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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먹여줘, 이블린 (8/95)

8. 먹여줘, 이블린2021.10.27.

황제궁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왜 침실을?

16550800465251.jpg“그건 곤란합니다, 폐하.”

이블린이 난색을 보였다.

16550800465258.jpg“곤란하다? 왜?”

나이프를 내려놓은 바스티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16550800465258.jpg“기사단원들은 전부 황제궁에서 머무르고 있고, 단장에게는 개인용 집무실과 거주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나.”

16550800465251.jpg“하지만, 황제의 ‘침실’에서 지낸 호위기사단장은 없죠.”

지금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겠죠? 이블린이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16550800465258.jpg“난 또 뭐라고.”

바스티안이 코웃음을 쳤다.

16550800465258.jpg“잊었나? 그대는 단순한 호위기사단장이 아니야. 그럼 매번 공작가에서 출퇴근을 하겠다는 건가? 임신한 몸으로 말을 타고?”

16550800465251.jpg“그건…….”

황제의 반격에 이블린의 말문이 막혔다.

16550800465258.jpg“단장직을 지키고 싶다며? 곧 귀족 회의에서 별걸 다 트집 잡아 그대의 단장직 사퇴를 요구해 올 텐데?”

16550800465251.jpg“…….”

16550800465258.jpg“그대는 어설픈 각오로 이 일에 임할 생각인가?”

어디 한 번 대답해보라는 듯 빤히 보는 황제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늘 그녀에게 능글거리던 황제가 냉정한 얼굴로 질책하는 걸 듣고 있으니, 본능적으로 압도되는 것 같았다. 그래, 괜히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라는 소문이 돈 건 아니겠지.

16550800465251.jpg“폐하, 저는 아직 공작가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잠깐 머뭇거린 이블린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당분간은 공작가에 남아 부친의 움직임을 살필 생각이었다. 가까이에 있어야 미세한 변화도 눈치챌 수 있으니까.

16550800465258.jpg“해야 할 일이라.”

바스티안이 말끝을 늘였다. 그는 이블린이 난감해하며 입술을 깨무는 걸 지켜봤다.

16550800465258.jpg‘고집하고는. 그냥 조르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갈 텐데.’

평소에는 영민하게 굴다가도 가끔 목각 인형처럼 뻣뻣해지는 이블린 티에르다. 하긴, 티에르 가의 핏줄이 어디 가겠나.

16550800465258.jpg“단장.”

16550800465251.jpg“네, 폐하.”

바스티안이 부르자 이블린의 고개가 들렸다. 새싹처럼 연한 녹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투명했다.

16550800465258.jpg“한번 웃어 보겠어?”

16550800465251.jpg“……네?”

16550800465258.jpg“웃어 보라고, 이렇게.”

바스티안이 제 손가락 끝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16550800465251.jpg“이렇, 게요?”

이블린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바스티안이 턱을 매만졌다.

16550800465258.jpg“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바스티안이 눈꼬리를 휘며 지적했다. 이블린은 어쩌라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 우아하게 웃음부터 띠었다. 예쁘게 미소 짓는 법 같은 거야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교육받아왔으니 어렵지 않았다.

16550800465258.jpg“조금 더 환하게 웃으면 좋겠지만, 뭐, 나쁘지 않군.”

바스티안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00465258.jpg“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도록 해.”

16550800465251.jpg“네.”

16550800465258.jpg“폐하.”

16550800465251.jpg“……폐하.”

16550800465258.jpg“그냥 들어주시면 안 돼요?”

16550800465251.jpg“그냥 들어주……시면 안 돼요?”

16550800465258.jpg“이블린은 그렇게 하고 싶은데.”

16550800465251.jpg“이블…… 폐하.”

잠자코 따라 하다가 곧 이상한 점을 깨달은 이블린이 인상을 썼다.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장난이라니. 본능적으로 주먹부터 움켜쥔 이블린을 본 바스티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가 이토록 크게 웃는 건 처음이라 이블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16550800465258.jpg“연습 열심히 해, 단장. 앞으로 그대가 사람들 앞에서 지겹게 하게 될지도 모르는 말이니까.”

아직 웃음을 다 삼키지 못한 바스티안이 미소를 흘리며 말을 덧붙였다.

16550800465258.jpg“그럼 나는, 그대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다 들어주는 팔불출 황제가 될 거야.”

16550800465251.jpg“…….”

그리 말하는 황제의 눈빛이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다정해 보여서, 이블린은 어쩐지 손바닥 안이 간지러워졌다.

16550800465258.jpg“단장.”

16550800465251.jpg“네, 폐하.”

이블린은 어느새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해진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16550800465258.jpg“처음부터 말했지, 이 계약은 그대에게 무척 위험한 제안이 될 거라고. 그때 그대의 대답이 뭐였지?”

16550800465251.jpg“가치가 있으니, 전부 감수하겠다고 했지요.”

16550800465258.jpg“그래. 아이가 생긴 척 연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그나마 황궁에서 지내야 눈을 속이기 쉽겠지, 내 사람들, 내 곁에 있어야 들킬 위험도 덜할 테고.”

16550800465251.jpg“…….”

16550800465258.jpg“그대의 고집 때문에 우리의 계약이 위험해지는 건 안 돼.”

전부 맞는 말이었다. 언제까지 이 거짓말을 숨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16550800465258.jpg“어쨌든, 황궁으로 들어오는 건 잠시 보류하지.”

바스티안이 항복을 선언했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이블린의 고집을 꺾는 데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6550800465258.jpg“대신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불러들일 거야, 당장은 아니어도 결국엔 황궁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어. 그러니 미리 준비해두고.”

16550800465251.jpg“배려 감사합니다, 폐하.”

이블린은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바스티안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블린의 진짜 미소를 본 건 꽤 오랜만이었다.

16550800465258.jpg“그런데, 단장.”

대화를 정리한 바스티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16550800465258.jpg“생각해보니 계약서를 쓰는 것보다도 더 시급한 게 있는 듯해.”

이블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바스티안이 의자 하나를 끌어다 이블린의 바로 옆에 놓았다. 이블린은 의자에 풀썩 앉는 황제를 눈으로 좇았다. 서로 비스듬히 마주 보고 앉은 탓에 손만 뻗으면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긴장한 이블린이 허리를 꼿꼿이 세울 때였다.

16550800465258.jpg“먹여줘, 이블린.”

16550800465251.jpg“네?”

황당한 명령이 떨어졌다.

16550800465258.jpg“그대 손으로 직접, 먹여 달라고.”

16550800465251.jpg“……폐하?”

16550800465258.jpg“그대는 이블린 티에르지. 나는 이 제국의 황제고.”

바스티안이 계단에서 이블린을 안았을 때, 그녀가 체면을 운운하며 했던 말이었다.

16550800465258.jpg“그런 우리가 아이부터 만든 거야.”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불리는 두 사람이 난잡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고.

16550800465258.jpg“사랑에 빠진 나머지 체면이고 위치고 잊고 서로를 갈구할 만큼 뜨거운 사이라는 뜻이지.”

16550800465251.jpg“!”

이블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서늘하던 입술의 온도와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숨결의 뜨거움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블린은 황제의 붉은 입술로 가려는 시선을 겨우 참아냈다.

16550800465258.jpg“앞으로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에 날 거야,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감시하겠지.”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사생활이 없는 삶은 이블린도 익숙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신문 1면을 장식한 적도 있으니까.

16550800465258.jpg“그런데 지금 그대를 보고 누가 사랑에 빠진 여인이라고 믿겠어. 이토록 어색하고 어설픈데 말이야.”

바스티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16550800465258.jpg“그러니 먼저 친해져 볼까, 단장?”

몸을 숙여 이블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바스티안이 작게 속삭였다.

16550800465258.jpg“당분간 모두가 속을 만큼, 뜨거운 연인이 되어 보자고.”

이블린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쥔 바스티안이 하얀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해사하게 웃었다.

16550800465258.jpg“특훈이라고 생각해.”

아, 네, 특훈. 이블린은 손등에 촉촉하게 남은 온기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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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공작가로 돌아가는 마차 안.

16550800465251.jpg“어으, 피곤해.”

이블린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주물렀다. 그녀는 결국 식사가 끝날 때까지 황제의 입에 음식을 넣어줘야 했다.

16550800465258.jpg“이블린, 그대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

16550800465258.jpg“앞으로도 이렇게 먹여주는 건 어때?”

16550800465258.jpg“이리와, 이블린. 그대도 좀 먹어야지.”

16550800465258.jpg“너무 멀어, 더 가까이.”

  생글생글 웃으며 요구해대는 황제를 상대하고 났더니 온몸의 진이 다 빠진 듯했다. 속을 알 수 없어 껄끄럽기만 하던 상사와 다정한 연인 흉내를 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16550800465258.jpg“내일 봐, 이블린.”

  요란한 식사를 끝내고 티하우스를 나왔을 때, 황제는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손을 붙잡고 한참이나 놔주질 않았다. 그는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16550800465251.jpg‘역시 무서운 사람이야.’

이블린이 황제의 연기력에 감탄하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공작가로 들어섰다.

16550800465251.jpg“알리에타, 분위기가 왜 이래?”

저택 안으로 들어선 이블린은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느꼈다. 아무래도 그녀가 떠나고 난 뒤 공작이 온갖 패악을 부린 모양이었다.

1655080062965.jpg“공녀님, 지금…….”

1655080062965.jpg“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블린을 맞이한 알리에타가 빠르게 설명하려 했지만, 공작의 보좌관이 먼저 끼어들었다.

16550800465251.jpg“옷 좀 갈아입고.”

또 무슨 성질을 부리려고. 미래를 예감한 이블린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1655080062965.jpg“먼저 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16550800465251.jpg“…….”

누가 윗사람인지. 이블린은 고개를 작게 내저은 뒤 걸음을 옮겼다.

16550800465251.jpg“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16550800657178.jpg“들어오거라.”

집무실로 가니 싸늘한 표정의 공작이 이블린을 맞았다. 부친의 곁에 낯선 사내가 보였다.

1655080062965.jpg“공녀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공작이 고갯짓하자 사내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이블린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이블린이 눈을 찌푸렸다.

16550800657178.jpg“의사를 불러왔다.”

16550800465251.jpg“……네?”

16550800657178.jpg“폐하의 아이를 가진 귀한 몸이니, 제대로 보살펴야 하지 않겠느냐.”

공작의 말을 들은 알리에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게 보였다.

16550800465251.jpg‘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이블린이 볼 안쪽을 지그시 물었다. 결국 부친은 황실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2년 내내 침실을 벗어나지 못하던 그녀가 지금 멀쩡한 모습으로 호위기사단장직까지 수행하고 있으니. 두 번 속지 않으려는 노력일 거다.

1655080062965.jpg“고, 공녀님, 제가 잠시 실례를.”

이블린과 티에르 공작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냉기를 읽은 의사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아닌 밤중에 다짜고짜 공작가에 끌려온 것뿐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의사가 다가올 때까지, 이블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의사가 막 이블린의 손목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16550800465251.jpg“멈춰요.”

이블린이 단호하게 뱉은 한마디가 무게감 있게 울렸다.

16550800465251.jpg“내 몸에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16550800657178.jpg“뭐 하고 있는 건가, 어서 확인하지 않고.”

의사가 머뭇대자 공작이 눈을 희번덕였다.

16550800657178.jpg“이블린을 붙잡게.”

1655080062965.jpg“세상에나!”

공작이 사병들을 향해 턱짓하자 알리에타가 비명을 질렀다.

16550800465251.jpg“알리에타, 저택 밖에 대기 중인 기사단을 데려와.”

이블린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하자 알리에타가 황급히 달려갔다.

16550800657178.jpg“기사단? 내 집에 감히 무엇을 들인다고?”

16550800465251.jpg“저의 집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노기를 띤 공작에게 이블린이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16550800465251.jpg“게다가 폐하의 아이입니다. 검증되지도 않은 이에게 함부로 맡길 수는 없지요.”

16550800657178.jpg“네가 감히…….”

공작의 수염 끝이 파르르 떨렸다. 건방지긴 해도 적당히 꼬리를 말던 이블린이 이토록 매섭게 반응하는 건 처음이었다.

16550800657178.jpg“뭐 하는가, 어서 붙잡지 않고!”

공작이 소리치는데 복도를 달려오는 거친 인기척이 들렸다.

1655080062965.jpg“단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곧 문 앞에 우르르 나타난 기사단원들이 서슬 퍼런 눈으로 방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16550800465251.jpg“보레아, 지금 황궁으로 가서 궁의를 불러주겠어? 내 몸이 좋지 않아 진찰이 필요하다고 해.”

1655080062965.jpg“네, 단장님.”

명령을 받은 단원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남은 단원 몇 명이 이블린을 보호하듯 에워쌌다.

16550800465251.jpg“그럼, 함께 기다려볼까요?”

이블린이 배 위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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