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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의외로 순정파 (6/95)

6. 의외로 순정파2021.10.20.

그 아이가 황후가 된다면…….

16550799638913.jpg“크흠.”

공작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웃음을 참아냈다. 황제를 만나기 전, 잠시 감정을 다스릴 때였다.

1655079963892.jpg“안 들어갑니까?”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공작이 손가락을 움찔했다. 몸을 천천히 돌린 공작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16550799638913.jpg“폐하.”

다시 고개를 든 공작의 입가에는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1655079963892.jpg“오랜만입니다, 공작. 요 며칠 그대의 얼굴 한 번 보기가 퍽 힘들더군요.”

16550799638913.jpg“죄송합니다, 폐하. 갑자기 영지에 일이 생겨.”

공작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을 읊었다. 입장문 하나만 던져놓고 사라진 게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어린 녀석이 비꼬는 말에 발끈할 필요는 없었다.

1655079963892.jpg“아하.”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바스티안의 회녹색 눈동자가 공작의 얼굴을 훑었다. 깔보듯 묘한 시선이었다.

1655079963892.jpg“경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군요. 못 본 사이 많이 상했습니다.”

바스티안이 딱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혀를 차는 건 덤이었다.

16550799638913.jpg‘저 건방진.’

공작의 주름진 눈가가 꿈틀댔다.

16550799638913.jpg“죄송합니다, 폐하. 여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제 탓입니다.”

일부러 스캔들 쪽으로 화제를 돌린 공작이 괴로운 척 연기했다. 표정만 본다면 그는 죽을죄를 지은 사람으로 보였다.

1655079963892.jpg“이런. 공작이 그렇게 말하면, 내 죄책감이 더욱 커지는데 말입니다.”

일자로 짙게 뻗은 바스티안의 눈썹 끝이 아래로 내려갔다.

16550799638913.jpg“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1655079963892.jpg“우리 둘 다 회의에 늦었으니, 미안하지만 공작. 자세한 이야기는 황실 소식지를 통해 확인하셔야겠습니다.”

빙긋 웃은 바스티안이 공작을 지나쳐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16550799638913.jpg‘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평소처럼 느긋하기만 한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공작은 찝찝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공작가로 돌아가던 티에르 공작의 마차가 멈춰 섰다.

16550799661069.jpg“호외요! 호외!”

거리가 무척 소란스러웠다. 창의 커튼을 걷어보니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너도나도 신문을 보고 있었다.

16550799638913.jpg“가져오게.”

16550799661069.jpg“네, 공작님.”

별생각 없이 명령을 내렸던 공작은 곧 경악하고 말았다.

16550799638913.jpg“아니, 이게 대체 무슨……!”

여느 때와 달리 긴급으로 발행된 신문 위에는 굵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황실 공식 선언. ‘티에르 공녀는 황제의 연인’] 공작의 움푹 팬 볼이 파들파들 떨렸다. * * *

1655079966109.jpg“이례적인 일이네. 저녁에도 신문을 다 받아보고.”

침대 위에 엎드려 황실 소식지를 펼친 이블린이 중얼거렸다. 황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공식 루트였다. 다른 신문들은 거들떠볼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티에르 공녀가 호위기사단장직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급작스레 선황제를 잃고 황위에 오르신 폐하께 공녀가 힘이 되어주며……]

1655079966109.jpg“음.”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이블린이 입술을 쭉 내밀고는 턱을 괬다. 본인의 이야기지만 사실이 아니라 그런지 낯설게 느껴졌다. 황제의 첫 아이니만큼 고려할 사항이 많아 발표가 늦어졌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제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상황에 송구하다. 즉위식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공녀와는 의논 끝에 천천히 결혼식을 치르기로 합의하였다.]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한 이블린이 몸을 빙글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1655079966109.jpg‘천천히라면, 언제쯤일까? 결혼식을 진짜 하긴 하려나?’

훗날 생길 변수를 고려해 여러모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아주 완벽한 입장문이었다.

16550799661069.jpg“공녀님, 대체 어쩌시려고요.”

이블린이 기사를 읽는 동안 안절부절못하던 알리에타가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누가 들을까 겁나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1655079966109.jpg“괜찮아, 알리에타.”

16550799661069.jpg“괜찮기는요!”

알리에타가 펄쩍 뛰었다. 해결책을 찾았다며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더니, 이런 해결책인 줄은 몰랐다. 아이도 가져본 적 없는 여인이 임신을 인정하다니. 알리에타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16550799661069.jpg“공녀님,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폐하와 무슨 일을 벌이시…….”

1655079966109.jpg“쉿, 입조심해야지.”

몸을 일으킨 이블린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1655079966109.jpg“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는 사람은, 알리에타와 휴이터. 단둘뿐이야. 알지?”

16550799661069.jpg“공녀니임.”

1655079966109.jpg“아버지에게서 가문을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그러니까 알리에타도 날 도와줘, 부탁이야.”

이블린의 커다란 눈에 금방 물기가 어렸다. 젖은 눈동자로 부탁하면 결국에는 뭐든 다 들어주던 알리에타였다.

16550799661069.jpg“하아, 공녀님.”

알리에타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블린은 이번에도 작전이 먹혔다는 걸 확신했다.

1655079966109.jpg“아버지는 아직 안 오신 거지?”

16550799661069.jpg“네.”

1655079966109.jpg“이제 소식도 들으셨을 테고,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정말 궁금해지네.”

이블린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분노할 부친의 표정을 떠올리자 조금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1655079966109.jpg“생각보다 괜찮은데?”

이제야 좀 옳은 선택을 한 것 같다. 처음 황제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이 사람이 미친 건가 싶었는데. 이블린은 몇 시간 전, 황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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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79966109.jpg“결혼이요? 방금, 결혼이라고 하셨나요?”

이블린의 손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따라가던 바스티안의 눈동자가 다시 이블린의 얼굴로 향했다.

1655079963892.jpg“그래, 내가 그 아이의 아빠가 될까 해. 물론, 없다는 건 알지만.”

긴 손가락 끝으로 이블린의 납작한 배를 콕 찌르듯 가리킨 바스티안이 씩 웃었다.

1655079966109.jpg“하지만…….”

1655079963892.jpg“거래라고 했지, 진짜 결혼하자는 건 아니야.”

바스티안이 덧붙인 설명에 이블린이 입을 다물었다.

1655079963892.jpg“정확히 표현하자면, ‘계약 결혼’이지. 서로 원하는 조건을 걸고 기간을 정해둔.”

이블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황제에게 이런 제안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1655079963892.jpg“내 제안에 응한다면, 난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 줄 생각이고.”

1655079966109.jpg“……무엇이든지요?”

1655079963892.jpg“그래, 무엇이든.”

이블린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지는 걸 보며 바스티안은 픽 웃었다. 똑똑한 이블린이니 잘 알 거다. 이 거래로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게 아주 많다는 걸.

1655079963892.jpg“바로 거절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긍정적인 것 같군.”

1655079966109.jpg“그렇지만, 폐하.”

1655079963892.jpg“이 스캔들의 첫 번째 타깃은 그대지만, 결국 나이기도 해.”

1655079966109.jpg“…….”

1655079963892.jpg“그러니 그들에게는 기사 내용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어차피 흠집 내기용이니까. 그대도 잘 알지 않나.”

이블린은 눈을 내리깔았다. 황제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이미 스캔들이 터진 이상, 훗날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이미 흠집 나버린 명예는 돌아오지 않는다. 밝혀진 진실을 믿지 않는 자들도 존재할 테고.

1655079963892.jpg“하지만, 주인공이 제국의 황제와 최고의 가문인 티에르 가의 공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1655079966109.jpg‘……그렇겠지.’

이블린이 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혼전 임신이니 시끄럽기야 하겠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축복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제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황실이고, 바스티안은 유일하게 남은 황가의 일원이니까. 티에르 가문이 지금의 권력을 갖게 된 것도 황실에 충성해왔기 때문이었다.

1655079963892.jpg“선택을 강요하는 건 아니야.”

핏기가 사라진 이블린의 하얀 입술을 손끝으로 눌러 빼낸 바스티안이 다정하게 읊조렸다. 그의 말이 망설이는 이블린에게 달콤한 유혹이 되어야 했다.

1655079966109.jpg“그럼, 폐하께서 바라시는 건요?”

1655079963892.jpg“뭐?”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섰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1655079966109.jpg“폐하께서 이 ‘가짜’ 결혼으로 얻으시는 건 무엇인가요?”

이유 없이 제안하시는 건 아닐 거잖아요? 이블린의 투명한 눈동자가 그리 묻는 것 같았다. 바스티안은 입꼬리를 매만지다 웃어버렸다.

1655079963892.jpg“음, 우선은……. 원치 않는 여인과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1655079966109.jpg“아.”

그가 황위에 오른 이후, 귀족 회의에서 매번 황후 문제가 거론된다는 건 이블린도 잘 알았다.

1655079963892.jpg“난 이미 원하는 상대가 있거든.”

1655079966109.jpg“…….”

상대가, 있다고? 바스티안이 흘리듯 뱉은 말에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움칠했다. 그렇구나, 상대가 있구나.

1655079966109.jpg“그런데 왜 저에게?”

무례한가 싶을 만큼 바스티안을 빤히 보던 이블린이 의구심을 드러냈다.

1655079963892.jpg“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뭐, 어쨌든 나도 손해 보는 건 아니라는 것만 말해두지.”

1655079966109.jpg“한마디로, 방패막이가 되라는 말씀이시군요.”

1655079963892.jpg“그런 셈인가.”

하긴, 적어도 아이가 있다고 공표하면 빨리 황후를 들여 후사를 보라는 압박은 사라지겠지.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데, 굳이 황제의 연애사까지 시시콜콜 물을 이유는 없었다.

1655079966109.jpg“……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1655079963892.jpg“더 고민해보지 않아도 되겠어? 잘 생각해, 이걸 받아들이는 순간 그대는 내 아이, 황제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 되는 거야.”

바스티안이 선심을 쓰는 척 한 번 더 물었다.

1655079963892.jpg“그대에게 꽤 위험한 제안을 한 거라고, 탐나는 미끼를 흔들면서 말이야.”

1655079966109.jpg“그 미끼가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1655079963892.jpg“그건 장담하지.”

이블린의 단호한 대답에 바스티안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1655079963892.jpg“오늘 저녁에 기사가 나갈 거야.”

1655079966109.jpg“빠르네요.”

1655079963892.jpg“그대의 마음이 바뀌면, 나도 곤란하거든.”

1655079966109.jpg“네?”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던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1655079963892.jpg“기사가 나가고 난 뒤 다시 만나지. 그때까지 그대가 원하는 조건을 생각해서 정리하도록.”

  . . .

1655079966109.jpg‘곤란하다니. 왜?’

황제의 말을 곱씹어 본 이블린이 갸웃거렸다. 그는 그녀만큼이나 이 계약 결혼이 꼭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1655079966109.jpg‘황후 문제 하나로?’

제국에서 황후를 선발하는 절차는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롭긴 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황제의 의지였다.

1655079966109.jpg‘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황후가 되기에 곤란한 상대를 마음에 담았나.

1655079966109.jpg“의외로, 순정파시네.”

여자에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쩐지 이블린의 기분이 묘해질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하녀가 찾아왔다.

1655079966109.jpg“무슨 일이지?”

16550799661069.jpg“공작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공녀님을 찾으십니다.”

올 게 왔구나.

1655079966109.jpg“지금 가.”

눈에 힘을 준 이블린이 침대를 벗어났다. * * * 부친의 집무실 앞에 선 이블린이 말아 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표정 없이 서 있는 이블린은 마치 새하얀 도자기 인형 같았다.

1655079966109.jpg‘이번엔 무엇이 날아오려나.’

책? 아니면 화병?

16550799638913.jpg“들어와.”

상상하며 기다리자니 허락이 떨어졌다. 이블린은 짧게 숨을 쉰 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외출복 그대로인 공작은 화가 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16550799638913.jpg“이블린 티에르.”

이블린은 책상 주변에 구겨진 신문을 확인했다. 한바탕 화풀이를 한 모양인지 깨진 유리 파편도 가득했다.

16550799638913.jpg“기사 내용이 사실이냐?”

1655079966109.jpg“……네.”

부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는 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벌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1655079966109.jpg‘하지만, 감히 황제의 아이를 가진 내게 손찌검은 못 하겠지.’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블린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허위 스캔들이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을 거다.

16550799638913.jpg“후우.”

부친의 발이 정신 사납게 움직였다. 제 예상에서 벗어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16550799638913.jpg“이블린 티에르. 널 그냥 두는 게 아니었다. 감히 이딴 일을 벌여? 앞으로 저택 밖으로는 나갈 생각도 하지 말…….”

16550799661069.jpg“공작님.”

16550799638913.jpg“무슨 일이냐.”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말을 끝맺지 못한 티에르 공작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16550799661069.jpg“화, 황궁에서 공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16550799638913.jpg“뭐야?”

공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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