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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음은 입술이야 (12/95)

12. 다음은 입술이야2021.11.10.

16550801591507.jpg‘책상에 보석을 저렇게 많이 박아놓을 이유가 있어?’

지나치게 화려한 가구와 장식품을 본 이블린이 눈을 깜빡였다. 제국에서 구하기 힘든 진주가 촘촘하게 박힌 소파부터 금실로 정교하게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은 연녹색 비단 커튼까지. 각자 존재감을 뽐내는 휘황찬란한 물품들이 단장실 앞 복도에 주르륵 쌓여 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닌지, 물품을 나르는 사람들이 분주히 복도를 오갔다. 이제야 다베르 후작의 착잡한 표정이 이해됐다.

16550801591507.jpg“후작님, 말리셨어야죠.”

16550801591526.jpg“가능하다면 그랬겠죠? 전 폐하께서 상단을 털어버리려고 작정하신 줄 알았습니다.”

다베르의 눈짓에 시종들이 본격적으로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몸을 옆으로 비켜선 이블린이 시종이 들고 있는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종이와 잉크였다.

16550801591507.jpg“저건 지금도 있는 물품인데요.”

16550801591526.jpg“임산부가 써야 하는 거니, 종이나 잉크도 앞으로는 최고급으로 검증된 것만 들이라 하셨습니다.”

16550801591507.jpg“네에? 아니, 왜 이런 낭비를.”

16550801591526.jpg“본인 돈 본인이 쓰시겠다는데, 그러려니 넘겨야죠.”

이블린은 머리를 꾹꾹 눌렀고, 다베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16550801591526.jpg“폐하, 이러면 단장이 부담스러워할텐데요?”

16550801591551.jpg“그렇겠지. 이번엔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하네. 반응하는 게 참 귀엽단 말이야.”

16550801591526.jpg“괴롭히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16550801591551.jpg“그럴 리가. 좋아하는 여인에게는 뭐든 주고 싶은 거 아니겠어?”

  차마 바스티안과 나눈 대화까지 이블린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다베르는 앞으로 내내 황제의 짓궂은 애정 표현을 받게 될 이블린을 딱하다는 듯 바라봤다.

16550801591526.jpg“어쨌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편안한 환경을 조성하라는 게 폐하의 명이셨습니다.”

16550801591507.jpg“……폐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죠?”

16550801591526.jpg“마차 보관소에 계십니다.”

마차 보관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16550801591507.jpg“폐하께 다녀올게요.”

16550801591526.jpg“……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다베르가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 * *

16550801591507.jpg“폐하?”

16550801591551.jpg“이브, 안 그래도 부르려 했는데.”

말의 목덜미를 쓸어주던 바스티안이 싱긋 웃으며 손을 떼어내자 새하얀 말이 아쉽다는 듯 몸을 푸르르 떨었다.

16550801591507.jpg“폐하, 지금 단장실에…….”

16550801591551.jpg“그대의 것이니 잘 지내보도록 해.”

이블린의 말을 톡 끊은 바스티안이 눈으로 하얀 말을 가리켰다. 이블린의 시선이 바스티안의 눈짓을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16550801591551.jpg“이름도 지어주고. 영리한 녀석이니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야.”

한눈에 봐도 훌륭한 말이었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하얀 갈기와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16550801591551.jpg“그대에게 주는 선물이야.”

16550801591507.jpg“아, 감사합……. 아니, 폐하. 잠깐만요.”

하마터면 명마에 홀려 홀라당 넘어갈 뻔했다.

16550801591507.jpg“저 지금 단장실에서 오는 길이에요.”

이블린이 걸음을 옮기는 바스티안의 앞을 막아섰다.

16550801591551.jpg“아.”

바스티안이 알았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16550801591551.jpg“뭐해? 안기러 온 거 아니었어?”

그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16550801591507.jpg“…….”

16550801591551.jpg“다들 우리만 보고 있는데.”

이블린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서 있기만 하자 바스티안이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알려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바스티안의 뒤로도 이쪽을 힐끔대는 시종들이 보였다. 하아, 진짜. 힘들다, 힘들어.

16550801591507.jpg“와, 폐하, 정말 감동이에요.”

이블린이 생긋 웃으며 폭삭 안겼다. 이런 연극도 한 번 해봤다고, 조금 익숙해지는 듯했다. 전과 다르게 과감하게 허리를 끌어안으니 바스티안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그녀를 휘감았다.

16550801591551.jpg“감동했다니, 보람이 있네.”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쓸어내렸다. 와중에 잘했다는 듯 등까지 토닥여주는 손길이 조금 웃음이 나려했다.

16550801591551.jpg“그런데 이브, 아직 감동하기엔 일러.”

16550801591507.jpg“네?”

또 뭐가 더 있어? 이블린이 놀라 되묻기 전, 바스티안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안듯이 이블린을 안아 든 바스티안이 성큼성큼 마사를 벗어나 마차 보관소로 걸음을 틀었다.

16550801591507.jpg“폐하, 뭐 하시는 거예요.”

이블린이 표정을 관리하며 어금니를 물고 속삭였다.

16550801591551.jpg“이거 보여주려고.”

마차 보관소에 이른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방향을 돌렸다.

16550801591551.jpg“그대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마차.”

16550801591507.jpg“폐하, 저건…… 황실의 대외용……이잖아요.”

이블린은 울상이 되었다. 보관소의 일꾼들이 붉은색 벨벳 커버로 된 두툼한 방석을 마차 의자에 덧붙이고 있었다.

16550801591551.jpg“공작가에서 지내겠다며? 출퇴근은 해야 하니까.”

16550801591507.jpg“폐하, 이러면 사람들이 저를 허영심 가득하고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황실에 폐가 되고 말 거예요. 가뜩이나 임신 스캔들로 시작한 건데요.”

옆에서 들려오는 태평한 소리에 이블린이 참지 못하고 말을 쏟아냈다.

16550801591551.jpg“음, 역시 체면과 명예부터 생각하는 게 티에르 다워.”

하지만, 황제에게 조금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16550801591507.jpg“놀리지 마시고, 말 돌리지도 마세요.”

16550801591551.jpg“설마, 지금 날 혼내는 건가?”

이블린이 단호하게 외치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바스티안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황제의 웃는 모습에 놀란 사람들이 힐끗힐끗 두 사람을 살폈다.

16550801591507.jpg“폐하,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너무 과하잖아요.”

남들 눈을 속이려는 건 알겠는데, 뭐든 적당하다는 게 있는 법이었다.

16550801591551.jpg“글쎄, 근위대장에게 그대를 빼앗길까 봐?”

뭔 소리야!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계속해서 농담이나 하는 황제가 얄미울 지경이었다.

16550801591551.jpg“이블린, 뭐가 그리 심각해. 이 정도는 되어야 그대에게 푹 빠진 것처럼 보이지 않겠어?”

16550801591507.jpg“폐하,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저희 이야기 좀 해요.”

잠시 고민하던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옷자락을 쭉쭉 끌어당겼다.

16550801591551.jpg“좋아.”

그에게만 들리게끔 속닥이는 이블린이 귀여워서 바스티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01591507.jpg“조용한 곳으로 가요.”

16550801591551.jpg“……엉큼하기는.”

16550801591507.jpg“…….”

이 사람 말에 잠깐이나마 감동할 뻔했던 거 취소. 계약 기간 끝나면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이블린은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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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801591551.jpg“다트가 관리하는 곳이야. 약초를 이곳에서 키우지.”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데려간 곳은 불투명한 유리 온실이었다.

16550801591551.jpg“개인적으로 황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야.”

16550801591507.jpg“아.”

이블린은 아담한 크기의 온실을 둘러보았다. 식물들 사이에 뜬금없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다트가 업무를 보는 곳인 듯했다.

16550801591551.jpg“앉아.”

책상에 걸터앉은 바스티안이 말린 꽃 한 송이를 집고 까딱이며 이블린에게 의자를 권했다.

16550801591507.jpg‘흥분하지 말고, 하극상은 안 돼.’

장소를 이동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이블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마차 보관소에서 봤던 화려한 마차가 불현듯 떠올라버렸지만. 그걸 타고 출퇴근할 제 모습을 상상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제게 왜 이러시나요, 폐하. 혹시, 황궁으로 들어오게 만들려고? 공작가에서 지내겠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럴듯한데? 의심 가득한 이블린의 눈동자가 휙 올라가 바스티안에게 향했다.

16550801591507.jpg“……..”

16550801591551.jpg“아니야, 이블린.”

16550801591507.jpg“뭐가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16550801591551.jpg“뭘 의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아니라고.”

16550801591507.jpg“……폐하, 혹시 독심술 같은 거 있으신 거 아니죠?”

이블린은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을 수밖에 없었다.

16550801591551.jpg“그런 거 없어. 왜 그런 생각을 하지?”

16550801591507.jpg“황가의 능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으니까요.”

16550801591551.jpg“그냥 정령의 힘을 빌려 쓰는 것뿐이야. 마음 같은 건 못 읽어.”

이블린의 추측이 재미있다는 듯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16550801591507.jpg“그렇군요. 아, 그러고 보니.”

안도하던 이블린이 다시금 눈을 반짝였다.

16550801591507.jpg“폐하. 어제 공작가에서 다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는데요.”

말이 나온 김에 궁금한 걸 다 물을 생각이었다. 바스티안이 편하게 말하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16550801591507.jpg“황가의 아이는 특별해서, 다른 의사들은 진료조차 불가능하다는 게 진짜인가요?”

정령술에 대한 서적이 많이 나와 있지만, 이블린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16550801591551.jpg“아, 그거.”

다리를 꼬아 비스듬히 앉은 바스티안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16550801591551.jpg“거짓말이야.”

16550801591507.jpg“네?”

16550801591551.jpg“다트가 지어낸 거라고.”

다시 눈을 마주한 바스티안이 한 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16550801591551.jpg“황실의 능력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으니, 적당히 그렇게 넘긴 거야.”

16550801591507.jpg“…….”

그러니까, 거짓말이라고. 멍하니 있던 이블린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어젯밤, 그것도 모르냐는 다트의 지적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부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자존심이 박박 긁혔을 부친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쯤 전부 알아내라며 사람들을 닦달하고 있겠지?

16550801591507.jpg“아버지가 알면, 엄청 화내겠네요.”

이블린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16550801591507.jpg“어제 그 표정을 폐하께서도 보셨어야 했는데.”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보며 눈꼬리를 한가득 접었다. 활짝 피어난 꽃처럼 웃는 건 물론이었다.

16550801591551.jpg“…….”

바스티안의 손에서 까딱이던 꽃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이블린을 응시했다.

16550801591507.jpg“아.”

뒤늦게 바스티안을 인지한 이블린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감히 황제의 앞에서 너무 크게 웃은 것 같았다.

16550801591507.jpg“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무례를 범했네요.”

16550801591551.jpg“……그런 서운한 말을.”

바스티안이 뒤늦게 입꼬리를 휘었다. 그의 앞에서 어떤 가면도 없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는 이블린은 꽤 오랜만이었다.

16550801591551.jpg“난 그대가 계속 그렇게 웃었으면 좋겠는데.”

16550801591507.jpg“…….”

이블린은 제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을 긴장하며 바라봤다. 볼을 만지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의 손가락 끝이 입꼬리 부근에서 닿기 직전에 멈췄다.

16550801591551.jpg“웃는 모습이 더 예쁘기도 하고.”

사뭇 다정한 목소리라 이블린은 또 손등이 간지러워졌다. 그와 연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지만, 아직은 늘 입꼬리 한쪽만 끌어올린 채 시니컬하게 놀리는 황제가 더 익숙했다. 그런 그가 가끔 저렇게 정말 사랑하는 이를 보듯 다정한 눈빛을 할 때면…….

16550801591507.jpg‘어떡하지.’

이블린은 어떤 표정으로 그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난감해졌다. 결국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 외엔 답이 없었다. 곧장 고개를 아래로 숙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바스티안의 손에 붙잡힌 탓이었다. 이블린의 고개가 부드럽게 들리고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바스티안의 회녹색 눈동자에 담긴 건 아무리 봐도 애정이었다.

16550801591507.jpg‘왜…….’

그런 눈으로 보냐고 묻고 싶은데. 이블린은 입술만 달싹였다.

16550801591551.jpg“이블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동그란 귓불에서 시작된 분홍빛 물이 말간 볼까지 번지고 있었다. 여린 새싹 같은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게 선명히 보였다. 눈 맞춤을 견디지 못한 이블린이 눈을 감아버리자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16550801591551.jpg“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눈을 감아버리면.”

바스티안의 엄지손가락이 보드라운 볼을 간지럽게 쓸어내렸다.

16550801591551.jpg“난 오해하는데.”

상체를 숙여 이블린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간 바스티안이 낮게 속삭였다.

16550801591551.jpg“그대가 허락하는 거라고.”

오해? 허락? 그게 무슨……. 이블린이 살그머니 실눈을 뜨려 할 때였다.

16550801591507.jpg“!”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다시 멀어지면서 쪽, 하는 소리가 조용한 온실 안에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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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게……. 이블린이 상황을 파악할 때였다.

16550801591551.jpg“지금 눈 뜨지 않으면, 이번에는 입술이야.”

무시무시한 경고가 들렸다. 마치 유혹하듯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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