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 옆에 붙어 있어2021.10.17.
“바……스티. 미안…… 내가…….”
작은 얼굴을 잔인하게 물들이던 붉은 액체. 서서히 빛이 꺼져가던 에메랄드색 눈동자.
“이블린, 죽으면 안 돼. 내가 살려줄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만 믿어.”
죽어가는 새끼 사슴처럼 미약한 숨만 토해내던 입술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입을 맞췄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래, 모든 것이 생생했다. 빌어먹게도. 이블린은 잊었어도 그는 잊을 수 없는 기억.
“폐하?”
청아하면서 강단 있는 목소리가 바스티안을 일깨웠다. 바스티안의 침잠했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고, 기억 속 앳된 얼굴 위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지금의 이블린이 겹쳐졌다. 살아 있는 이블린. 그가 살렸고, 그가 살렸기 때문에 죽을 위기에 몰렸고. 그렇기에 다시 그가 지켜야만 하는 존재.
“아.”
작게 탄식하는 바스티안을 보며 이블린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황제의 표정이 기묘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평소의 여유로운 얼굴로 돌아오긴 했지만.
“폐하.”
바스티안과 대화할 준비를 마친 이블린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언제 또 황제와 독대할 수 있을지 모르니 지금 확실히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먼저 기사 내용은 전부 허위라는 것부터 말씀드립니다.”
“…….”
“결백합니다. 기사단장으로서 문제가 될 행동은 없었습니다.”
바스티안은 양 손바닥까지 펼쳐 내보이며 단호하게 말하는 이블린을 가만히 응시했다. 늘 도도한 표정으로 속내를 숨기려 드는 이블린이지만, 절박한 심정이 느껴졌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말아쥐었는지, 하얀 손등 위로 새파란 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저는, 기사 내용처럼…… 그런 일이 생길 만한 짓을 한 적도 없고요.”
“……그런 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는데, 단장.”
뜸을 들이던 바스티안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차.’
강조하려다 쓸데없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멋쩍어진 이블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아, 물론 내게는 꽤 유용한 정보였어.”
“네?”
“그냥 그렇다고.”
바스티안이 턱을 문지르며 눈썹을 까딱였다.
“좋아, 마음에 드는 내용이군. 그러니 나도 그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바스티안이 눈을 내리뜬 채 씩 웃었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 회녹색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을 낸 듯도 했다.
“난 그대에게 계속 호위기사단장직을 맡길 생각이야.”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안도한 기색을 숨긴 이블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다행이긴 하지만, 그의 진짜 속내를 모르니 무턱대고 좋아하긴 일렀다.
“이유.”
성큼 걸어가 이블린의 코앞에서 멈춘 바스티안이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빤히 보기만 하는 시선에 이블린이 당황할 때였다. 갑자기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 주변으로 회오리바람에 섞인 나뭇잎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곧 커다란 나뭇잎 장벽이 생기며 주변의 소리가 전부 차단됐다. 이제 들리는 거라고는 그녀의 숨소리뿐이었다. 이블린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그의 짙은 회색 눈동자를 보는데 어쩐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이상했다. 연회 날 밤, 그녀의 몸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제의 눈빛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 입술이 닿았……. 이블린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건 그냥 구호 활동이야. 첫 키스 같은 게 아니야.’
이블린이 갑작스레 떠오른 그날 밤의 기억을 털어내는데 황제의 얼굴이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왔다.
“!”
이블린이 숨을 꾹 참는 사이, 볼 옆을 스쳐 지나간 바스티안의 입술이 이블린의 귓가에 멈췄다.
“말했잖아, 가장 오래,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하는 자리라 그렇다고.”
은근한 속삭임이었다. 따스한 숨결이 닿은 귓바퀴가 간질거렸다. 귀를 손으로 덮은 이블린이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말, 장난인 줄 알았는데. 이블린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가득 찼다.
“내 옆에 붙어 있도록 해. 그게 그대가 살고, 내가 사는 길이지.”
“그게 무슨…….”
픽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이블린은 한 달 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막 호위기사단장에 임명된 직후였다. 황제의 명령에 죽고 사는 호위기사단이지만, 환자라던, 그것도 여자인 이블린 티에르가 그들의 상관이 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호위기사단 내부에서도 이블린이 단장이 된 걸 놓고 여러 말이 나돌았는데, 그런 불만을 불식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블린이 기사단 훈련에 처음 참석한 날이었다. 검끼리 부딪치며 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우던 때, 하필 부러진 칼날이 황제에게 날아가고 말았다.
“폐하!”
그 순간, 가장 먼저 몸을 날려 검을 쳐낸 건 이블린이었다. 환자에다 유약한 공녀의 이미지가 한 번에 깨진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이블린은 기사단원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블린은 아직까지도 황제가 피할 수 있는데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이블린이 황제에게 달려가던 때, 그는 분명 이블린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으니까.
‘왜? 어째서?’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이블린은 참기로 했다. 어쨌든 황제는 그녀의 자리를 지켜주려 한다.
‘그거면 됐지.’
더 따지고 물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대대로 티에르 가문의 가주들이 거쳐 온 자리인 만큼, 저 또한 충성을 다할겁니다.”
충성이라. 바스티안의 입술 사이로 픽 웃음이 샜다.
“뭐,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런데 폐하, 아까 그곳에 계셨던 건…….”
이블린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거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존재로 추앙받는 황제라지만, 그곳은 그녀만 아는 개구멍이었다.
“집착이 심하네, 단장.”
“그것이.”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말해줄까?”
“…….”
“가택침입, 을 하려 했지, 아마?”
“……네?”
“담을 넘으려 했던 것도 같고? 무단결근한 부하를 잡아서 벌을 줄까 했거든.”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리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은 한숨을 삼켰다. 황제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더 캐물을 게 남았나?”
“아닙니다, 제가 어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 적당히 눈감아주자고.”
쓸데없는 건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딜 가? 내 옆에 붙어 있으라니까.”
중요한 건을 해결한 이블린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바스티안은 턱 끝으로 제 곁을 가리켰다.
“아, 네.”
다시 앞으로 다가간 이블린이 바스티안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섰다. 이블린이 다가오자 달콤한 향이 났다. 바스티안은 잠시 숨을 멈췄다.
“폐하?”
가까이 오라 해놓고 막상 황제는 말이 없었다. 이블린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단장직을 보장받았으니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여유를 되찾은 이블린은 황제를 흘끗 살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황제의 얼굴 위로 부서져 내리며 선이 또렷한 얼굴을 더욱 빛나게 했다. 가로로 긴 눈이 웃을 때면 야살스레 휜다는 건 최측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가 농담할 때면 꼭 비웃듯이 붉은 입술 끝의 한쪽만 비죽 올라선다는 것도. 높은 콧날을 쓱 훔쳐본 이블린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확실히 잘난 얼굴이기는 했다. 감히 제국의 황제를 대상으로 하기엔 불순한 생각이었지만, 뭐, 그가 머릿속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아니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
황제의 지적에 화들짝 놀란 이블린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그래?”
황제는 그러냐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아, 깜짝이야.’
이블린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히 찔린 이블린의 녹안이 스르르 옆으로 굴러갈 때였다. 바스티안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제 머리 위를 스치자 이블린이 몸을 움츠렸다.
“나뭇잎.”
픽 웃으며 이블린의 손을 잡아 펼치게 한 바스티안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나뭇잎을 내려놓았다. 이블린의 눈동자와 같은 옅은 녹색이었다. 커다란 손이 이블린의 손을 감싸 오므리게 한 뒤 떨어져 나갔다.
“…….”
그와 닿았던 부위에서 찌릿, 하고 무언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쿵, 쿵.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있었다.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도 같고.
‘이건, 뭐지?’
하늘로 치솟는 바람에 놀랐을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았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이블린은 멍하니 바스티안을 올려다봤다.
“단장. 사실 그대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어.”
“네, 폐하.”
긴장한 이블린이 나뭇잎을 꾹 쥐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대에게 거래를 제안하려고 해.”
“거래……요?”
“나와 결혼해줬으면 하는데.”
“……네?”
황제의 다음 말을 들은 이블린은 그만 손에 쥔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 * * 황궁 본궁으로 향하는 길목.
“늦었군.”
말과는 다르게 회의실로 향하는 티에르 공작의 걸음은 급하지 않았다. 영지 시찰을 핑계로 며칠이나 수도를 비운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공녀님은 침실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는군요.”
공작의 곁으로 다가온 보좌관이 조용히 보고했다.
“그래?”
드디어 기가 꺾인 건가. 공작의 가느다란 눈이 더 가늘어졌다. 이번 스캔들이 그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데 성공하긴 한 모양이었다. 어릴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이블린은 점점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지난 2년 내내 아프다는 핑계로 틀어박혀 있더니,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호위기사단장이 된 이블린을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가 그 건방진 아이가 언제 제 목을 조여 올지 모르니.
‘도도하고 거만한 제 어미를 빼닮았지.’
이블린의 녹안과 마주할 때면 괜히 소름이 끼쳤다. 제 어미와 꼭 닮은 얼굴이라 더욱.
‘그년은 죽었고, 공작가는 이제 내 것이야.’
이블린만 없으면 말이다. 불길함을 떨쳐낸 공작이 혀를 찼다.
“그런데, 그 남편 후보에 대한 내용은 뭔가. 그런 걸 기사에 내라고 한 적은 없었을 텐데.”
공작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귀한 영애가 실상은 천박한 여인이었다고 대중들이 실망하게 만들어야 했다. 타이밍 좋게 이블린이 연회에서 ‘사고’까지 쳐주었고. 그런데 오히려 쟁쟁한 남편 후보들로 인해 세기의 로맨스인 것처럼 열광하는 여론도 생겨났다.
“그것이, 공녀님의 인기 때문인지 기자들이 살을 붙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티에르라 이거지.”
공작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어쨌든 이블린은 티에르 공작가의 유일한 영애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사직서를 처리하지 않으셨다지?”
“네, 급한 것은 아니라며 무시하셨답니다.”
“…….”
공작은 여우 같은 황제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긴 했다.
“계속 무시할 수만은 없으실 텐데? 하긴, 어린 황제께서 뭘 알겠나.”
아무리 대중이 이블린에게 호의적이라 한들, 그런 스캔들이 터진 이상 기사단장직만큼은 유지할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감히 황제까지 거론된 마당이었다.
“슬슬 마르다를 데려와야겠군, 그 아이를 황후로 올릴 거야.”
회의실 앞에 이른 공작이 걸음을 멈췄다.
“미래의 사위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몹시 궁금하군.”
얇은 입술 끝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