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내 침실로 와 (7/95)

7. 내 침실로 와2021.10.24.

16550799926796.jpg

16550799926855.jpg“앗.”

이블린은 일부러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깜짝 놀랐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550799926859.jpg“…….”

고개를 휙 돌린 공작이 뭐냐는 듯 이블린을 노려봤다.

16550799926855.jpg“폐하께서 제가 걱정되신 모양이에요. 데이트를 청하신 걸 보니.”

16550799926859.jpg“데이트?”

눈치 보는 사람처럼 웅얼댔지만, 공작의 귀에는 쏙쏙 박혔다. 이블린은 쑥스럽다는 듯 볼을 붉게 물들였고, 공작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게졌다.

16550799926859.jpg“이블린 티에르. 네가 미친 게 분명하구나, 지금 이런 상황에 그런 헛소리를 하다니!”

16550799926855.jpg“하지만, 그간 아버지께서 못 나가게 하신 탓에 폐하를 뵙지 못했는걸요.”

16550799926859.jpg“뭐야?”

이블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새침하게 말하자 공작의 눈빛이 뱀처럼 사납게 번득였다.

16550799926859.jpg“아프다고 해!”

던질 것을 찾으려 책상 위를 더듬던 공작이 허탕을 치자 문 쪽으로 버럭 소리쳤다.

16550799926886.jpg“화, 황명입니다, 공작님.”

16550799926859.jpg“고작 여자나 불러내자고 수작 부리는 게 황명은 무슨. 이블린 티에르, 넌 오늘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표독스러운 말을 들은 이블린이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쩜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를 않는지.

16550799926886.jpg“공작님, 오늘은 일단 보내시지요.”

집무실에서 벌어진 소란에 모습을 드러낸 보좌관이 공작을 만류했다.

16550799926859.jpg“자네까지 정신 나갔나.”

16550799926886.jpg“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상당해서 사병들까지 저택 밖으로 내보낸 상황입니다.”

16550799926859.jpg“뭐? 대체 어떻게들 알고 기어 온 거야.”

공작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세간의 시선이었다. 티에르 공작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아내의 후광을 업고 운 좋게 신분 상승한 반쪽짜리 공작이라는 게 그의 약점이었으니까.

16550799926859.jpg“……내보내는 대신 사람을 붙이도록 해.”

16550799926886.jpg“에스코트를 위해 호위기사단이 왔답니다.”

16550799926859.jpg“제기랄!”

결국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지 못한 공작이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16550799926855.jpg‘늘 당신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요.’

이블린은 제 발등을 직접 찍어버린 부친을 한껏 감상했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느라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야 하긴 했지만. * * *

16550799926886.jpg“세상에! 나 황실 마차를 보는 건 처음이야.”

16550799926886.jpg“나도나도, 너무 예뻐!”

우르르 몰려 있던 고용인들이 저택 앞에 세워진 마차를 보며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커다란 마차는 황실에서도 특별한 날에나 사용한다는 대외용이었다. 새하얀 표면에는 황금이 나무줄기처럼 뻗어져 있는데, 그 사이마다 온갖 보석이 나무에 매달린 열매처럼 박혀 있었다. 마차 양옆으로 푸른색 제복을 입은 호위 기사들이 정렬해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웅장하게 만들었다.

16550799926886.jpg“폐하께서 우리 공녀님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

16550799926886.jpg“어머, 나 어쩐지 눈물 날 것 같아.”

16550799926886.jpg“주책은.”

고용인들은 감격에 찬 눈물을 훔치면서도 고함치듯 대화를 이어갔다. 저택 밖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블린의 이름을 외치는 기자들과 아이의 존재를 반기는 군중들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와중에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며 마차에 오르는 이블린은 어찌나 예쁜지. 크게 장식이 없는 물빛 드레스를 입었을 뿐인데도 이블린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16550799926886.jpg“공녀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16550799926886.jpg“배는 따뜻하게 해주시고요. 홑몸도 아니시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16550799926855.jpg“다들 부끄럽게 이러기야?”

볼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인 이블린이 눈을 흘기자 귀엽다는 듯 웃던 이들이 황급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이블린은 그들의 주인이었다. 물론 그녀가 위치를 내세워 오만하게 구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16550799926855.jpg“다녀올게.”

식솔들의 떠들썩한 배웅을 받으며 공작가의 정문을 벗어난 마차는 얼마 후 도심의 번화가에서 멈췄다.

16550799926886.jpg“단장님, 도착했습니다.”

굵은 목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16550799926886.jpg“이렇게 뵈니 좋습니다, 단장님.”

부단장인 오단이 이블린에게 손을 내밀며 씩씩하게 말했다.

16550799926886.jpg“그간 일도 안 하시고, 좋으셨겠습니다?”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이들도 이블린을 보며 장난을 걸어왔다.

16550799926855.jpg“놀리는 거라면 그만둬요, 다들.”

이블린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핀잔을 줬다. 평상시에는 동료이자 부하인 이들의 에스코트를 받자니 민망해서 손등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열자마자 친근하게 구는 이들의 순박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를 단장으로서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할 테고.

16550799926855.jpg“그런데, 정말 여기가 약속 장소인가요?”

입구 차양부터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붉은 벽돌 건물을 본 이블린이 살짝 당황했다. 몇 년 전부터 귀족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티 하우스였다.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보니, 티 하우스를 찾는 횟수가 권력의 크기를 나타낸다는 말도 있었다.

16550799926886.jpg“네, 폐하께서 이곳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16550799926855.jpg‘여긴 보는 눈과 귀가 많을 텐데.’

걱정하며 커다란 문을 지나친 이블린은 곧 조용한 실내를 확인하고 눈을 깜빡였다.

16550799926886.jpg“공녀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블린의 앞으로 다가온 지배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16550799926855.jpg“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죠?”

16550799926886.jpg“그야, 폐하께서 통째로 빌리셨으니까요. 아마도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16550799926855.jpg“……어머나.”

지배인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이블린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인의 깜짝 이벤트에 감동한 듯 보일 터. 반 박자 늦기는 했지만 잘 먹힌 것 같았다. 그녀의 반응에 지배인이 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는 걸 보면.

16550799926855.jpg‘하, 이렇게 반사적으로 나오는 미소라니.’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오를 때였다.

1655080002125.jpg“이블린.”

그녀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계단 끝에 서 있는 황제가 보였다.

16550799926855.jpg“폐하.”

뒤에서 보고 있을 직원들을 의식한 이블린이 드레스자락을 잡으며 무릎을 굽혔다 폈다. 나름대로 친근하지만 정중한 인사였다.

16550799926855.jpg‘……지금 입꼬리를 씰룩이신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이블린이 미심쩍어하는 동안 계단을 내려온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바로 앞에 섰다. 눈을 마주치며 해사하게 웃은 바스티안이 곧장 이블린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품에 안았다.

1655080002125.jpg“보고 싶었어, 이브.”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이블린의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애정 공격에 이블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16550799926796.jpg

16550799926855.jpg“폐, 폐하?”

딱딱한 가슴팍에 눌린 입술이 힘겹게 움직였다.

1655080002125.jpg“잠시만 가만히 있어, 단장.”

정수리 위로 이블린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16550799926855.jpg“왜 이러시는 건지 설명을 좀?”

참 단단히 끌어안기도 했다. 겨우 틈을 만든 이블린이 정색했다.

1655080002125.jpg“내일 기사가 또 나갈 텐데, 그때 실릴 사진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16550799926855.jpg“……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1655080002125.jpg“따지기 전에 허리에 손이라도 두르지 그래? 손발이 맞아야 연기도 먹히지.”

잠시 망설이던 이블린은 작게 한숨을 쉰 뒤 순순히 황제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꽉 끌어안은 건 아니고 정말 수줍게 손가락만 가져다 댄 정도였다.

1655080002125.jpg“그게 안은 건가?”

16550799926855.jpg“저는 이블린 티에르입니다, 폐하.”

바스티안이 픽 웃었다. ‘이런 공공장소에서 그런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라는 뜻이 내포된 한마디였다.

1655080002125.jpg“그래, 그리고 그 티에르 공녀는 나와 아이를 만들었지. 결혼하기도 전부터 말이야.”

16550799926855.jpg“폐하!”

짓궂은 말에 기겁한 이블린이 미간을 좁혔다. 허리, 이대로 확 꼬집어 버릴까?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안겨 있던 몸이 곧 자유를 찾았다.

1655080002125.jpg“이만 올라갈까.”

따뜻한 온기가 빠르게 사라지고 그녀의 시야에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1655080002125.jpg“더 안고 있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거든.”

16550799926855.jpg“…….”

역시 독심술이 있는 걸까. 아무래도 황제의 능력에 대해 더 공부해봐야 할 것 같았다. * * *

16550799926855.jpg“그런데, 이런 데서 만나도 괜찮은 건가요?”

황제가 빼 준 의자에 앉던 이블린이 걱정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소라면 사람으로 꽉 찼을 2층 홀은 텅텅 비어 있었다.

1655080002125.jpg“사람들 눈에 띄고 좋지 않나. 기자들에게 기삿거리도 제공하고. 음, 내일 기사가 기대되는데.”

바스티안이 빙글거리며 이블린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16550799926855.jpg“폐하, 생각해보라 하신 계약 조건…….”

1655080002125.jpg“뭐가 그리 급해.”

수긍한 이블린이 곧장 본론을 꺼내자 바스티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1655080002125.jpg“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오후 내내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귀족들과 입씨름 하느라 힘들었거든.”

바스티안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하소연하자 이블린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닫는 게 있었다. 황제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그것도 그녀 앞에서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좋게? 나쁘게?

16550799926855.jpg“……저는 케이크 한 조각이면 됩니다.”

한층 차분해진 이블린이 여유를 되찾았다. 사실, 온종일 눈앞의 남자 때문에 정신이 없던 터라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1655080002125.jpg“아, 케이크는 안 돼.”

16550799926855.jpg“네?”

1655080002125.jpg“또 쓰러지려고?”

16550799926855.jpg“폐하, 그때는…….”

1655080002125.jpg“양보해, 케이크 만드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해버리기 전에.”

내내 빙글거리던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난리람? 눈만 가늘게 뜬 이블린이 뭐라 반박할까 고민하는데 계단을 오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양손에 음식 접시를 든 직원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연분홍색 테이블보 위는 온갖 음식으로 가득 찼다. 빵 종류만 다섯 가지에 함께 곁들일 스튜가 세 종류, 거기에 얇게 저며 구운 양고기까지 더해졌다.

16550799926855.jpg‘배가 많이 고프셨나.’

이블린이 어깨의 힘을 풀자 바스티안이 그 앞으로 트라디시옹을 밀어주었다. 이블린의 시선이 빵을 따라 움직였다. 무화과가 들어간 트라디시옹은 이블린이 특히 좋아하는 거였다.

1655080002125.jpg“자고로 협상은 배가 부른 상태로 하는 거야.”

16550799926855.jpg“…….”

협상. 두 사람의 관계를 깨닫게 해주는 단어였다. 직원들이 사라지고 바스티안이 손가락을 부딪치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1655080002125.jpg“대화가 새어나가면 안 되니까. 자, 단장. 그럼 하나씩 서로 원하는 걸 이야기해볼까?”

16550799926855.jpg“폐하, 호위기사단을 제 사적인 일에 빌려도 될까요?”

이블린이 내내 생각했던 조건 중 하나를 꺼냈다. 제일 먼저 모친의 사고부터 조사할 계획이었다. 그다음엔 부친의 비리에 대해 파헤칠 생각이었고.

1655080002125.jpg“얼마든지. 대신 움직이기 전이든, 후든 내게 공유만 해.”

퍽 긴장하고 꺼낸 말인데 황제의 반응은 심상했다.

1655080002125.jpg“그럼 내 차례인가.”

16550799926855.jpg“네.”

첫 번째 제안이 쉽게 받아들여져서 다행이었다. 이블린은 조금 편안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0002125.jpg“황궁으로 들어와.”

16550799926855.jpg“황궁, 이요?”

1655080002125.jpg“아, 정확히는 황제궁이야. 앞으로 내 침실을 같이 쓰도록 해.”

뭐? 어디라고? 이블린은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