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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잊지마, 모닝키스 (9/95)

9. 잊지마, 모닝키스2021.10.31.

16550800771737.jpg“단장님, 앉으시지요.”

단원 하나가 의자를 가져와 이블린의 옆에 놓았다. 한시름 놓은 알리에타도 눈치껏 두툼한 방석을 의자 위에 얹고는 담요를 가져오겠다며 나갔다.

16550800771741.jpg“고마워.”

이블린은 보란 듯 제 배를 소중히 감싸 안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블린의 행동을 보던 공작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의도와 달리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기가 막혔다.

16550800771745.jpg“…….”

공작은 짜증 가득한 눈으로 기사단원들을 노려봤다. 아무리 이곳이 공작가의 저택이라지만, 황제의 호위기사단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블린은 그들의 상관이었고, 황제의 아이까지 가졌다고 알려졌다. 그런 이블린을 딸이랍시고 함부로 다루었다가는 호위기사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터.

16550800771745.jpg‘젠장.’

최정예 기사들로만 구성되었으니 무력으로 대응할 수도 없고, 자칫하면 황실을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 공작의 메마른 얼굴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16550800771741.jpg‘아무렴 아무 준비도 없이 왔을까.’

이블린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공작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감상했다. 외부인이 있을 때면 다정한 척 연기하던 이가 표정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니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16550800771741.jpg‘그러게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좀 계시지.’

그랬으면 이쪽도 벌써 발톱을 드러내진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빨리 그녀의 무기를 꺼내 든 것 같아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6550800771741.jpg‘당분간은 지켜보기만 할까.’

약이 잔뜩 오른 부친이 또 어떤 조잡한 공격을 해올지 몰랐다. 딸을 공격하겠다고 추잡한 스캔들까지 터트린 사람이니까. 기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던 때, 저택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16550800771737.jpg“단장님, 궁의를 데려왔습니다.”

16550800771737.jpg“며칠 사이에 자주 뵙습니다, 단장님.”

멀리서부터 들리는 보레아의 씩씩한 외침에 이어 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16550800771737.jpg“그럼 확인해볼까요?”

16550800771741.jpg“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왕진 가방을 내려놓고 다가오는 다트에게 이블린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16550800796919.jpg“…….”

알리에타와 공작은 서로 다른 의미로 긴장한 채 다트의 손을 응시했다.

16550800796924.jpg

  그리고 잠시 후.

16550800771737.jpg“요 며칠 신경 쓸 일이 많아 피곤하셨나 봅니다. 괜찮습니다, 맥도 잘 잡히고요.”

이블린의 상태를 살핀 다트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00771745.jpg“정말, 임신이란 말인가?”

의구심을 털지 못한 공작이 다트를 다그쳤다. 황실 주치의니까 작정하고 속이는 건지도 몰랐다.

16550800771737.jpg“네, 소중한 생명을 품고 계십니다.”

무슨 그런 말이 있냐는 듯 다트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16550800771745.jpg“그럼 다른 의사가 진찰해도 똑같겠군.”

16550800771737.jpg“혹시, 황실의 아이에 대해서 모르시는 겁니까?”

공작이 매섭게 따지자 다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800771737.jpg“선대 공작께 아무것도 전해 듣지 못하셨나보군요.”

다트의 이어지는 말에 공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마디로 티에르 공작이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이었다.

16550800771745.jpg“쓸데없는 말 덧붙이지 말고 제대로 설명하게.”

16550800771737.jpg“황가의 특별한 능력은 알고 계시지요? 당연히 황실의 아이를 가진 여인은 일반적인 산모와는 다릅니다. 모르고 계신다면, 그 이상은 저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세간에는 드러나지 않은 황가의 비밀이니까요.”

16550800771745.jpg“…….”

16550800771737.jpg“어쨌든 다른 의사에게 보이는 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만 말씀드리지요.”

16550800771745.jpg‘어디 감히 건방지게.’

선을 긋는 말에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요란하게 변했다.

16550800771741.jpg“다트.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게 해 미안하군요. 괜찮다면 차 한잔하고 가겠어요?”

부친의 반응을 본 이블린이 한심한 심정을 숨기며 몸을 일으켰다.

16550800771737.jpg“영광입니다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16550800771741.jpg“아, 그렇군요.”

이블린은 조금 아쉬워졌다. 그녀 또한 다트의 이야기가 진짜인지 묻고 싶었는데.

16550800771741.jpg“볼 일은 다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쉬러 가보겠습니다.”

파들파들 떨고 있는 부친을 향해 통보한 이블린이 다트를 앞세우고 집무실 문을 나섰다.

16550800771741.jpg“다트.”

16550800771737.jpg“네, 단장님.”

16550800771741.jpg“오늘 있었던 일, 당연히 폐하께 보고 드리겠죠?”

16550800771737.jpg“물론입니다.”

이블린은 한숨을 삼켰다. 아직 부친과의 불화에 대해 명확히 말하지 않았는데, 숨길 필요도 없게 되었다. 굳이 황제에게 공작가의 치부를 드러내는 길을 선택하다니, 어리석은 아버지 같으니라고.

16550800771741.jpg‘명예를 지킬 생각도 없는 당신께 공작가의 가주 자리를 내어드릴 수는 없지요.’

이블린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16550800771737.jpg“단장님, 배웅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란히 걷던 다트가 계단을 내려가려는 이블린을 멈추게 했다.

16550800771741.jpg“오늘 고생 많았어요, 다트. 고맙고요.”

16550800771737.jpg“저의 소임입니다.”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16550800771737.jpg“참, 단장님. 중요한 걸 잊을 뻔했습니다. 혹 폐하께 전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16550800771741.jpg“아니요, 딱히.”

16550800771737.jpg“폐하께선 단장님이 그리 대답하실 걸 예상하셨던 모양입니다.”

이블린이 고개를 내젓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50800771737.jpg“단장님께서 전할 말이 없다 하시면 이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16550800771741.jpg“어떤 거죠?”

16550800771737.jpg“내일 조찬을 같이 하시겠다는군요.”

16550800771741.jpg“…….”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 * * 다트를 배웅하고 침실로 돌아온 이블린은 응접실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무척 피곤한 하루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16550800771741.jpg‘앞으로는 하루하루가 늘 이렇겠지.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긴장하면서.’

부친에게 반기를 든 이상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이블린의 눈에 화려한 꽃다발이 들어왔다. 헤어지기 직전, 황제가 선물한 거였다. 이블린은 홀린 듯 꽃으로 다가갔다. 하얀 마트리카리아와 색색의 리시안셔스, 빨간색 장미가 예쁘게 섞여 있었다.

16550800872314.jpg“시들지 않을 거야,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한은.”

  마차에 오르다 꽃을 보고 깜짝 놀랐을 때, 황제는 씩 웃으며 그리 말했다.

16550800771741.jpg“시들지 않는 꽃이라.”

꽃다발을 든 이블린은 가만히 향기를 맡아 보았다.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이블린 티에르. 하마터면 부친의 밑에서 시들어가다가 말라 죽을뻔했던 그녀에게는 퍽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16550800771737.jpg“공녀님.”

이블린이 꽃을 내려놓는데 응접실 문이 열렸다.

16550800771741.jpg“알리에타, 얼굴이 왜 그래?”

알리에타는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16550800771737.jpg“아까 공작님이 의사를 데려왔을 때, 정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고요.”

16550800771741.jpg“마음 단단히 먹어, 이제 시작이야. 고작 이 정도로 겁먹으면 안 돼.”

16550800771737.jpg“공녀님…….”

알리에타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16550800771741.jpg“이런, 알리에타.”

이블린이 알리에타를 끌어안았다. 알리에타의 앞치마와 옷에서 따스한 햇볕 냄새가 났다. 그녀의 포근한 온기에 지친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16550800771741.jpg“……알리에타. 고향으로 돌아갈래?”

마음 약하고 다정한 나의 유모.

16550800771737.jpg“네? 그게 무슨.”

16550800771741.jpg“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 어쩌면 목숨이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

이블린이 알리에타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16550800771741.jpg“유모가 위험해지는 건 나도 싫으니까.”

16550800771737.jpg“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공녀님을 두고 어딜 간다고요.”

알리에타가 훌쩍이면서 이블린의 어깨와 등을 토닥였다. 그녀마저 떠나면 이 가여운 공녀님의 곁을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저 이블린이 딱해서 눈물이 난 것뿐이었다.

16550800771737.jpg“자, 얼른 씻고 주무세요. 오늘 바쁜 하루를 보내셨잖아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그친 알리에타가 이블린을 욕실로 떠밀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이블린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16550800771737.jpg“나의 사랑스러운 공녀님, 저녁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알리에타가 이블린의 머리끝을 적시며 다정하게 물었다.

16550800771741.jpg“응, 뭐, 그럭저럭.”

이블린이 어물쩍 대답을 넘겼다. 틈만 나면 포크를 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제 입으로 가져가던 황제가 떠올랐다. 이블린이 그의 등쌀에 못 이겨 음식을 우물거릴 때, 흐뭇하게 보던 표정도. 어디 그뿐인가.

16550800872314.jpg“이블린, 황실 대대로 내려온 사유 재산이 있어. 황실 예산에는 잡히지 않으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해도 좋아.”

  그녀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밀었다.

16550800872314.jpg“귀족 회의 내용도 원하면 열람하게 해주지, 외부에서 조사할 때 필요하다면 황제의 칙령을 먼저 사용할 수 있는 권한도 줄 거야.”

  이블린조차 황제가 왜 그러나 싶어 의아해질 정도였다. 결국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6550800771741.jpg“폐하,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지요?”

16550800872314.jpg“글쎄.”

  바스티안은 말끝을 흐리다 픽 웃었다.

16550800872314.jpg“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스캔들이 내게는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라서. 시간을 벌어주었거든.”

16550800771741.jpg“…….”

염두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다고 했던가. 이런 밑지는 장사를 감수할 만큼, 황후 자리에 올리고 싶은 여인. 얼마나 좋아하는 여인일까? 그녀는 지금 이 가짜 연인을 지켜보며 어떤 기분일까.

16550800771741.jpg“알리에타.”

16550800771737.jpg“네, 공녀님.”

16550800771741.jpg“남자는…….”

알리에타가 손을 멈추고 이블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16550800771741.jpg“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보면서도 좋아하는 척할 수 있는 거야?”

16550800771737.jpg“……네?”

16550800771741.jpg“어, 음, 아니야, 아무것도.”

헛기침한 이블린이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이 계약 결혼을 무사히 마치고 내가 원하는 것만 가지면 돼. 이블린이 물속으로 꼬르륵 잠기듯 머리끝까지 담갔다. * * * 다음 날 아침.

16550800771741.jpg“폐하, 이블린 티에르입니다.”

황제의 침실 앞에 선 이블린이 기척을 냈다.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더니 그는 정작 일어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16550800771741.jpg‘이럴 거면 왜 부른 건지.’

제안을 빙자한 명령이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했고.

16550800771741.jpg“……아직 주무시는 것 같지?”

16550800771737.jpg“그런 것 같습니다, 단장님.”

한 번 더 노크하는 대신 이블린은 침실 문을 지키는 기사단원을 쳐다봤다.

16550800771741.jpg“나는 일하러 갈 테니까 일어나시면 그렇게 전…….”

이블린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16550800872314.jpg“어딜 도망가려고.”

바스티안의 잠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16550800771741.jpg“폐하, 일어나셨…….”

아쉬움을 숨기며 고개를 돌린 이블린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사내의 상반신이 눈앞에 있었다. 이블린은 황급히 눈동자를 바닥으로 내렸다. 사내의 맨살을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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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00771741.jpg‘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찰나였는데도 또렷하게 보고 말았다. 군살 하나 없이 각지고 또렷하게 갈라진 근육질의 몸을.

16550800872314.jpg“밤새 기다렸건만 매정하기는.”

당황한 탓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던 이블린의 손이 붙잡혔다. 손등 위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게 느껴졌다.

16550800872314.jpg“이브. 설마 모닝 키스를 잊은 건 아니지?”

커다란 손이 이블린의 턱을 받치고 고개를 들게 했다. 아, 그렇지, 우리 지금 연인이라는 설정이지. 깨닫자마자 이블린의 몸이 휙 끌려가 황제의 품에 폭삭 안겼다.

16550800771741.jpg“……!”

볼에 닿는 딱딱한 피부를 느낀 이블린은 그만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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