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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블린의 계획(1) (15/95)

15. 이블린의 계획(1)2021.11.21.

16550802310441.jpg“그 방법이 어려우면 다른 신체 접촉이라도 많이 하시는 수밖에…….”

16550802310448.jpg“알아, 알고 있으니까 그만 이야기해, 다트.”

바스티안이 눈을 꾹꾹 누르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줬다. 순진하면서도 경계심이 가득한 이블린의 녹안을 떠올리자 심장 언저리가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16550802310448.jpg‘미움받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무슨 핑계를 대고 만져야 하나. 널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런데, 순수하게 사심 없이 그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나?

16550802310448.jpg‘골치가 아프군.’

바스티안이 옅은 한숨을 흘렸다. * * *

16550802310464.jpg“벌써 정리를 끝냈네.”

단장실로 돌아온 이블린이 바뀐 실내를 쭉 훑어봤다. 화려한 물품들 때문에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고풍스럽고 아늑했다.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보석이라든가, 귀한 염료로 물들인 건 흐린 눈으로 넘기기로 했지만. 그래도 한가운데 걸린 바스티안의 초상화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블린은 홀린 듯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16550802310464.jpg“응, 귀엽긴 해.”

팔짱을 낀 채 그림 속 낯익은 소년을 물끄러미 보던 이블린이 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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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02310464.jpg“그나저나…… 뭐지? 이 건강해지는 기분은.”

마치 공기 좋은 숲에라도 온 듯 상쾌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돈의 힘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단장실을 둘러보던 이블린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바뀐 가구마다 공통점이 있었다. 똑같이 생긴 초록색 보석이 물품마다 하나씩은 박혀 있었다.

16550802310464.jpg“……에메랄드인가?”

보석에는 별 관심이 없는 터라 이블린은 손으로 대충 쓸어본 뒤 의자에 앉았다. 지금은 휴이터에게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16550802310464.jpg‘사고의 목격자라고?’

이블린이 손가락 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다 눈을 감았다.

16550802310464.jpg‘어머니.’

그리운 얼굴이 생각났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나눴던 대화도. 그날은, 어머니와 단둘이 오붓하게 여행을 가는 길이었다.

16550802310441.jpg“이블린. 내 딸이지만, 넌 너무 사랑스러워. 널 낳은 게 내 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예쁘고, 똑똑하고.”

16550802310464.jpg“네? 갑자기요?”

16550802310441.jpg“알려주고 싶어서 그래, 네가 내게 얼마나 큰 보물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 주렴. 넌 내가 목숨보다 더 사랑한 사람을 똑 닮은 내 딸이야.”

  이블린이 부친과는 하나도 닮지 않은 제 외모를 생각할 때였다.

16550802310441.jpg“언젠가 네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그때가 되면 너도 내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온몸이 마차에 부딪히는 고통이 느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블린은 침대에 누워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마차가 길을 잘못 들어 낭떠러지로 추락한 사고라 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라고. 부드럽게 머리와 볼을 매만지던 그 손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16550802310464.jpg“…….”

이블린이 감았던 눈을 떴다.

16550802310464.jpg‘생각해 보면 이상했지.’

모두가 즉사할 만큼 큰 사고였는데, 그녀는 가벼운 타박상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시신은 상태가 좋지 않아 볼 수 없다고 했다. 장례식에서 고인에게 꽃을 헌화하는 시간도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 외에도 많았다. 그때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충격에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지만.

16550802310464.jpg‘그 편지가 오지 않았으면, 아버지를 의심하지도 않았을 테고.’

부친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부디 그녀의 의심이 그저 의심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16550802310464.jpg‘조사해보면 알 수 있겠지.’

휴이터가 찾은 정보의 진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16550802310464.jpg‘기사단만으로는 부족해.’

소수 정예로 선발된 호위기사단으로 제국 전역을 뒤질 수는 없었다. 이블린이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할 때였다.

16550802310441.jpg“와, 단장님. 안 그래도 종일 황궁이 떠들썩하더니, 이것 때문이었군요?”

16550802310464.jpg“아, 오단.”

마침 단장실로 들어서던 오단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감탄했다.

16550802310441.jpg“이래서야 원, 폐하께서 단장에게 미쳐 있다는 말이 나도는 게 당연하네요.”

16550802310464.jpg“그런 말이 도나요?”

16550802310441.jpg“모르셨습니까?”

연인이라고 공표한 지 고작 며칠 사이에? 빠르기도 해라. 바스티안의 연극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16550802310464.jpg“오단. 부탁할 게 있어요.”

16550802310441.jpg“네, 단장님.”

16550802310464.jpg“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길드가 필요해요. 기밀 유지에 철저한.”

16550802310441.jpg“맡겨 주십시오.”

16550802310464.jpg“고마워요.”

이블린이 싱긋 웃었다. * * *

16550802310441.jpg“오셨어요, 공녀님.”

16550802310464.jpg“응, 알리에타. 별일 없었지?”

평소였다면 말에서 내렸을 이블린이 얌전히 마차에서 내리며 인사를 건넸다.

16550802310464.jpg‘나는 임산부다.’

이블린은 조심스레 발을 내디디며 마음속으로 주문을 되뇌었다. 몸가짐을 신경 써야 하는 건 꽤 불편한 일이었다.

16550802393667.jpg“공녀님!”

이블린이 저택 로비로 들어서자 하녀들이 그녀를 반겼다. 다들 들떠 보이는 것이 분위기가 묘했다.

16550802310464.jpg“오늘 무슨 일 있었어?”

16550802310441.jpg“사실! 공녀님 앞으로 선물이 어마어마하게 왔어요!”

이블린이 묻자 기다렸다는 듯 하녀들이 여기저기서 병아리처럼 삐약거렸다.

16550802310464.jpg“선물?”

16550802310441.jpg“임신 축하 선물이요!”

16550802310464.jpg“……아.”

16550802310441.jpg“신기한 게 정말 많았어요.”

16550802310441.jpg“맞아요, 그리고 공녀님!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도 있어요.”

16550802310464.jpg“또?”

이블린이 무심코 미간을 좁히자 하녀들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802310464.jpg“아니, 아니야.”

16550802310441.jpg“폐하께서 보내신 건 공녀님 방에 옮겨놓기만 했어요.”

16550802310464.jpg“고마워.”

하녀들이 눈치를 보더니 방으로 향하는 이블린을 슬금슬금 따라왔다.

16550802310441.jpg“습,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16550802393667.jpg“네.”

알리에타의 엄격한 말에 아쉽다는 듯 돌아서는 모습들이 처량했다. 아마도 선물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16550802310464.jpg“오늘 일이 너무 바빠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열어보는 거 도와줄래?”

16550802393667.jpg“네!”

이블린이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자 제비 떼가 합창하듯 명랑한 대답이 돌아왔다. . .

16550802310441.jpg“와, 이렇게 화려한 손거울은 처음 봐요.”

상자를 연 하녀가 감탄했다. 일찌감치 목욕을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은 이블린은 거울 속으로 황제가 보낸 선물들을 눈으로 훑었다. 단장실도 부족했는지, 황제는 공작가에 있는 그녀의 공간까지 싹 다 바꿀 모양이었다.

16550802310441.jpg“머리빗이 너무 귀여워요.”

이블린의 머리를 빗겨주려 다가온 하녀가 조심스레 들고 온 빗을 보여주었다.

16550802310464.jpg“응, 귀엽네.”

16550802310441.jpg“그렇죠?”

이블린이 맞장구를 쳐주자 활짝 웃은 하녀가 이블린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16550802310464.jpg‘근데 저 보석은 다 박혀 있네.’

하녀의 손에 들린 빗을 보던 이블린이 에메랄드빛 보석을 보며 졸린 눈을 깜빡였다.

16550802310464.jpg“그러고 보니, 에바가 안 보이네?”

늘 목욕 시중을 들어주던 하녀 아이 하나가 안 보였다.

16550802393667.jpg“…….”

떠들썩하던 방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서로 눈치만 보며 침묵하는 게 영 이상했다.

16550802310464.jpg“……무슨 일 있었어?”

16550802310441.jpg“아녜요, 공녀님.”

알리에타가 먼저 입을 열어 이블린을 안심시키려 했다.

16550802310464.jpg“알리에타, 솔직히 말해.”

이블린이 서늘하게 말하자 알리에타가 곤란한 듯 머뭇대다 한숨을 쉬었다. . .

16550802310464.jpg“에바!”

이블린이 나무문을 벌컥 열었다. 달빛이 전부인 컴컴한 방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16550802310464.jpg“에바, 나야.”

이블린이 안심시키듯 말한 뒤 불을 켜게 했다.

16550802310441.jpg“공녀님.”

16550802310464.jpg“일어나지 마, 그냥 누워 있어.”

침대로 다가간 이블린이 엎드려 누워 있는 에바를 살폈다. 반쯤 내린 옷 위로 작은 등에 기다랗게 붉은 상흔이 보였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고통스러웠을 터.

16550802310464.jpg“어떻게 된 거야?”

이블린이 다그치듯 알리에타를 바라봤다.

16550802310441.jpg“공작님이 계신 줄 모르고, 공녀님이 황후가 되신다고 신이 나서 떠들었어요.”

에바가 먼저 우물우물 설명을 이었다. 발음이 이상해서 확인하니 그녀의 한쪽 뺨도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16550802310464.jpg‘아버지가.’

이블린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16550802310464.jpg“알리에타,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에바는 전에도 부친에게 손찌검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몸 시중을 들도록 일부러 업무를 바꿔준 거였다. 이블린은 이런 상황도 모르고 편하게 목욕이나 즐기고 선물이나 감상한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했다.

16550802310441.jpg“제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요, 공녀님 홑몸도 아니신데 신경 쓰실까 봐요.”

에바가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변명했다. 다들 이블린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더 밝게 행동한 거였다.

16550802310464.jpg“에바, 내게 숨기는 게 날 더 힘들게 하는 거야. 알리에타, 어서 의사를 데려와 치료받게 해.”

16550802310441.jpg“공작님이 아시면 큰일 나요.”

16550802310464.jpg“에바, 지금은 널 치료하는 게 더 중요해.”

심하지 않다고 해도 채찍에 맞은 상처였다.

16550802310464.jpg“흉터가 남으면 안 될 텐데. 미안해, 에바. 많이 아팠지?”

16550802310441.jpg“……공녀님.”

천진난만하던 아이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16550802310464.jpg“울지 마, 눈물이 닿으면 상처가 더 아파.”

에바의 눈물을 닦아준 이블린이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 * *

16550802310464.jpg“알리에타, 내게 먼저 알렸어야지. 내가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은 전부 말하랬잖아.”

이블린이 알리에타를 질책했다. 치료가 끝나고 에바가 잠드는 것까지 확인하고 침실로 돌아온 참이었다.

16550802310441.jpg“다들 공녀님 걱정만 하면서 숨기자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말씀드리나요.”

16550802310464.jpg“하아.”

응접실 소파에 앉은 이블린이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16550802310464.jpg“한동안은 고용인들에게 손대지 않더니.”

16550802310441.jpg“오늘 계속 공녀님 앞으로 선물이 들어와서 저택이 어수선했거든요.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였어요.”

알리에타의 보고에 이블린이 눈을 내리떴다.

16550802310464.jpg‘내가 공작가에 남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어.’

부친과 대립하는 상황이 많아질수록 그 불똥은 다른 이들에게 튈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공작가에 남으려 한 것도 고용인들이 걱정되어 그런 것도 있으니까.

16550802310464.jpg‘아무래도,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더 낫겠어.’

게다가, 황제와의 계약도 좀 더 공고히 하려면 그와 좀 더 가까이 붙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부친의 눈 밖에 난 고용인들은 추천서를 써서 다른 귀족가로 보내고. 몇몇은 황궁으로 데려가는 게 나을 테고. 그러려면 자금이 좀 더 필요한데……. 이블린이 잠시 생각을 멈췄다.

16550802310464.jpg“아버지는 사냥 모임을 갔다고?”

16550802310441.jpg“네. 그, 달레나 영지에 있는 숲으로 간다고 했어요.”

16550802310464.jpg“며칠은 안 돌아오겠네.”

머리를 쓸어넘기던 이블린의 시선이 문득 옆에 있는 티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16550802310464.jpg“저녁 생각은 없는데, 알리에타.”

16550802310441.jpg“아이고 참, 잊고 있었네요.”

알리에타가 깜짝 놀라 손뼉을 쳤다.

16550802310441.jpg“드시라고 준비해둔 게 아니라요, 임산부가 조심해야 할 음식들을 알려드리려고 해요. 이런 건 알아두셔야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아서. 황궁에서는 제가 곁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16550802310464.jpg“아, 음식.”

그런 것도 신경 써야 하는구나.

16550802310464.jpg“……알리에타.”

음식을 보던 이블린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16550802310441.jpg“공녀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안 됩니다.”

알리에타가 불안하게 중얼댔다. 이건 분명, 이블린이 무언가 위험한 생각을 할 때의 눈빛이었다.

16550802310464.jpg“아이참, 알리에타는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이블린이 알리에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16550802310441.jpg“꺄아아악, 공녀님! 공녀님이 쓰러지셨어요!”

알리에타가 비명을 지르며 침실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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