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재미있잖아2021.11.28.
폭신하고 가벼운 오리털 이불이 이블린의 몸을 감쌌다. 이블린을 커다란 누에고치로 만들어버린 바스티안이 팔을 움직여 이블린을 고쳐 안았다.
“폐, 폐하.”
이불 밖으로 겨우 얼굴만 빼꼼 내민 이블린이 당황해서는 바스티안을 불렀다.
“바둥대면 떨어질지도 몰라, 얌전히 있어.”
씩 웃으며 경고한 바스티안이 침실을 성큼성큼 벗어났다. 그는 저택 내부를 잘 아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꼭 이런 식으로 하셔야겠어요? 사람들이 본다고요.”
이블린의 눈동자가 황제의 날카로운 턱선과 주변을 번갈아 살폈다.
“그러니까.”
바스티안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동의했다.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많이들 보라고.”
저택 내부 수색을 하던 호위기사단원과 사병들이 그가 지나칠 때마다 곧장 허리를 숙였다. 이블린은 그나마 나와 있는 얼굴 반쪽마저 숨기고 싶어졌다. 그런 이블린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바스티안이 눈만 동동 떠 있는 듯한 이블린을 내려다봤다.
“빨리 아픈 척이나 해.”
“…….”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말에 이블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축 늘어트렸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필요하실 때 불러주십시오.”
“고마워요, 보레아.”
보고를 끝낸 보레아가 다른 기사단원들을 데리고 나갔다. 집무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된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내려놓으려다 멈칫했다.
“역시 내가 계속 안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맨발이잖아.”
“그냥 내려주세요, 폐하. 시간이 많지 않아요.”
범인을 찾는다는 핑계로 언제까지 고용인들을 붙잡아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부대로.”
이블린의 타박에 바스티안이 그러냐며 싱긋 웃고는 카펫 위에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다 봐야 해요.”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이불을 풀어낸 이블린이 곧장 장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빠르게 내용을 확인하던 이블린은 문득 이상한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소파 등받이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뻗은 황제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폐하. 왜 그러고 계세요?”
이블린이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비록 그가 제국의 황제라지만, 지금 그의 눈치를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애초에 갑자기 찾아온 사람도 그였고.
“혹시 불편하시다면, 그만 황궁으로…….”
“그냥,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
바스티안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늘 민망할 정도로 그녀를 빤히 보던 눈동자도 비스듬히 옆으로 향해 있었다.
“그대, 옷이 좀…….”
“옷이요?”
답지 않게 민망한 표정인 바스티안을 의아하게 보던 이블린이 제 몸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
뒤늦게 이블린이 얼굴을 붉혔다. 내내 침대에 누워 있던 탓에 잠옷 차림이라는 걸 잊고 말았다. 발목보다 조금 짧게 오는 하얀 원피스 잠옷이었다. 얇은 재질 탓에 몸의 선과 살이 조금 비치는 데다 가슴 부근까지 네크라인이 휑하게 뚫려 있어 뽀얀 속살이 조금 드러나 있었다.
“걸쳐.”
이불을 다시 덮을까 하고 쳐다보는데 바스티안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이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견장과 와펜으로 장식된 제복은 오로지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폐하, 그걸 제가 입을 수는.”
“됐어. 이불 뒤집어쓰고 언제 다 보려고. 어차피 따지고 보면 그대도 황가의 사람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상관없잖아.”
“그래도…….”
“내가 신경 쓰여서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냥 입어.”
바스티안의 덤덤한 말에 이블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 네.”
얌전히 옷을 받아 걸치자 바스티안이 성큼 다가와 단추를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이블린의 가슴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이 무척 느리게 느껴져서 이블린은 어쩐지 숨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내리깐 시선에 바스티안의 붉어진 목덜미가 조금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건 아닐 테고. 혹시 음흉한 생각을 하는 건가. 갑자기 공기가 훅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 모습을 다른 녀석들에게 보인 건 아니겠지?”
바스티안이 소매를 접어주며 물었다.
“……네?”
다른 생각을 하던 이블린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보였군. 누구지?”
“……..”
“보레아인가. 편지를 전달한 게 그니까.”
이블린이 침묵하자 바스티안의 냉기 어린 목소리가 내려왔다.
“역시 자를까.”
“……!”
“감히, 보면 안 될 걸 봤으니까.”
만약 안아서 옮겼다는 것까지 알면 뭐라고 하시려나.
“그, 쓰러진 척하고 나서 갈아입은 거예요.”
이블린은 한 사람의 소중한 일자리를 지켜주기로 했다.
“그대는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없군.”
그렇게 티가 나나? 이블린이 눈동자를 옆으로 옮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인처럼 보여야 할 때도 그대가 그토록 어색한 거야.”
“……그 정도인가요?”
“그래, 그러니까 계속 스스로 세뇌해. 그대가 날 사랑한다고 끝없이 새기라고.”
사랑. 이블린은 괜히 불퉁한 마음이 샘솟았다.
“폐하는 그러시나 보죠?”
“뭘?”
“폐하께서는 늘 절 사랑한다고 되뇌시나 봐요.”
“…….”
또 능글대며 맞받아칠 줄 알았는데, 그는 대답 없이 빤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약간의 미소만 머금은 채.
‘뭐야, 왜 아무 말도 안 하시지?’
쓸데없는 걸 물어본 것 같아 민망해졌다.
“뭐, 나도 딱히 연기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아니야.”
소매를 마저 접어준 바스티안이 툭 한마디를 뱉으며 몸을 물렸다.
“그래서, 이런 연극까지 벌이며 찾는 게 뭐지?”
연기에 소질이 없다니. 이블린이 그의 말에 의구심을 품기도 전, 바스티안이 화제를 바꿨다.
“……공작가의 자금이 사용된 기록이요. 그동안 공작가와 거래했던 상단이나 길드의 정보가 필요해서요. 아버지의 주변부터 하나씩 파 볼 생각이에요. 폐하께서 알고 계신 정보를 주시면 더 감사할 거예요.”
귀족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계시잖아요. 이블린의 투명한 눈동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다베르에게 받도록 해.”
“감사합니다.”
“여기서는 공작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찾으면 되는 건가.”
“그러면 좋겠지만, 어차피 중요한 자료를 이곳에 보관하지 않을 거예요. 그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 테고.”
“흠. 그럼 은밀히 움직였어야지?”
“……경고하는 거죠. 제가 더이상 힘없는 공녀가 아니라고. 나와 내 주변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 당분간은 성급하게 일을 벌이지 말아라.”
이블린이 덤덤하게 읊조리며 서류를 훑었다.
“이브,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전부 해결해 줄 수도 있어.”
“…….”
고개를 든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이건 제 싸움이에요, 폐하. 어쩌다 보니 폐하께 도움을 받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가문의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표정에서 단호한 의지가 드러났다.
“……멋진데? 지금 약간 두근거렸어.”
또 놀리려는 거냐는 듯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이블린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폐하께서 한심해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가급적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거든요. 평화적이고 우아한 방법을 원해요.”
적어도 아직까지는요. 이렇게 서서히 부친의 숨통을 조여서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한심하다고 생각 안 해. 난 그대를 존중하니까.”
말을 덧붙인 바스티안이 함께 서류를 집어 들었다.
“…….”
뜻밖의 말을 들은 이블린이 손을 멈췄다. 황제는 한 번씩, 저렇게 생각지 못할 때 듣기 좋은 말을 해준다.
‘정말 헷갈리게 만드는 사람이야.’
이블린은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장부를 읽기 시작한 바스티안을 훔쳐봤다. 손등에서부터 팔까지 연결된 핏줄이 꽤 남자다웠다. 목선에서 어깨까지 연결되는 부위도 기사들처럼 두툼하고. 역시 검을 다루시는 걸까? 휴이보다 더 잘하시려나?
“흐흠.”
잠깐의 궁금증은 다시금 서류 뒤로 사라졌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후로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넓은 공간을 채웠다. 가끔 서로를 살피는 시선이 번갈아 오가기는 했지만. . . . 그렇게 서류만 들여다보기를 한참.
“이블린, 그대가 찾는 게 이것 같은데.”
먼저 입을 뗀 건 바스티안이었다. 고개를 까딱인 그가 이블린에게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받아든 이블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범하게 공작가의 예산이 사용된 기록을 적어둔 것 같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조작의 흔적이 드러났다. 공작가의 예산이 사용된 곳이나, 각 영지에서 징수한 세금의 금액이 적혀 있는 다른 서류를 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맞아요.”
이블린이 눈을 빛냈다.
“감사합니다, 폐하. 혼자 다 보려면 오래 걸렸을 거예요.”
“별말씀을.”
바스티안이 깨끗한 종이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이블린에게 펜을 건넸다.
“그럼 이제 황궁으로 가는 건가?”
이블린이 서류의 내용을 다 옮겨 적을 때까지 기다려준 바스티안이 덤덤히 물었다.
“아,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어요.”
이블린이 잠시 말을 멈추고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이블린, 이건 너와 나만 아는 공간이란다. 대대로 티에르 가문의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곳이지.”
선대 공작이던 조부가 살아 있을 당시, 그녀에게 가르쳐 준 비밀 공간이 있었다. 사실 오늘 소동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가 이거였다.
‘폐하께 보여드려도 괜찮을까. 떠나기 전에 그곳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은데.’
하긴. 어차피 부친과의 일이 정리된다면, 그때 새로 만들면 되겠지.
“폐하.”
짐짓 무게를 잡는 이블린에 바스티안이 한쪽 눈을 크게 떴다.
“지금부터, 폐하께 공작가의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 거예요.”
“비밀?”
“네. 그러니까, 나중에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래, 뭐, 그러지.”
다짜고짜 비밀을 알려주겠다면서 그에 맞는 대가를 달라니. 바스티안이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약속하신 거예요.”
이블린이 괜한 생색을 내며 집무실 벽난로로 다가갔다. 공작이 자리를 비운 탓에 벽난로의 불은 꺼져 있었다.
‘여기 어디였는데.’
부지깽이를 집어 든 이블린이 벽난로 한쪽을 있는 힘껏 찌르듯이 누르자 곧 무겁고 거친 소음이 들렸다. 마치 쇠기둥이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건 뭐지?”
“보시면 알아요.”
이블린이 대답하며 벽난로의 옆에 걸린 그림 앞에 섰다. 초대 티에르 공작의 초상화로 커다란 문 한쪽의 크기였다. 이블린이 그림을 밀자 그림이 반쯤 돌아가며 컴컴한 입구가 드러났다. 평소에는 쇠기둥으로 막아 평범한 벽처럼 보이게 만든 모양이었다.
“가주에게만 전해져 오는 비밀 공간이랬어요.”
이블린이 바스티안에게 함께 내려가겠냐며 눈으로 물었다.
‘역시, 오길 잘했다니까.’
봐, 재미있잖아. 바스티안이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먼저 어둠 속으로 몸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