 공작의 얼굴을 떠올린 두 사람이 동시에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공녀는?”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흠, 그래?”
의외라는 듯 대꾸한 바스티안이 턱을 쓸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요.”
그럼 그렇지. 바스티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며칠 내내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도 않는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가끔은 그 작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열어보고 싶을 지경이야. 어쩔 수 없군, 이쪽에서 만나러 가는 수밖에.”
바스티안이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그녀가 곁에 없으면 곤란한 건 나니까.”
목을 꺾으며 중얼거리던 바스티안이 곧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미소가 퍽 사악해 보여서, 다베르 후작은 목덜미를 문질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