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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블린의 계획(2) (16/95)

16. 이블린의 계획(2)2021.11.24.

16550802639926.jpg“단장님이 쓰러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알리에타의 비명에 침실 앞을 지키던 보레아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공작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이블린의 안전을 이유로 기사단원 일부가 공작가에 들어앉은 상태였다.

16550802639926.jpg“단장님!”

응접실 카펫에 쓰러져있는 이블린을 발견한 보레아가 사색이 됐다.

16550802639926.jpg“단장님, 정신 차려 보십시오, 괜찮으십니까?”

16550802639952.jpg“괜……찮아.”

이블린이 작게 중얼거리자 보레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50802639926.jpg“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보레아가 이블린을 부축해 침대에 눕히자 알리에타가 얼른 이블린의 얼굴이 반쯤 가려지도록 이불을 덮었다.

16550802639926.jpg“무슨 일인가요?”

16550802639926.jpg“무슨 일이야!”

그와 동시에 다른 기사 단원들과 공작가의 사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16550802639926.jpg“누가 공녀님의 음식에 못된 짓을 했어요. 임산부에게 해로운 재료를 넣었어요.”

16550802639973.jpg“!”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블린을 본 다른 이들도 보레아가 그랬듯 사색이 됐다.

16550802639926.jpg“지금부터 공작가를 폐쇄하고 수색을 시작한다. 쥐새끼 한 마리 못 빠져나가게 해!”

보레아가 포효하듯 외치는 말에 기사단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16550802639926.jpg“공작가의 모든 사용인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저택 중앙홀로 모이시오!”

16550802639926.jpg“지금부터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인다면, 황족 시해 죄로 즉결처분할 수도 있소.”

16550802639926.jpg“……수색에 협조하겠습니다.”

호위기사단원들이 명령하자 공작가의 사병들은 주춤대면서도 지시를 따랐다.

16550802639926.jpg“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16550802639926.jpg“감히 우리 공녀님께 이런 짓을.”

서슬 퍼런 호위기사단원들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고용인들은 이블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공작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충격이었다.

16550802639926.jpg‘이걸 어쩌지?’

16550802639926.jpg‘지금 상황에 무얼 하겠어, 일단 따라야지.’

공작이 남겨놓은 그의 수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아이를 가진 공녀에게 문제가 생겼다. 당장 목숨이 날아가게 생긴 판이니, 공작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괜한 시도라도 했다가 의심을 받아 범인으로 지목되면 끝장이었다.

16550802639926.jpg‘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두가 사시나무 떨듯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사병을 따라 움직였다. 곧 이블린의 침실 문이 굳게 닫히고, 기사들이 검을 뽑는 소리가 철컹, 하고 매섭게 울렸다. * * *

16550802669114.jpg“다음 귀족 회의가 언제지?”

16550802669118.jpg“사흘 후입니다.”

16550802669114.jpg“보나마나 이블린의 기사단장직 자리를 놓고 이야기가 나오겠군.”

집무실로 들어서던 바스티안이 귀찮은 기색을 드러냈다.

16550802669118.jpg“네, 아이가 생겼다고 공표했으니 결혼식 관련 이야기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16550802669114.jpg“글쎄, 이블린이 황후가 되기를 바라는 가문은 의외로 많지 않을걸.”

티에르 가문에 줄을 서고 싶은 마음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귀족이 제 가문에서 황후가 나오는 명예를 누리고 싶어 하니까.

16550802669114.jpg“티에르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는군.”

16550802669118.jpg“글쎄요, 본인의 지지 세력을 넓히느라 바쁜 것 같습니다만. 그냥 두실 겁니까?”

16550802669114.jpg“응, 지켜보기만 해.”

16550802669118.jpg“폐하, 어차피 단장이 티에르 가문을 갖게 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굳이 티에르 공작을 저렇게 내버려 두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바스티안의 심드렁한 대답에 다베르가 고개를 갸웃댔다.

16550802669114.jpg“이블린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바스티안은 평온한 말투였다.

16550802669114.jpg“난 이블린이 어떤 선택을 하든 따를 생각이고.”

픽 웃음을 흘린 바스티안이 집무실 안을 느리게 걷다 책장 앞에서 멈췄다.

16550802669114.jpg“난 그 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책 표면을 쓸며 움직이던 손이 그중 한 권을 뽑아냈다. 바스티안의 긴 손가락이 책 사이에 꽂혀 있던 종이를 빼낸 뒤 천천히 펼쳤다. [모친을 잃고 슬퍼하는 티에르 공녀.] 냉정하게 느껴지는 제목 아래, 이블린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진이 실린 신문의 1면이었다.

16550802669114.jpg“…….”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을 눈물을 상상하며 손끝으로 사진을 쓸어보았다.

16550802669114.jpg“역시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예쁘거든.”

기억 속의 어린 이블린은 마치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것 같은 아이였다. 까르르 웃을 때면 귀여운 천사 같기도 했고. 작고 예쁜 인형 같던 첫사랑이 멋진 여인이 되어 나타난 건 기쁘지만.

16550802669114.jpg‘좀처럼 웃는 걸 보기 힘들단 말이지.’

지금의 이블린은 늘 무뚝뚝한 얼굴이던 선대 티에르 공작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바스티안의 시선이 다시 신문 속 이블린으로 향했다.

16550802669114.jpg‘웃길 바라서 떠났는데, 울고 있었을 줄이야.’

씁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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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02669114.jpg“후작,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슈라우츠 공국이었나.”

16550802669118.jpg“네, 그렇습니다. 왕궁 연회에서 처음 뵈었지요.”

16550802669114.jpg“그때 나더러, 왜 제국의 유일한 후계가 이웃 나라를 전전하느냐 물었지.”

16550802669118.jpg“……그랬습니다.”

16550802669114.jpg“그때 내 대답을 듣고 어이없어하던 그대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

16550802669118.jpg“……죄송합니다.”

다베르 후작이 난감해하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16550802669114.jpg“여자 때문에.”

하지만, 그 한마디를 듣고 황당해한 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16550802669114.jpg“죄송할 것까지야.”

바스티안이 신문을 다시 접은 뒤 책 사이에 끼워 넣을 때였다.

16550802639926.jpg“폐하! 티에르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급한 목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16550802669114.jpg“……무슨 일이지?”

16550802639926.jpg“폐하, 이블린 님에게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또 쓰러졌다는군요.”

16550802669114.jpg“뭐?”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바스티안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오단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나타났다.

16550802639926.jpg“폐하.”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보레아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16550802639926.jpg“단장이 전해드리라 했습니다.”

16550802669114.jpg“이블린이?”

서둘러 종이를 펼친 바스티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께 배운 걸 써먹어 보려 합니다.] 간략한 한 문장이었다.

16550802669114.jpg“보레아, 추가 설명이 필요한데.”

16550802639926.jpg“네, 폐하. 그것이…….”

바스티안의 웃음을 보고 멍청하게 서 있던 보레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16550802669114.jpg“가면서 듣지.”

16550802669118.jpg“직접 가시려고요?”

상황을 지켜보던 다베르가 바스티안의 곁에 따라붙었다.

16550802669114.jpg“이런 재미있는 걸 또 놓칠 수 없지.”

바스티안이 쿡쿡대며 걸음을 옮겼다. * * *

16550802639952.jpg“……알리에타.”

이블린이 이불 끝을 잡고 슬그머니 내렸다.

16550802639952.jpg“화났어?”

그녀의 곁에는 팔짱을 낀 알리에타가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 이블린에게 무른 알리에타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16550802639926.jpg“네에, 이 늙은이 정말 화났습니다. 이제 만족하세요? 하나를 가르쳐드리면 열을 깨우치시더니, 이런 쪽으로도 머리를 쓰실 줄은 몰랐다고요.”

임산부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알려주려던 것뿐이었는데, 이블린의 연극에 동참하게 될 줄이야.

16550802639952.jpg“미안, 알리에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난 이제 황궁으로 갈 생각이니까.”

저택을 누가 차지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바스티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에바에게 벌어진 일을 보며 완전히 결심하게 됐고. 보레아가 그녀를 부축하려 다가왔을 때, 이블린은 조용히 명령했다.

16550802639952.jpg“보레아, 잘 들어요. 지금부터 황궁으로 가서 폐하께 이 편지를 전해요. 그리고 범인 색출과 증거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고 혼을 빼놔요. 공작의 집무실 근처에는 누구 하나 얼씬도 못 하도록.”

  지금쯤 그녀의 명대로 기사단원들은 저택을 들쑤시고 있을 거다. 부친의 집무실을 털어볼 작정이었다. 평소에는 부친의 수족들이 지키고 있으니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16550802639926.jpg“그렇다고 이런 연극을…….”

16550802639952.jpg“누가 그러더라고. 가끔은 옆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선택해야 한다고.”

16550802639926.jpg“네?”

이블린은 낮에 황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16550802669114.jpg“이블린, 왜 선황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 티에르 가와 황실의 오랜 역사를 생각한다면, 모른 척하시지 않았을 텐데.”

  이블린이 공작가에 틀어박힌 게 2년 전. 제국을 떠나 있던 바스티안이 돌아온 건 석 달 전. 선황제가 세상을 떠난 건 두 달 전. 바스티안으로서는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구심이었다.

16550802639952.jpg“황실은 한낱 귀족 가문의 불화나 해결해주려고 존재하는 곳이 아니니까요. 티에르 가는 어디까지나 황실을 위한 선택을 합니다.”

16550802669114.jpg“……그것참, 대단한 충성심이군 그래.”

16550802639952.jpg“조부의 가르침입니다.”

16550802669114.jpg“하, 티에르의 핏줄이란.”

16550802639952.jpg“비꼬시는 건가요?”

16550802669114.jpg“칭찬이야.”

16550802639952.jpg“…….”

16550802669114.jpg“하지만 이블린, 사람이 꼿꼿하기만 해서는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어.”

  그때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때로는 영악하게, 계산적으로 굴라는 그의 충고를 바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16550802639926.jpg“어쨌든, 공녀님께서 황궁으로 가신다니 차라리 잘 됐다 싶기는 한데, 폐하를,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요?”

알리에타가 걱정스레 물었다. 감히 제국의 황제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실상 그 황제가 소중한 공녀님을 말리기는커녕 함께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지 않나.

16550802639952.jpg“음, 아마도.”

16550802639926.jpg“저는 그냥 다 불안해 죽겠…….”

알리에타가 속닥이는데 커다란 노크 소리가 울렸다.

16550802639926.jpg“공녀님, 얼른 이불 덮으세요.”

이블린을 다시 눕게 한 알리에타가 문으로 다가갔다.

16550802639926.jpg“무슨 일…… 에그머니나!”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아당기던 알리에타가 바닥에 넘어지듯 엎드렸다. 알리에타의 도톰한 목이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손님의 정체는 방금 그녀가 언급한 황제였다. 알리에타를 지나친 바스티안이 침대 옆에 멈췄다.

16550802669114.jpg“이블린, 아프다며?”

16550802639952.jpg“폐하?”

이불을 휙 내린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빨리? 보레아의 기동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여기는 왜?

16550802639952.jpg“폐하께서 여긴 어떻게…….”

16550802669114.jpg“그대가 쓰러졌다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않겠어?”

걱정해서 왔다는 말과 다르게 그는 싱글대며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하세요, 폐하. 그냥 구경하러 오신 거면서.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가까스로 삼킨 이블린이 알리에타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눈짓했다. 둘만 남게 되자 바스티안이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회녹색 눈이 찬찬히 이블린의 방을 훑었다. 이블린은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16550802639952.jpg“여기까지 선물을 보내셨을 줄 몰랐어요.”

16550802669114.jpg“또 혼내려고?”

16550802639952.jpg“……아뇨, 감사합니다.”

바스티안이 빙긋 웃었다.

16550802669114.jpg“그래서,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16550802639952.jpg“저, 황궁으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16550802669114.jpg“그래?”

바스티안이 눈썹을 까딱였다.

16550802639952.jpg“그 전에 몇 가지 정리 좀 하려고요. 안 그래도 폐하께 의논드리려던 차였……”

다시금 울린 노크 소리가 이블린의 말을 막았다.

16550802639926.jpg“보레아입니다.”

16550802669114.jpg“들어와.”

16550802639926.jpg“저택 상황이 정리됐으니, 이제 움직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집무실로 가시지요.”

바스티안의 허락에 문을 살짝 열고 조용히 들어온 보레아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보레아와 이블린을 번갈아 본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16550802669114.jpg“실례.”

그리고 이블린을 이불째로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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