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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블린의 은밀한 취미 (4/95)

4. 이블린의 은밀한 취미2021.10.13.

16550798773871.jpg“공녀님, 오늘도 나가시려고요?”

간식을 들고 침실로 들어오던 알리에타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16550798773876.jpg“응.”

16550798773871.jpg“그럼 저도 데려가세요!”

테이블 위에 쿠키를 던지듯 내려놓은 알리에타가 씩씩대며 다가왔다.

16550798773876.jpg“유모를 어떻게 데려가.”

검의 상태를 확인하던 이블린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알리에타는 어느새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16550798773876.jpg“그리고 유모가 여기 있어야 의심을 안 사지.”

이블린이 몰래 저택 밖으로 나갈 때마다 빈자리가 들키지 않도록 침실을 지키는 게 알리에타의 역할이었다.

16550798773871.jpg“공녀님 기다리는 동안 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탈출한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진다고요. 맙소사, 신이시여, 그냥 이 늙은이가 빨리 죽었어야 했어요.”

16550798773876.jpg“그런 소리 마. 그럼 유모는 내가 말도 안 되는 결혼 상대에게 팔려 가기를 바라?”

16550798773871.jpg“무슨 그런 흉측한 말씀을!”

16550798773876.jpg“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거 알잖아? 황제의 호위기사단장씩이나 된 딸의 사직서를 멋대로 제출하는 사람이야.”

이블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내내 바쁘게 움직여보니 상황은 생각보다 더 나빴다. 임신이라는 꽤나 자극적인 내용 때문인지 신문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신이 난 신문사들은 앞다투어 기사를 쏟아냈다. 은밀하게 접촉을 시도했지만, 스캔들의 진실을 밝혀주려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부친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만 확인한 셈이었다. 공작가의 별다른 제지가 없으니, 이상한 이야기가 덕지덕지 붙은 스캔들은 마른 산에 불이 번지듯 제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16550798773876.jpg“임신 스캔들까지 터진 티에르가의 공녀. 여인으로서 명예는 훼손됐을지언정 티에르라는 가치는 쓸모 있을 테니까. 감히 꿈도 못 꾸던 이들에게 나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테지.”

16550798773871.jpg“가여운 우리 공녀님……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런…….”

입술을 뻐끔거리던 알리에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블린의 모친인 리본느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당시에 공작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잔혹한 성정을 드러냈다. 이블린의 몸에 가혹하게 나 있던 매질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알리에타는 정말이지 눈 딱 감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이었다.

16550798773876.jpg“울지 마, 알리에타. 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져.”

  덤덤하게 웃으며 말하던 이블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결국 그녀는 이블린이 환자 행세를 하며 틀어박히는 걸 적극적으로 도울 수밖에 없었다.

16550798773871.jpg“저는, 정말, 공작님이 공녀님께 왜 그렇게 모질게 대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다정한 아비 행세를 하는 공작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고용인들 모두 그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16550798773876.jpg“모르지, 어쩌면 내 친아버지가 아닌지도.”

16550798773871.jpg“공녀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돌아가신 마님을 욕보이는 거라고요.”

16550798773876.jpg“그런가. 어머니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도 여쭤보고 싶을 지경이야.”

이블린의 연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굳었다.

16550798773876.jpg“어쨌든 지난 2년간 기회만 엿보며 견뎠는데 이대로 당하고 끝낼 수는 없어, 알리에타.”

그녀가 아무리 사랑받는 제국의 꽃이라 한들, 현실에서는 부친의 그림자에 가려진 힘없는 공녀일 뿐이다. 며칠간 뒷조사를 진행하면서 깨달은 뼈아픈 사실이었다. 호위기사단장직을 맡게 됐다지만,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은 이블린이 부친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한 가지 수확이라면, 기사가 난 당일에 황실 소속 기사들이 신문사를 털었다는 걸 알게 된 거였다.

16550798773876.jpg“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야. 폐하를 만나 뵙고 올게.”

그간 황제가 그녀의 거취를 두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몰라 잠자코 있었지만, 더는 만남을 미룰 수 없었다. 그는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위험한 도박이 될 테지만,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부친의 반대를 무시하고 그녀를 호위기사단장직에 앉힌 황제니까.

16550798773876.jpg“너무 걱정 마.”

알리에타를 향해 눈꼬리를 살짝 휘며 웃어준 이블린이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허벅지에 단검을 단단히 동여매고 허리춤에도 검집이 걸린 벨트를 두른 뒤 앞치마로 가렸다. 그 위로 목수의 작업복을 입고 올리브색 망토로 꽁꽁 두르니, 이블린은 마치 작은 덤불숲처럼 보이기도 했다.

16550798773876.jpg“그럼 다녀올게.”

준비를 끝낸 이블린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알리에타를 뒤로 하고 침실 발코니 문을 열었다. 잘 꾸며진 정원의 규모는 몇 개의 농작지를 합친 것보다도 컸다. 보초의 위치를 확인하고 풀썩 뛰어내린 이블린은 곧장 붉은 잎이 핀 정원수 밑으로 스며들었다.

16550798773876.jpg‘여기서부터 왼쪽으로 50.’

몸을 숨긴 이블린은 표식으로 심어둔 흰 장미나무가 보일 때까지 숫자를 세며 조심조심 기어갔다. 익숙한 경로를 따라 한참을 움직이자 저택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울타리가 나타났다.

16550798773876.jpg‘다 왔다.’

덤불 밑에서 손을 뻗어 울타리를 만져본 이블린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뾰족한 쇠창살 기둥을 잡고 몇 번 힘을 주자 격자무늬 쇠가 벌어지며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구멍이 생겼다. 이블린 혼자만 아는 비밀통로였다. 알리에타 또한 존재만 알뿐이지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몸을 최대한 엎드린 채 기어서 빠져나간 이블린은 쇠창살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망토와 작업복을 벗어 옆 덤불 안에 숨겼다. 마지막으로 얼굴과 머리를 가리기 위해 보닛을 쓰려던 때였다.

1655079883058.jpg“이런. 먼저 온 손님이 있었군.”

16550798773876.jpg‘!’

검으로 손을 뻗으며 몸을 돌리던 이블린이 동작을 멈췄다.

16550798773876.jpg“……폐하?”

눈앞에 선 이는 뜻밖의 방문객이었다.

16550798773876.jpg‘대체 언제?’

이블린은 검을 뽑으려던 손을 어색하게 내렸다. 인기척이 전혀 없었는데 당황스러웠다.

1655079883058.jpg“흠.”

하녀 복장을 한 이블린을 아래위로 느리게 훑은 바스티안이 곧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1655079883058.jpg“단장에게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스커트 아래로 도톰한 재질의 긴 양말을 신은 발목이 보였다. 발목을 노출하다니, 귀족가의 영애라면 상상도 못 할 차림이었다.

1655079883058.jpg“뭐,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바스티안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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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98773876.jpg“폐하께서 여긴 어떻게…….”

바스티안의 느긋한 놀림에도 이블린은 웃을 수 없었다. 여기서 황제를 마주치다니, 과연 우연일까?

1655079883058.jpg“글쎄, 굳이 설명하자면.”

몸을 숙인 바스티안이 이블린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꼬리를 흐렸다.

1655079883058.jpg“산책, 중이었지 아마?”

16550798773876.jpg“……네?”

이블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블린은 한 걸음 물러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울창한 전나무 숲은 공작가의 영지였다. 외부인이 들어올 리도 없거니와 들어온다 해도 사방이 나무로 빽빽한 탓에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죽기 십상이었다. 덕분에 이블린은 지난 2년간 이곳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검술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산책이라고? 물론 공작가의 영지든, 울창한 숲이든, 그런 것들이 황제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16550798773876.jpg“폐하.”

이블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6550798773876.jpg“혹시, 절 만나러 오신 건가요?”

1655079883058.jpg“눈치가 좀 생겼군, 단장.”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한 바스티안이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와 달리 바스티안의 속은 썩 즐겁지 못했다.

1655079883058.jpg‘며칠 내버려 뒀다고 이 모양인지.’

이블린의 창백한 얼굴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맘고생이 꽤 심했는지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 더 핼쑥해져 있었다. 이러고도 그를 찾지 않은 이블린에 조금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16550798773876.jpg“마침 저도 폐하를 만나 뵈려…….”

1655079883058.jpg“감히, 호위기사단장이란 자가 사직서만 내놓고 사라져?”

16550798773876.jpg“……네?”

반색하며 말을 꺼내던 이블린이 숨을 흡 들이켰다.

1655079883058.jpg“그 자리가 꽤나 우스웠던 모양이야, 단장.”

낮게 울리는 서늘한 목소리에 이블린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늘 그녀에게 짓궂게 굴고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던 황제가 이토록 냉기 어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이블린은 목덜미로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걸 느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근신 처분이 내려왔다는 건 부친의 거짓말이었던 거다. 문제는 황제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고. 결론적으로 무단결근이 된 셈이니, 황실 모욕이라고 처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16550798773876.jpg“아닙니다, 폐하. 저는 사직의 뜻을 밝힌 적이 없습니다.”

이블린은 차분하게 변명을 꺼냈다.

1655079883058.jpg“그럼, 공작의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말인가?”

바스티안이 어디 대답해보라는 듯 물었다.

16550798773876.jpg“…….”

이블린은 침묵했다. 아직 황제에게 모든 패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황제에게 공작가의 약점만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 부친과의 불화를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 이건 황제의 의중에 따라 달라질 거였다.

16550798773876.jpg“폐하께 드릴 말씀도, 여쭤야 할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박은 시작됐다. 이블린은 주사위를 던지기로 했다. 이블린의 진지한 표정을 본 바스티안이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1655079883058.jpg“좋아, 무슨 말일지 기대되는군.”

16550798773876.jpg“제가…….”

이블린이 입술을 여는 찰나, 울타리 너머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움찔한 이블린이 검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검을 뽑지 못했다. 황제가 제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어버린 탓이었다. 뜨거운 온기가 금방 피부를 데웠다.

1655079883058.jpg“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군.”

16550798773876.jpg‘!’

바스티안이 이블린에게 성큼 다가섰고, 이블린은 곧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제 입을 막았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 황제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리와 등을 받친 단단한 팔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1655079883058.jpg“실례.”

늦은 양해를 구한 바스티안이 빙긋 웃자, 두 사람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블린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땅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16550798773876.jpg‘황제의 능력이 이런 거구나!’

책에서만 봤지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엘레모트는 정령들의 사랑을 받는 땅이지만, 정작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았다. 그리고 엘레모트의 황제는 대대로 어떠한 술식이나 도구 없이도 정령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황제가 가진 힘이 강력할수록 제국은 번영했고, 엘레모트는 건국 이래 늘 대륙의 패자였다.

1655079883058.jpg‘하여간, 뻣뻣하기는.’

적당히 저택에서 멀어진 곳에 자리한 바스티안은 제 품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블린을 내려다보았다. 와중에 그의 옷을 붙잡는 대신 두 주먹을 꾹 움켜쥐고 있는 걸 보니 웃음이 났다.

1655079883058.jpg“이제 눈 떠도 되는데, 단장.”

16550798773876.jpg“…….”

흔들림도 멈췄고, 귓가에서 요란하던 바람 소리도 잠잠해졌다. 이블린이 살그머니 눈을 떴다.

16550798773876.jpg“바, 방금 그건…….”

황제의 품에서 벗어나 땅을 밟은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늘을 날다니.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해 볼 줄이야. 아직도 놀란 심장이 쿵덕대고 있었다.

1655079883058.jpg“바람을 이용한 거야.”

황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보드라운 바람이 이블린의 볼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더니만, 이제는 신기해서 커다래진 이블린의 눈을 보며 바스티안은 픽 웃었다.

16550798773876.jpg“바스티안, 방금 그거 뭐야? 나도 가르쳐주면 안 돼?”

1655079883058.jpg‘그때도 저런 표정이었지.’

이럴 때 보면 이블린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1655079883058.jpg‘나와 관련된 기억을 전부 잃었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지.’

바스티안의 미소가 쓰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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