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른 남자말고, 나2021.11.07.
아이 아빠가 되겠다니.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대화였다. 긴장한 이블린이 문 쪽을 쳐다볼 때였다.
“그건 곤란한데.”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와 등 뒤에 꽂혔다. 깜짝 놀란 이블린과 휴이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황제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두 사람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휴이터는 곧장 허리를 숙였고, 이블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왜 문을 놔두고 위험하게 이런 길로.’
지난번 그녀의 비밀 통로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렇고, 그는 뜻밖의 곳에서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취미가 있는 듯했다.
“드디어 공녀의 남자들이 다 모인 건가.”
“…….”
이블린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황제는 또 그녀를 놀리려고 시동을 거는 모양이었다.
“복귀하자마자 달려온 곳이 여기인가, 디에스티 경.”
천천히 휴이터와 이블린을 번갈아 본 바스티안이 삐딱하게 웃었다. 휴이터의 입술을 덮고 있는 하얀 손이 무척 거슬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본분을 망각한 행위를 지적하는 말에 휴이터의 귓불이 붉어졌다. 순서대로라면 임무 결과 보고서를 제출하는 게 먼저였다.
“무엇이? 이곳에 먼저 온 것이? 아니면, 감히 내 아이를 그대의 아이라 한 것이?”
‘들으셨구나.’
바스티안은 미소를 띤 채 말하고 있었지만, 이블린은 알았다. 그는 웃으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폐하.”
이블린이 다급히 바스티안을 불렀다. 휴이터는 그녀가 알리에타만큼이나 믿는 사람이었고, 바스티안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휴이터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려면 황제의 동의가 우선이니까.
“근위대장은 제 오랜 친우로,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사이입니다.”
“……모르는 게 없다?”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 끝이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 아주 가까운 사이인가 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블린을 물끄러미 보던 바스티안의 눈꼬리가 싱긋 휘었다. ……어, 왜 더 화를 내는 것 같지.
“그런데, 폐하.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로.”
이블린은 일단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휴이터가 없을 때 단둘이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런, 이브.”
바스티안이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이블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볼을 톡 건드린 바스티안이 곧 이블린의 손을 잡아 펼쳤다. 그리고는 더러운 걸 닦아내듯 손바닥 안을 문질렀다. 휴이터의 입을 틀어막았던 그 손이었다.
“우리가 꼭 일이 있어야만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
몇 번이나 문지르고서야 손바닥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바스티안이 눈을 맞춰왔다.
“그렇……죠?”
휴이터를 힐끗 본 이블린이 볼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애교를 부리듯 황제의 소매 끝을 슬쩍 붙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단은 그의 연극에 호흡을 맞춰주려는 노력이었다. 이블린의 행동에 바스티안은 픽 웃었고, 휴이터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그제야 바스티안이 다정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하나로 질끈 묶어 놓은 이블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휴이터,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몸을 살짝 비튼 이블린이 휴이터에게 다음을 기약했다. 친구의 앞에서 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연기하려니 쑥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브, 기다리고 있을게. 네게 줄 것도 있고. 중요한 거야.”
바스티안을 슬쩍 본 휴이터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응, 알겠어.”
이블린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바스티안은 눈썹을 꿈틀댔다. * * *
“…….”
휴이터가 떠나고 난 뒤, 단장실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찰싹 붙어 있던 두 사람의 간격도 팔을 뻗어야 닿을 만큼 벌어졌다.
“……둘이 친했나 봐?”
팔짱을 낀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내려다봤다.
“그야, 소꿉친구니까요.”
“소꿉친구.”
아까부터 자꾸 말꼬리를 잡으시는 것 같은데……. 이블린은 왜인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바스티안을 보며 난감해졌다. 둘만 남게 되자 황제는 내내 입술 끝에 걸려 있던 다정한 미소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아무래도 휴이터에게 계약 내용을 발설했다고 오해하는 것 같은데, 이블린도 나름 억울했다. 그녀를 잘 아는 휴이터가 애초에 기사 내용을 믿을 리 없었으니까.
“네, 휴이터와는 열 살 때부터 같이 자랐어요.”
그 이전의 기억은 없으니, 적어도 휴이터는 그녀가 기억하는 유일한 소꿉친구였다.
“폐하, 휴이터는 제가 믿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설득하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에게 저희의 거래를 알려도 될……”
“이블린.”
침묵하던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대가 꾀병으로 공작가에 틀어박힌 데, 그의 도움도 있었나.”
“그게…….”
꾀병. 역시 그는 다 알고 있었던 거다. 이블린이 살짝 경계하며 손을 빼내려 할 때였다.
“우리 단장께서는 그 시간 동안 뭘 하셨을까.”
바스티안이 나른하게 읊조리며 이블린의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펼쳤다. 바스티안의 검지가 이블린의 손바닥 위를 덧그리듯 움직이다 어느 한 지점을 꾹 눌렀다.
“검술을 배우느라 바쁘셨나.”
검을 잡느라 굳은살이 배긴 곳이었다. 이블린이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는 데까지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검은 근위대장에게 배웠나?”
“……네.”
이블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그건 꽤 질투 나네.”
바스티안이 쓴웃음과 함께 중얼대듯 한마디를 뱉어냈다. 자신이 제국을 떠나 있는 동안, 다른 사내가 이블린의 곁을 지켰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뭘 했지?”
“…….”
공작가 사람들을 하나씩 조사하면서 부친의 편에 선 자들을 거르는 작업을 했다. 포섭이 가능하면 그녀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애썼고, 불가능한 사람은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손과 발, 귀와 눈이 되어줄 이들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공작에게 생명을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였지만.
“나름대로 좀, 바쁘게 이것저것…….”
이블린은 모호한 대답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랬군.”
바스티안은 그러냐며 웃었지만, 씁쓸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혼자 외로웠겠는걸.”
“글쎄요, 공작가 식구들도 있었고…….”
“근위대장도 곁에 있었고?”
“…….”
휴이터를 자꾸 걸고넘어지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이 미간을 좁혔다.
“폐하, 혹시 휴이터를 못 믿으시거나 그가 마음에 들지 않…….”
“앞으로는 내게 의지하도록 해.”
“네?”
“다른 사람 말고 내게 의지하라고.”
그러니까, 왜요? 우리가 비밀스러운 거래를 한 동지니까? 이블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곁에 있어 줄게. 그대는 나한테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 * *
“혼자 외로웠겠는걸.”
서류를 보는데 갑자기 바스티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안쓰럽다는 듯 보던 눈빛과 안타까움이 섞인 듯 쓸쓸해 보이던 미소도 눈에 밟히고.
“외로웠겠다?”
중얼거린 이블린이 펜을 내려놓고 몸을 틀어 창밖을 바라봤다. 나, 외로웠나?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모친의 죽음 이후로, 부친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길러 공작가를 되찾을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블린 티에르였고, 공작가의 모든 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니까.
“티에르의 이름이 가진 무게를 늘 상기하고, 가슴에 새기거라.”
선대 공작이었던 조부는 이블린이 어릴 때부터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가주의 책임을 가르쳤다. 티에르 가문의 자긍심, 명예, 제국과 황실을 향한 충성심. 그리고 이블린은 단 한 번도 조부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에 맞춰 늘 담대하려 애썼다. 다른 이들에게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녀가 흔들리면, 모두가 불안해할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잠 못 이루고 밤잠을 설칠 때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부친이 보낸 누군가가 침실 문을 열고 그녀를 죽이러 오는 게 아닐까 두려울 때도 있었다. 그녀 혼자만 남기고 떠나버린 모친과 조부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고, 그저 사랑만 받으며 행복하던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있었다. 혼자라는 건 그런 거였다.
“서로 의지하며 잘해보자고, 이블린.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런 곳이니까. 잔인하고, 외롭고.”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도 혼자이기에 더 마음을 써주는 걸까. 의지하라는 말이,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말이 꽤 달콤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이거, 괜찮은 걸까.’
아직 그에 대해 다 아는 것도 아닌데. 믿어도 될지 확신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믿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제멋대로인 사람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보이는 호의는 진심인 것 같아서.
“으음.”
“단장님. 안에 계십니까?”
팔짱을 낀 이블린이 복잡해진 심정을 다스리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싶더니 곧 다베르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티안의 보좌관인 그와는 의외로 접점이 많지 않아서 조금 어색하지만, 묘한 동질감을 공유하는 사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같은 상관을 모시고 있으니까.
“후작님, 무슨 일이라도?”
후작은 꽤 착잡한 표정이어서 이블린도 덩달아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아, 별 건 아니고, 잠깐 단장실을 좀 비워주셔야겠습니다.”
“네? 단장실을요?”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스티안과 함께 온 건가 싶어 그의 뒤를 힐끔 살폈지만, 후작은 혼자였다.
‘하긴, 조금 전에 다녀가셨으니.’
의아하지만 일단 몸부터 일으킨 이블린이 책상 앞으로 돌아 나올 때였다. 시종 두 사람이 커다란 액자를 들고 낑낑대며 단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그림이었다.
“?”
이블린의 시선이 그림에 날아가 꽂혔다. 아이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하얀 셔츠를 입은 탓인지 천사처럼 보였다. 조금 곱슬곱슬한 까만 머리에 회녹색 눈동자가 무척 낯이 익었다.
“……후작님, 이게 뭐죠?”
“보시다시피, 초상화입니다.”
“아니, 그건 저도 아는데…….”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본인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태교에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
이블린은 어이없어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귀엽긴 하네. 역시 얼굴 하나는…….’
황제의 어린 시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스티안의 얼굴이 대중에 알려진 건 사진 기술이 발명된 이후니까, 그가 성인이 된 후였다.
‘근데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이야.’
꼭 언젠가 만났던 것처럼.
“후작님.”
“네.”
“다시 돌려보내면, 화내실까요?”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겠죠?”
“이게 끝이 아니거든요. 좀, 나와보시겠습니까?”
다베르가 한숨을 폭 내쉬며 문 바깥을 가리켰다. 불안해지는 마음에 걸음을 서두른 이블린은 곧 경악하고 말았다.
“대체 이게 다……!”
“전부 폐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아…….”
이 사람 진짜, 못 말릴 사람이네. 이블린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