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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생각보다 탄탄 (10/95)

10. 생각보다 탄탄2021.11.03.

16550801049606.jpg“아침은 침실에서 먹지.”

바스티안이 시종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전히 이블린은 품에 가둔 채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맞닿은 곳을 타고 이블린의 귓가에 둥둥 울렸다. 덩달아 이블린의 심장도 둥둥 울렸다.

16550801049606.jpg“그럼 들어갈까?”

다정하게 속삭인 바스티안이 한 걸음 물러섰다. 한데 엉킨 두 사람의 몸 뒤로 육중한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쩐지 목덜미가 간질거려서, 이블린은 그의 품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16550801049616.jpg“폐하, 이제 그만……!”

바스티안을 밀어내려 손을 뻗은 이블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언가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바닥 밑으로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과 그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 등줄기부터 허리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듯했다.

16550801049606.jpg“음, 이블린. 아침부터 너무 적극적이지 않아?”

16550801049616.jpg“!”

바스티안이 난감하다는 듯 흘린 말에 정신을 차린 이블린이 펄쩍 놀라 손을 떼어냈다.

16550801049606.jpg“난 좋긴 한데 말이야.”

16550801049616.jpg“그러니까, 폐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뭘 만진 거지? 불에 덴 듯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16550801049606.jpg“내 가슴을 만졌어.”

16550801049616.jpg“……혹시, 지금 제가 입 밖으로 말했나요?”

16550801049606.jpg“아니, 표정이 그렇던데.”

바스티안이 새침하게 대꾸하자 이블린의 얼굴이 새빨간 토마토처럼 변했다.

16550801049606.jpg‘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이블린이라니, 꽤 볼만했다. 바스티안이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을 즐겁게 감상하는 동안.

16550801049616.jpg‘아……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이블린은 눈을 감아버렸다. 손에 닿았던 묘한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16550801049606.jpg“이블린? 그렇게 더러운 걸 만진 듯이 굴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데.”

16550801049616.jpg“그런 거 아닌데요.”

16550801049606.jpg“또 어딜 도망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이블린의 등이 문에 닿기 직전,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팔을 붙잡아 멈추게 했다.

16550801049606.jpg“아, 그렇다고 오해는 말고, 일부러 골탕 먹이려던 건 아니야.”

웃음을 참으며 이블린을 놓아준 바스티안이 몸을 돌렸다. 바스티안의 인기척이 멀어지는 걸 느낀 이블린이 살그머니 눈을 떴다. 좁은 시야 사이로 가운을 걸치는 바스티안의 모습이 보였다.

16550801049606.jpg“간밤에 난리가 났었다지?”

허리끈을 느슨하게 묶으며 다가온 바스티안이 어젯밤의 일을 툭 꺼냈다.

16550801049606.jpg“그러게 황궁으로 들어오라 하지 않았나.”

혀를 차는 건 덤이었다. 덕분에 이블린은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16550801049616.jpg“보고 받으셨으니 아시겠지만, 그런 이유였습니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공작가를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16550801049606.jpg“쓸데없는 걱정이야. 공작가의 영지나 저택이 누구 손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바스티안이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서 이블린을 내려다봤다.

16550801049606.jpg“어차피 티에르란 이름이 그대의 것이고, 이블린 그대가 곧 티에르니까.”

16550801049616.jpg“…….”

바스티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인 말에 이블린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곧 티에르의 주인이라는 걸 황제가 직접 인정하는 거였다. 역시 그는 부친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건가? 그래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걸까?

16550801049606.jpg“어쨌든, 어젯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해 유감이야. 듣자 하니 그대의 활약이 대단했다던데.”

바스티안이 아쉽다는 듯 읊조렸다. 활약이라니. 아무래도 그의 상관은 아침부터 그녀를 놀리고 싶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16550801049616.jpg“배려해주신 덕분에요.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16550801049606.jpg“죄송하기는, 난 요즘 그대 때문에 웃는데.”

저 봐. 역시 놀리는 거잖아.

16550801049616.jpg“앞으로 더 신경 쓰겠습니다.”

16550801049606.jpg“됐어, 그대가 조심하는 건 좋지만, 나한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어.”

16550801049616.jpg“…….”

16550801049606.jpg“뭐, 일단 아침부터 먹고 이야기할까.”

바스티안이 흐트러진 제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16550801049616.jpg“정말 여기서 드시려고요?”

16550801049606.jpg“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제처럼 다정하게 먹여줄 생각이라면, 나가서 먹고.”

16550801049616.jpg“……아뇨, 그냥 여기서 먹는 게 좋겠어요.”

16550801049606.jpg“나와, 이블린. 날씨가 좋아.”

씩 웃은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보며 턱 끝을 까딱였다.

16550801049616.jpg‘아무렇지도 않게 이름을 부르신단 말이야.’

이블린은 황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제 이름을 곱씹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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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몇 시간 후.

16550801049616.jpg“아니,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단장실 내 책상 앞에 앉은 이블린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의 손에는 아침에 발간된 황실 소식지가 들려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이블린이 신문의 1면을 노려보았다. 바스티안의 예고대로 티하우스에서 데이트하는 두 사람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정확히는, 두 사람이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16550801049606.jpg“이블린, 이런 식이면 곤란해. 이래서야 누가 우리를 연인이라고 믿겠어?”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 바스티안은 신문을 내밀며 충고를 가장한 구박을 해왔다.

16550801049616.jpg“네? 잘 나온 것 같은데요.”

16550801049606.jpg“잘 나오다니, 봐. 그대의 손, 어깨, 전부 어색하잖아.”

  콧방귀를 뀌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황제에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16550801049616.jpg“어디가 어색하다는 거야, 하여간 어떻게든 트집 잡으시려고.”

제 모습을 뜯어보던 이블린이 신문을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16550801049616.jpg“허리라도 끌어안아야 만족하셨을…….”

손으로 안는 시늉을 해 본 이블린이 흠칫 굳었다. 문득, 당황스러웠던 아침이 떠올랐다.

16550801049616.jpg‘생각보다 탄탄……했지?’

사내의 몸을 만져본 적도, 품에 안겨 본 적도 처음인지라 그 감각이 생경했다. 셀리메 후작 영애처럼 오라비나 남동생이라도 있었으면 비교할 수 있었겠지만.

16550801049616.jpg‘무언가 따로 운동이나 훈련이라도 하시는 걸까.’

제 팔뚝과 복근을 만지며 비교해보던 이블린이 곧 고개를 내저었다.

16550801049616.jpg“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이블린은 힐끗 사진을 쳐다봤다.

16550801049616.jpg“…….”

흑백이었지만, 그녀를 보는 바스티안의 다정한 눈빛과 표정은 선명했다.

16550801049606.jpg“색이 나오지 않아 아쉽군. 어제 입었던 드레스, 참 잘 어울렸는데 말이야. 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 좋은 것도 같고.”

  그게 한참이나 그녀의 뻣뻣한 자세를 지적하던 바스티안의 마지막 말이었다.

16550801049616.jpg“안 그럴 것 같았는데, 가짜인데도 꽤 성실하게 하신단 말이야.”

꼭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이블린의 눈동자가 도르르 옆으로 향했다. 단장실 한편에 놓인 티테이블 위에는 바스티안의 명령으로 준비된 간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베리류가 박힌 오트밀 쿠키와 복숭아를 포함한 몇 종류의 과일.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16550801049606.jpg“어쨌든, 임신한 상태니까. 잘 먹어둬.”

  아침을 먹으라고 권할 때도 그랬다. 노란빛이 도는 수플레와 콩피, 과일을 넣어 만든 크레프. 그것도 전부 이블린이 좋아하는 메뉴였다.

16550801049616.jpg‘어제도 그렇고, 우연인가.’

우연이 아니라면, 생각보다 황제는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아는지도 몰랐다.

16550801049616.jpg“진짜 의외다 싶네.”

평소에는 모든 일에 무관심한 것처럼 냉랭한 사람인데.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알쏭달쏭한 성격을 곱씹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16550801049616.jpg“들어와요.”

이블린이 신문을 접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16550801187338.jpg“단장님, 지시하셨던 호위기사단원들 정보입니다.”

안으로 성큼 들어온 오단이 이블린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16550801187338.jpg“말씀하신 대로 개인의 주특기인 능력과 각각의 실력을 수준별로 나누었습니다.”

16550801049616.jpg“고마워요.”

서류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이블린이 깃펜을 집어 들었다.

16550801049616.jpg“이렇게 한 팀, 이렇게 한 팀, 마지막으로 이렇게. 총 세 팀으로 나누죠.”

바스티안에게 허락도 받았으니 호위기사단을 더 효율적으로 움직여볼 생각이었다.

16550801049616.jpg“검술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이들은 폐하의 안전을 위해 호위팀으로 두고, 이쪽은 정보 수집과 임무 수행, 이쪽은 두 팀을 보조하는 역할로요.”

16550801187338.jpg“근무 일정 짜기도 좋겠는데요, 진작 이렇게 나눌 걸 그랬네요.”

오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50801049616.jpg“업무가 나뉘었다지만, 최우선은 늘 폐하의 안전이에요.”

16550801187338.jpg“네, 물론이지요. 그렇지만 이젠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16550801049616.jpg“그게 무슨?”

16550801187338.jpg“폐하께서 앞으로는 단장님의 명령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라 하셨습니다.”

16550801049616.jpg“……그랬군요.”

오단은 빙글거렸지만, 이블린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16550801049616.jpg“오단.”

잠시 침묵하던 이블린이 고개를 들었다.

16550801049616.jpg“혹시, 내가 단장직을 계속 이어가는 게 단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될까요?”

16550801187338.jpg“예? 전혀 아닙니다.”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오단이 곧 껄껄 소리 내 웃었다.

16550801187338.jpg“사실, 기사단이 갖는 명예나 혜택에 비하면 일이 편한 축에 속하지 않습니까. 정령을 다루시는 폐하께 진짜 호위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제국 내의 실력자들만 선발한 건, 제국 황실의 권위와 강함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 컸다.

16550801187338.jpg“저희는 단장이 계신 게 좋습니다. 폐하께서는 저희를 방치하시니까요. 무엇보다 단장께서 저희 곁에 계시는 게 폐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결국 그녀가 얌전히 호위기사단에 속해 있는 것이 황제를 위한 길이라는 얘기였다.

16550801049616.jpg“알겠어요, 앞으로 훈련 방식도 손을 좀 보죠.”

16550801187338.jpg“네, 녀석들 굴릴 생각에 신이 나는군요.”

즐거워하며 단장실을 나서는 오단의 뒷모습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녀를 기묘하게 굴려대는 그녀의 직속 상관이.

16550801049616.jpg‘폐하께서도 저런 마음인가.’

바스티안의 얼굴을 지운 이블린은 그녀의 납작한 배를 내려다봤다.

16550801049616.jpg‘서둘러야겠어.’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은 금방 탄로 날 거다. 바스티안과의 거래는 끝이 정해져 있으니,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16550801049616.jpg‘어머니의 사고부터 빨리 조사해야 해. 아버지가 숨기고 있는 것들도.’

아직은 조잡한 스캔들 따위로 어떻게 해보려던 부친과 같은 방법을 쓸 마음은 없었다. 부친 스스로 물러나게끔 압박할 생각이었다.

16550801049616.jpg‘……만약, 그래도 아버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할지도. 이블린의 표정이 어두워질 때였다.

16550801187338.jpg“단장님, 근위대장님께서 뵙자 청하십니다.”

16550801049616.jpg“휴이터가?”

반가운 이름을 들은 이블린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16550801049616.jpg“들여보내요.”

이블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커다란 몸이 채 열리지 않은 문을 비집고 나타났다.

16550801244335.jpg“이브.”

16550801049616.jpg“휴이터, 벌써 돌아온 거야? 아렌달에 갔다는 건 들었…….”

16550801244335.jpg“네가 폐하의 연인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뿔난 황소처럼 성큼성큼 다가온 휴이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물었다.

16550801049616.jpg“휴이터, 목소리 좀 낮춰.”

거대한 그림자에 갇힌 이블린이 흥분한 강아지를 진정시키듯 두 손을 펼쳤다. 하늘을 담은 듯 파란 휴이터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열 살 때부터 함께 자라다시피한 오랜 친구였다. 그녀의 개인사를 전부 알고 있는 휴이터니, 황실의 공표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게 당연했다.

16550801244335.jpg“이블린. 다시 생각해, 이건 미친 짓이야. 황제의 아이라니!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휴이터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풍성한 갈색 곱슬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16550801244335.jpg“그 스캔들 기사 때문이야? 그럼 차라리 내가 그 아이의 아빠가 될……!”

이블린은 황급히 휴이터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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