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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계속 널 기다렸어 (13/95)

13. 계속 널 기다렸어2021.11.14.

그냥 던진 경고가 아니었던 걸까. 콧잔등을 간질이던 따스한 숨결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1655080187565.jpg‘설마.’

입술만큼은 사수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블린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웃음기를 머금은 황제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입술을 얇게 늘인 그의 미소가 퍽 야살스러웠다.

16550801875656.jpg“조금만 늦게 뜨지 그랬어.”

하여간, 틈만 나면 사람을 놀리려고.

1655080187565.jpg“폐하.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적당히 좀 하세…….”

16550801875656.jpg“다음부턴 눈 피하지 마, 이브.”

픽 웃으며 경고한 바스티안이 몸을 물리며 서서히 멀어졌다. 이블린은 이마를 문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다.

1655080187565.jpg‘이상해.’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아직도 화끈거리는 듯했다. 어색하고 부끄러운 그녀와 달리, 황제는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1655080187565.jpg‘혹시, 순정파가 아니라 바람둥이였던 거 아닐까?’

귀족들과 달리 황제는 원하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황비를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황후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다른 황비를 들이는 것도, 다른 이와 동침하는 것도 금지라 했다. 아마도 후계 문제를 고려한 거겠지만.

1655080187565.jpg‘마음에 둔 상대가 있는 게 아니라, 황후를 들이기 싫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16550801875684.jpg“공녀님, 명심하세요. 인물 좋은 사내는 꼭 인물값을 한답니다?”

  언젠가 알리에타가 좋은 신랑을 고르는 기준이라며 신신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1655080187565.jpg‘폐하의 얼굴은, 음, 위험한 무기이긴 해.’

정교한 조각상처럼 또렷한 이목구비는 자꾸만 시선을 붙잡아 머물게 하니까.

1655080187565.jpg‘홀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이블린은 경계심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사랑이란 달콤한 착각에 속아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들의 말로가 어떠했던가.

1655080187565.jpg‘당장 어머니만 해도 그랬지.’

어머니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가 얼마나 슬픈 것인지, 이블린은 가장 가까이서 겪은 장본인이었다. 이블린이 바스티안과의 거리를 더 벌리려 티 나지 않게 의자를 뒤로 밀어낼 때였다.

16550801875684.jpg“두 분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품 안에 약초를 한 아름 들고 나타난 다트가 바스티안과 이블린을 번갈아 보았다.

16550801875656.jpg“음, 아마도 데이트?”

16550801875684.jpg“이런, 제가 방해했군요.”

바스티안의 심상한 대꾸에 다트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1655080187565.jpg“아녜요, 잠깐 폐하와 대화 좀 나누느라. 지금 막 나가려고 했어요.”

이블린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다트가 조금 전의 장면을 본 건 아니어야 할 텐데 걱정스러웠다.

16550801875684.jpg“단장님, 혹 몸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얼굴이 무척 붉은데요.”

1655080187565.jpg“아뇨, 아주 멀쩡해요.”

16550801875656.jpg“다트, 마침 잘 왔어. 이블린의 몸 상태 좀 확인해 봐.”

황급히 두 손을 내젓는 이블린을 보며 쿡 웃음을 터트린 바스티안이 뒤로 눕듯 느슨하게 앉으며 턱짓했다.

1655080187565.jpg“진찰은 어제도 했는데요.”

16550801875656.jpg“오늘은 안 했잖아. 이블린, 앞으로 다트에게 몸 상태를 확인받도록 해. 아침저녁으로 매일.”

1655080187565.jpg“폐하?”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임신인 것도 아니고,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요 며칠 사이 느낀바, 황제는 뭐든지 과했다. 확실히 과했다.

16550801875656.jpg“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갑자기 내 눈앞에서 쓰러진 전적도 있고.”

1655080187565.jpg“그야, 그때는…….”

다 아시면서. 바스티안이 또 놀리는 거라고 오해한 이블린이 샐쭉해졌다.

16550801875656.jpg“이브, 정말 그대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1655080187565.jpg“…….”

음. 이어진 바스티안의 진중한 말에 이블린은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지금 황제의 표정과 말투에 설렜을지도 모르겠다.

1655080187565.jpg‘역시 바람둥이가 맞는 것 같아.’

이블린은 확신했다. 그런 거라면, 앞으로는 황제의 애정 표현을 조금 더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듯싶었다. 어차피 그 안에 진심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부담감이 좀 덜해졌다. 그런데 어쩐지 왼쪽 가슴 아래가 따끔거리는 것도 같고…….

1655080187565.jpg“그럼, 다트 부탁할게요.”

진짜 아프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이블린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 다트에게 팔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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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801875684.jpg“집사님, 창고가 다 찼는데 어쩌죠?”

16550801875684.jpg“별채로 옮기게.”

16550801875684.jpg“거기도 조금 있으면 꽉 찰 것 같습니다.”

16550801875684.jpg“아이고.”

흰 머리가 성성한 노집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아침부터 숨 돌릴 틈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비 황후에게 줄을 대려 발 빠르게 움직인 귀족들이 보낸 선물 때문이었다.

16550801875684.jpg“어어, 그 도자기는 깨지지 않게 조심하고.”

생전 본 적도 없는 진귀한 물건들이 공작가의 저택과 정원 곳곳에서 손길을 기다렸다. 저택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16550801957901.jpg“다들 신이 났군.”

집무실 창문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입술 끝이 어그러졌다. 황실에서 공식 입장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여론이 확 바뀌었다. 이블린의 품행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조금씩 늘어나던 차였는데,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이 공개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오늘 아침, 이블린은 호위기사단까지 거느리고 당당하게 황궁으로 출근했다.

16550801957901.jpg“폐하, 줄을 잘못 서셨습니다.”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시게 될 텐데요. 그런 어린 계집보다는 제가 여러모로 쓸모 있지 않겠습니까. 공작의 썩은 고목 같은 눈동자에 비열한 웃음이 스며들 때였다.

16550801875684.jpg“……공작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보좌관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16550801957901.jpg“왜, 또 무슨 일이야.”

16550801875684.jpg“마르다 아가씨의 편지입니다.”

16550801957901.jpg“어휴, 골치야.”

공작이 짜증을 내며 봉투를 뜯었다. [아버지, 폐하와 이블린 언니가 연인이라는 게 진짜인가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편지에는 불안을 호소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16550801957901.jpg“징징대기는. 이래서 계집은 쓸모없다니까.”

공작이 편지를 구겨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16550801957901.jpg“드레스나 몇 벌 사 입으라고 돈이나 좀 보내줘. 지난번처럼 사고 치지 않게 감시하고.”

마르다가 이블린에게 편지만 보내지 않았어도, 고 앙큼한 이블린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적당히 다정한 아버지 행세나 하다 공작가를 꿀꺽 삼키려 했건만.

16550801957901.jpg‘그래도 마르다를 버릴 수는 없지.’

지금까지 마르다에게 돈과 시간을 들인 건, 아직 그녀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황가의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황실 금고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곳에 보관되어 있을 선대 티에르 공작의 유언장. 리본느마저 죽고 그가 공작가의 진짜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16550801875684.jpg“선대 티에르 공작이 남긴 유언장이 있네, 알고 있나?”

  선황제는 그를 불러다 놓고 유언장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나 파시아 티에르가 사망할 경우, 리본느 티에르가 가주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할 것. . . 이블린 티에르가 데뷔탕트를 치르고 성인이 되면, 티에르 공작가에 속한 모든 작위와 토지, 재산은 이블린 티에르에게 계승된다. . . 만약, 리본느와 이블린 모두 사망하고 이블린 외에 리본느의 후사가 없다면, 공작가의 모든 재산과 작위는 황실로 반납한다.] 내용을 듣는데 뒤통수뿐만이 아니라 눈알까지 얼얼한 기분이었다. 만약, 이블린이 죽었더라면? 공작가를 차지하려던 그의 꿈은 수포가 되었을 거다.

16550801875684.jpg“영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대가 가문을 잘 돌봐주게. 그때까지 유언장의 내용은 그대와 나, 둘만의 비밀로 해두지.”

16550801957901.jpg“…….”

  황제와 황실을 보증인으로 내세운 유언장을 어떻게 무시한단 말인가. 황제가 죽었다고 해서 유언장의 효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유언장을 없애려 황궁의 사람도 매수해보고,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였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마르다를 황후로 만드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16550801957901.jpg“빌어먹을 영감탱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늙은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이런 꼼수를 부려?”

내가 무엇 때문에 그 무시와 천대를 참으며 버텼는데. 그딴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그간의 노력을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죽일 수도 없는 이블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날 수밖에. 주변 귀족들과의 교류를 막고 이블린을 저택 안에 가둬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멍청한 계집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공했다고 여겼다. 황제가 이블린을 호위기사단장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1655080187565.jpg“멈추세요. 제 몸에 손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위엄 있게 호령하던 이블린을 보는 순간, 작전이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다.

16550801957901.jpg‘썩어도 준치라더니, 티에르라 이거지.’

공작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블린이 유언장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된다. 황제는 그 유언장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았다. 적당히 예의를 갖추다가도 가끔 하찮은 생물을 보듯 했으니까.

16550801957901.jpg‘하긴. 알았더라면 진즉 움직였겠지.’

황제는 해외 순방을 핑계로 몇 년 내내 제국에 없었으니까.

16550801957901.jpg‘늦기 전에 무조건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놔야 해.’

그의 계획에 가장 방해가 되는 존재는 이블린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여우 같은 황제가 더 문제였다. 이블린을 곁에 둔 꿍꿍이가 뭘까.

16550801957901.jpg“이봐.”

16550801875684.jpg“네, 공작님.”

16550801957901.jpg“사냥 모임을 잡도록 해.”

어떻게든 이블린을 호위기사단장직에서 끌어내려야 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얼마 후에 있을 귀족회의였다. 황제가 무시할 수 없게끔 큰 이슈로 만들 작정이었다.

16550801957901.jpg‘계획이 조금 어긋나기는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임신한 게 진짜라면, 차라리 더 잘된 일이지.’

이블린이 함부로 손댈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매로 자라기 전에, 날개를 꺾어놓으면 그만이었다. 공작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웃었다. * * *

1655080187565.jpg‘속이 답답해.’

단장실로 돌아가는 길. 이블린은 심장 부근을 꾹꾹 눌렀다. 다트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했지만, 어쩐지 체했을 때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16550801875656.jpg“수고했어, 이브.”

  이블린은 손을 휘휘 흔들며 배웅해주던 바스티안을 떠올렸다. 곁에 찰싹 붙어 있을 것처럼 굴던 황제는 진찰이 끝나자마자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었다.

1655080187565.jpg‘아무래도 폐하께서 먼저 계약을 파기하시거나, 계약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의 조건도 정하는 게 좋겠어.’

이블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이야 황제가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지만, 그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기라도 한다면? 솔직히 바스티안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그녀 혼자였다. 황제는 그녀를 필요로 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마땅한 상대가 그녀였을 뿐. 더군다나 바스티안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따로 있어서 시간을 벌고자 했던 거라면 몰라도, 그가 진짜 바람둥이라면 이 계약을 유지할 이유도 사라지는 거였다.

1655080187565.jpg‘계약서에 뭘 더 추가하는 게 좋을까. 뭐라고 하면서 설득하지?’

황제의 손을 잡고 있는 동안,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다 얻어내야 했다. 이블린이 진지하게 고민하며 황제궁으로 향할 때였다. 본궁에서 넘어오는 길목에 익숙한 갈색 머리가 보였다. 휴이터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은 채 걷고 있었다.

1655080187565.jpg“휴이터!”

이름을 작게 부르자 걸음을 멈춘 휴이터가 대번에 이블린을 찾아냈다.

16550801998938.jpg“이블린, 날 만나러 온 거야?”

한걸음에 다가온 휴이터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16550801998938.jpg“나 계속 널 기다렸어,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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