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뺨이나 안 맞으면2021.11.17.
‘음, 그냥 지나가는 길에 보여서 부른 건데.’
기뻐하는 휴이터를 보니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게요.”
이블린이 뒤에 바짝 붙어 있던 호위기사단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호위 기사와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이블린이 눈의 힘을 풀었다.
“휴이, 아까 그렇게 보내서 미안해.”
“아니야, 이브.”
휴이터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단장실을 떠난 이후 내내 우울했는데, 이블린의 말 한마디에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야말로 미안해. 아까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바보 같이 굴었어.”
“궁금한 게 많을 거 알아, 휴이.”
“당연하지. 기사 보고 얼마나 황당했다고.”
휴이터가 헛숨을 뱉었다. 황제의 생일 연회가 끝나기도 전, 그는 급한 일이 생겨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덕분에 이블린의 임신 기사도, 황실에서 낸 입장문도 뒤늦게 접하고 말았다.
‘이블린이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블린의 예상대로, 휴이터는 기사 내용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티에르 가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고고한 이블린이 그런 사고를 쳤을 리 없었다. 황제와 나란히 있던 이블린을 떠올린 휴이터가 인상을 팍 썼다.
“이브.”
황제는 분명 이블린의 애칭을 불렀다. 그의 생일 연회 날, 쓰러지던 이블린을 안아 들 때와 마찬가지로 꽤 친근하게. 정말 사랑하는 이라도 부르듯,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눈빛은 또 어떻고. 이블린의 머리칼을 만지는 손길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두 사람 주위로 끈적하게 달라붙던 공기가 신경 쓰였다.
“폐하랑, 아니지?”
주변을 살핀 휴이터가 은근하게 물었다.
“임신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가 연인 사이가 됐다는 건 진짜라고 말해.”
바스티안의 명령을 떠올린 이블린이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어쨌든 계약을 한 이상, 황제의 의견을 존중할 책임이 있었다.
“스캔들은 그렇긴 한데…… 연인 사이라는 건 진짜야.”
“……뭐?”
휴이터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었다.
“말도 안 돼.”
“……어, 내가 폐하와 연인 사이가 된 게 그렇게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머쓱하게 볼을 문지르는 이블린을 보며 휴이터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블린의 옆에 있는 사람은 나 하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 그랬다. 이블린을 처음 본 열 살, 그야말로 첫눈에 반해버렸다. 인형같이 예쁜 아이가 웃는 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금 더 크고 난 뒤에는, 자신이 집안의 차남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럼 티에르 가에 데릴사위로 가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의 소중한 이브가 다른 이의 연인이 되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거짓말이겠지.’
스캔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휴이, 아까 내게 줄 게 있다고 했잖아, 중요한 거라고. 그게 뭐야?”
휴이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이블린이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아, 그거…….”
휴이터가 말끝을 흐렸다. 만약 여기서 마음을 고백한다면, 이블린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곤란해하겠지. 그러니 지금은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로 남는 게 나았다.
“공작부인의 마차 사고, 첫 목격자를 찾았어.”
주변을 살핀 휴이터가 숨소리에 가까울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정말이야?”
이블린이 우뚝 멈춰 섰다.
“휴이! ……위험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혼내듯 크게 이름을 부른 이블린이 곧 목소리를 줄였다.
“그렇지만, 이브. 네가 계속 찾던 거잖아. 네 일인데 내가 어떻게 두 손 놓고 있어. 내가 근위대장이 된 것도 널 돕기 위해서인데.”
“휴이, 이런 걸 바라고 네게 말한 게 아니야.”
억울하다는 듯 낑낑대는 휴이터를 보며 이블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꾀병을 핑계로 공작가에 틀어박혔을 때, 휴이터는 지치지도 않고 매일같이 공작가를 찾아왔다.
“이블린의 병문안을 왔어요.”
“여기까지 걸음 해준 건 고맙지만 이블린은 누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군요.”
티에르 공작의 계속된 거절에도 휴이터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부친인 디에스티 공작의 힘을 빌리면서까지 기어코 이블린을 만나러 왔다.
“휴이, 네가 여기 어떻게!”
“네가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어디가 아픈 거야? 많이 아파? 의사는 뭐라고 했어?”
죽을병에라도 걸린 사람을 대하듯 구는 휴이터를 속이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휴이, 사실 아픈 척하는 거야. 사정이 좀 있어서.”
이블린은 어쩔 수 없이 휴이터에게만 비밀을 공유해줬다.
“이브, 난 무엇이든 네 일을 돕기로 맹세했어. 기억 안 나?”
휴이터가 이블린의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들여다봤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여리고 천사 같은 이블린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을 발견했을 때, 이블린을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피어났다. 그의 집안은 티에르 가와 마찬가지로 황실에 충성해 온 기사 가문이었다. 무예에 미친 가족들이지만,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했다. 그랬기에 이블린이 더 안쓰러웠다.
“……이브, 네가 뭘 하든 내가 도울게.”
“고마워, 휴이. 그렇지만 네가 위험해지는 건 싫어.”
“걱정 마, 나도 디에스티의 일원이니까.”
“그럼, 나한테 검술을 좀 가르쳐줄래?”
“당연하지!”
이블린이 그를 믿고 의지해주는 게 기뻤다. 이블린이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도, 이블린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쨌든, 찾아준 건 고마워. 그런데 휴이,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더는 관여하면 안 돼. 무슨 뜻인지 알지?”
“…….”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에 들어온 제보. 타이밍이 너무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휴이터랑 소꿉친구라는 건 알고 있으니, 스캔들 때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함정을 판 걸 수도 있고.
“휴이, 네가 그 사고에 대해 더 파고들면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부친이 휴이터가 그의 뒤를 캐고 다닌 걸 알아챈 거라면 곤란했다. 이블린이 지난 2년간, 부친에 대해 자세히 파지 못한 것도 부친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는 거니까. 만약 정말로 어머니의 사고 뒤에 부친이 있는 거라면, 조심스레 접근해야 했다.
“휴이, 대답해.”
“하아, 알겠어.”
이블린이 재차 묻자 휴이터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약속해, 이브. 혼자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을 거지?”
“으응.”
이번에는 이블린이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휴이.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이제야 기다리던 기회를 잡게 됐는걸.
“휴이, 정말 걱정하지 마.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잖아.”
‘왜? 네 곁에 황제 폐하가 있으니까?’
휴이터가 입을 다물었다. 차마 뱉지 못한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알아, 이브. 그래도 네 걱정은 하게 해줘.”
“하여간, 넌 날 너무 걱정해. 곧 봐, 휴이.”
……그건 당연한 거야. 말을 삼킨 휴이터는 그를 두고 떠나는 이블린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제복을 입은 이블린이 벌써 작은 점처럼 보였다.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기사를 보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이브,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휴이터의 파란 눈동자가 단단해졌다. * * *
“그래서, 이블린은 괜찮은 게 확실해?”
약재가 가득한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바스티안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네, 그렇습니다. 절 못 믿으십니까, 폐하.”
약초를 살피던 다트가 껄껄 웃으며 바스티안을 나무랐다. 바스티안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으니, 그는 이 황궁 내에서 바스티안을 가장 오래 본 사람이었다.
“폐하께서 이토록 걱정하신다는 걸 공녀님에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걱정할 수밖에.”
바스티안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이나 확인을 받아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이블린의 몸에 흐르는 건 원래 그녀에게 없었던 정령의 기운이니까. 죽어가던 이블린을 살리기 위해 그가 강제로 집어넣은.
“한 번씩 이상 기운이 잡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공녀님은 어릴 적 겪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군.”
“지금은 폐하 곁에 있으니 안전합니다.”
“……안전하다?”
과연, 그럴까. 바스티안은 작은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봤다. 황제는 정령을 다루고, 그 능력을 다음 대의 황제에게 물려준다. 엘가이스트의 핏줄을 따라 전해지는 계약이었다. 문제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황후였다. 간혹 정령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아이를 품은 것만으로도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이 황실의 아이에 대한 진짜 비밀이었다. 이블린을 황후가 아닌 호위기사단장으로 데려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내가 다섯 살 때였던가.”
바스티안이 중얼거리자 다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황가의 책임이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폐하. 커다란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니, 그 축복의 대가를 치르는 거지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군.”
사랑하는 이를 위험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게 축복일 수 있을까.
“미리 알았더라면, 이블린에게 힘을 넘겨주지 않았을 거야.”
“그랬다면, 이블린 님은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죠.”
“…….”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폐하.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지금은 최선의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최선의 방법이라.
“……이 이야기는 다베르에게도 함구하는 거 잊지 말고.”
“물론이죠.”
바스티안이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들어 만지작댔다. 에메랄드빛 보석이 링을 따라 촘촘히 박힌 반지였다. 정령술사들이 정령의 힘을 더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돕는 원석이라 했다. 이미 많은 정령술사들이 사라진 탓에 구하기가 어려워 온 대륙을 뒤져서 찾게끔 했지만.
“청혼 반지라고 하면, 먹히려나.”
반지를 보고 또 정색할 이블린의 표정을 생각하자 그나마 웃음이 피식 났다.
“이블린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글쎄요, 어쨌든 황후로 맞이하실 게 아니라면 이블린 님에게 넘겨주셨던 힘을 다시 가져오셔야 합니다.”
씁쓸한 한숨을 흘리는 바스티안에게 다트가 신신당부했다.
“방법은 알고 계시지요?”
“……알아.”
“이미 ‘그’ 방법으로 힘을 넘기셨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부부의 맹세와 언약을 한 상대에게만 가능하지만, 글쎄요, 폐하께선 태어나실 때부터 워낙 전에 없이 강하셨으니.”
입술만큼은 지키겠다고 강한 의지를 내비치던 이블린이 생각났다.
“시도하다가 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겠군.”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보면 다른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바스티안이 난감한 한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