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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대가 원하는 대로 (18/95)

18. 그대가 원하는 대로2021.12.01.

가파른 계단을 몇 칸 내려간 바스티안이 몸을 돌렸다.

16550803234876.jpg“이리 와, 이블린.”

16550803234882.jpg“…….”

이블린은 그녀 앞으로 불쑥 다가온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었다. 어둠 속에 묻힌 커다란 남자의 모습이 두려움보다는 안정감을 주는 게 신기했다. 늘 그녀의 시선보다 조금 아래에서 손을 내미는 황제에게 익숙해지는 것도 그렇고. 물론, 그 사실이 경계심을 낮출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바람둥이니까.

16550803234882.jpg“뒤에 따라갈게요.”

16550803234876.jpg“맨발이잖아.”

이블린이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자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16550803234882.jpg“그런 건 괜찮은데요.”

16550803234876.jpg“시간 없다며, 이런 거로 실랑이할 때야? 이럴 때는 그냥 의지하는 게 어때?”

커다란 손이 고집스럽게 까딱였다.

16550803234876.jpg“의지라는 표현이 싫으면, 이용한다고 생각하든가.”

설득당한 이블린이 살며시 손을 뻗었다. 그의 말마따나 입씨름하느라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손을 맞잡자 어둠에서 나온 다른 손이 이블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볍게 당기는 힘에 끌려간 이블린의 몸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6550803234876.jpg“꽉 붙잡아.”

강제로 바스티안의 목을 끌어안게 된 이블린은 옆으로 둥실 떠오른 작은 빛을 쳐다봤다.

16550803234882.jpg‘정령을 다룬다는 거, 되게 좋은 거구나.’

가끔 그가 보여주는 능력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눈으로 빛을 쫓으니 바스티안의 얼굴이 보여서 이블린은 슬쩍 고개를 떨어트렸다.

16550803234882.jpg‘살면서 이런 식으로 안겨 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조부인 선대 티에르 공작은 물론이거니와 부친은 더더욱. 큰 사랑을 받으며 자라기는 했어도, 어리광이 허락된 건 아니었다. 티에르가의 공녀로서 지켜야 하는 품위가 무엇인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바스티안에게만 벌써 몇 번이고 안겼다.

16550803234882.jpg‘대체 날 어떻게 보시는 걸까.’

우선, 믿음직한 호위기사단장으로 안 보는 건 확실히 알겠다. 빈틈없이 안고 있으면서도 바스티안은 그의 손이 이블린의 몸에 닿지 않게 조심하는 듯했다. 함부로 이마에 입을 맞추기도 하면서, 이런 건 또 의외였다.

16550803234882.jpg‘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얌전히 안겨 있으려니 어쩐지 심장이 불편하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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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씩 커지는 심장 소리와 계단을 내려가는 바스티안의 발걸음 소리가 엇갈리며 울리는 게 신경 쓰일 때쯤.

16550803234876.jpg“여기 내려와 봤어?”

16550803234882.jpg“어릴 적 딱 한 번이요.”

바스티안의 질문이 이블린의 어색함을 깨뜨렸다. 바스티안은 이블린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힘주어 안으며 발끝에 집중했다.

16550803234876.jpg‘공작가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재미있네.’

어릴 적 이블린과 온 저택 안을 헤집고 다닌 덕에 모르는 곳이 없다고 여겼는데, 착각이었던 거다. 어둡고 좁은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넓은 동굴 같은 곳이 나타났다. 바스티안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16550803234876.jpg“음, 티에르 공작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군.”

두 사람이 마주한 건 거대한 창고였다. 한쪽 벽면에는 어마어마한 황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 기사단 하나는 거뜬히 움직일 수 있는 양의 무기가 정돈되어 있었다.

16550803234882.jpg‘아직 무사했구나.’

이블린은 안도했다. 혹시 전부 사라졌으면 어쩌나 했는데.

16550803234882.jpg“내려주세요, 폐하.”

16550803234876.jpg“어딜.”

콧방귀를 뀐 바스티안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 하나를 발끝으로 쳐 공중으로 떠올렸다.

16550803234876.jpg“꺼내 봐.”

16550803234882.jpg“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검을 잡은 이블린이 검집에서 검을 빼보았다. 차르릉, 동굴 안을 울리는 소리가 꽤 날카로웠다.

16550803234882.jpg“좋은 검이네요.”

16550803234876.jpg“그렇군.”

조금 녹이 슬기는 했지만, 손질만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품질이었다.

16550803234876.jpg“선대 공작은 여길 왜 만든 거지?”

16550803234882.jpg“…….”

이블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바스티안이 드러낸 의구심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16550803289652.jpg“제국은 오래도록 평화로웠지만, 그 평화가 영원하리라는 법은 없지. 그러니 늘 위험을 대비해야 한다. 그런 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언젠가 제국이 흔들리는 때가 온다면, 이블린, 네가 황태자 전하를 잘 보필해야 한다.”

  이 공간을 알려주며 덧붙인 조부의 말이었다. 이블린은 바스티안을 힐끗 쳐다봤다. 그를 잘 보필하라고 했다는 조부의 이야기를 전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16550803234882.jpg‘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녀가 티에르인 이상, 계약 내용과 상관없이 그는 이블린이 평생 모셔야 할 존재였다.

16550803234882.jpg“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비상시를 위해 만든 공간이라 했어요.”

16550803234876.jpg“그런가, 지금의 티에르 공작은 이곳을 모르는 모양이군. 관리가 전혀 안 된 걸 보면.”

바스티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읊조렸다. 말린 육포 같은 비상식량도 꽤 많이 쌓여 있었는데, 이미 상한 지 오래였다. 이블린은 조용히 동의했다.

16550803234882.jpg‘어쩌면, 할아버님은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으셨던 걸지도.’

그때 조부의 표정이 어두웠던 건 이런 미래를 예감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16550803234876.jpg“저쪽으로도 길이 연결되는 모양인데, 어디로 나가는 거지?”

16550803234882.jpg“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이블린과 바스티안이 눈을 마주쳤다.

16550803234876.jpg“확인해봐야겠지?”

16550803234882.jpg“…….”

그렇긴 한데요…… 계속 이렇게 안겨서 가야 하는 건가…….

16550803234882.jpg“그럼 내려주세요, 폐하.”

16550803234876.jpg“안 돼, 발이 더러워지잖아.”

16550803234882.jpg“이미 집무실에서 더러워졌어요.”

16550803234876.jpg“이블린, 포기하지 않는 그 끈기가 가상하긴 한데, 지금은 그냥 얌전히 안겨 가지 그래?”

16550803234882.jpg“네?”

16550803234876.jpg“길이 좋지 않아. 뭐, 그대가 다치는 건 또 싫으니까.”

일축한 바스티안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6550803234882.jpg‘이럴 때 보면 꼭 유리구슬 다루듯 하신다니까.’

역시 호위기사단장으로서 그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의 곁에서 일하는 동안, 황제가 다른 이들에게 이토록 친절을 베푸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적어도, 일단은 그녀에게만 이런다는 건데.

16550803234882.jpg“폐하.”

16550803234876.jpg“응.”

16550803234882.jpg“혹시, 제가 여자라서 이러시는 건가요?”

16550803234876.jpg“……뭐가?”

16550803234882.jpg“이런 식으로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시는 거요.”

16550803234876.jpg“그렇게 느껴지기는 했고?”

바스티안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픽 웃었다.

16550803234882.jpg“……폐하.”

16550803234876.jpg“여자라서가 아니야. 그대가 이블린 티에르니까 이러는 거지.”

16550803234882.jpg“…….”

해석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이블린은 질문 대신 손가락을 꼼질댔다.

16550803234876.jpg“그래서 이블린, 저것들은 어쩔 생각이지?”

다시 어두운 통로로 들어가며 바스티안이 턱 끝으로 뒤를 가리켰다.

16550803234876.jpg“저 정도면, 못해도 귀족 가문 하나를 일으켜 세울 정도는 되겠는데.”

16550803234882.jpg“……가져야죠, 제가. 그러려고 이런 소동을 일으킨걸요.”

잠깐의 침묵 끝에 이블린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부친 수족들의 눈과 발을 묶어두고 몰래 옮기려는 계획이었다. 바스티안은 그의 사유 재산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했지만, 거기까지 황제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16550803234876.jpg“음, 좋은 생각이야.”

16550803234882.jpg“황궁의 창고 하나만 빌려주시면 감사할 거예요.”

16550803234876.jpg“그쯤이야 얼마든지.”

이블린은 바스티안의 어깨너머로 번쩍이는 금빛을 응시했다. 지난 2년간, 아버지의 곁에서 볼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꾹 참아드린 값치고는 소소한지도요. . . 짧은 모험을 끝내고 침실로 돌아온 후.

16550803234876.jpg“완벽한 비밀 통로로군.”

이블린을 침대 위에 내려준 바스티안이 소감을 말했다. 통로의 끝은 공작가 뒤편의 전나무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6550803234882.jpg“네,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지도요.”

16550803234876.jpg“그런 날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중얼댔다.

16550803234882.jpg“뭐 하시는 건가요, 폐하.”

슬그머니 바스티안의 손길을 피한 이블린이 미간을 좁혔다.

16550803234876.jpg“계속 안고 있었더니 팔이 저려서.”

16550803234882.jpg“……네?”

그러니까 내려달라고 했는데! 가만, 그러고 보니……. 굳이 품에 안고 걸을 필요 없이 바람을 이용해서 옮겼어도 되지 않나? 이블린의 미간이 더 좁아질 때였다.

16550803234876.jpg“그럼 공작가에서 볼 일은 다 끝난 건가.”

이블린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바스티안이 선수를 쳤다.

16550803234882.jpg“아.”

멈칫한 이블린이 제 방을 둘러보았다. 태어난 이후 쭉 지내던 곳이었다. 막상 떠나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감상에 젖어 있을 때는 아니지만.

16550803234882.jpg“폐하.”

이블린의 말간 눈이 바스티안에게 향했다.

16550803234882.jpg“아까 공작가의 비밀을 말씀드린 대가로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신다고 하셨지요.”

16550803234876.jpg“그래, 말해 봐.”

바스티안이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이 과연 무엇을 요구하려고 저런 꾀를 부렸나 궁금했다.

16550803234882.jpg“공작가 식솔들 몇을 황궁으로 데려가도 될까요?”

16550803234876.jpg“이런, 이블린. 그게 뭐 어려운 부탁이라고.”

바스티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16550803234876.jpg“말했잖아, 그대가 해달라는 건 뭐든 다 들어줄 거라고.”

16550803234882.jpg“……아, 네, 그러셨지요.”

이블린이 떨떠름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쨌든 흔쾌히 허락해주니 다행이었다.

16550803234882.jpg“감사합니다, 폐하.”

이블린은 그냥 미소만 짓기로 했다. * * *

16550803289652.jpg“공녀님, 이제 출발하셔도 됩니다.”

16550803234882.jpg“빨리 끝났네.”

16550803289652.jpg“네, 좀 서둘렀지요.”

마차 문을 열고 올라온 알리에타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아직 환자 행세 중인 이블린이 먼저 마차에 올라 기다리는 동안, 공작가의 식솔들은 알리에타의 주도하에 황궁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이미 부친의 눈 밖에 난 이들을 골라 황궁으로 데려갈 참이었다.

16550803234882.jpg“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명 잘했어?”

16550803289652.jpg“네, 공작가를 떠나기 원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공녀님께서 추천서를 써주실 거라고 했어요, 그전까지는 마을 여관에서 지내라고 말해두었고요.”

16550803234882.jpg“고생했어, 알리에타.”

저택으로 돌아온 부친이 고용인들에게 해코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16550803289652.jpg“고생은요, 그럼 공녀님. 이따 황궁에서 뵐…….”

16550803289652.jpg“공녀니, 고, 공녀님!”

알리에타가 문손잡이를 붙잡을 때였다. 멀리서 울부짖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16550803289652.jpg“공녀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요!”

16550803234882.jpg“……에바?”

창틈으로 살짝 보니 옷도 추스르지 못한 채 뛰어오던 에바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는 게 보였다.

16550803289652.jpg“아니, 의원에서 치료부터 받으라니까는 왜…….”

16550803234882.jpg“알리에타.”

난처한 얼굴로 마차를 빠져나가려는 알리에타를 이블린이 붙잡았다.

16550803234882.jpg“폐하, 저 아이까지 데려가도 될까요?”

제 곁에서 떨어지면 또 다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건지도 몰랐다.

16550803234876.jpg“그대가 원하는 대로.”

16550803234882.jpg“감사합니다, 폐하.”

16550803289652.jpg“감사합니다.”

이블린의 눈짓에 같이 고개를 조아린 알리에타가 마차를 벗어났다. 그리고 알리에타를 지나친 보레아가 마차의 창문으로 다가왔다.

16550803289652.jpg“단장님,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16550803234882.jpg“그 물건들을 다 옮길 때까지는 공작가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붙잡아 둬요. 아직 아버지에게 소식이 전해져서는 안 돼요.”

16550803289652.jpg“네, 알겠습니다.”

16550803234882.jpg“그리고 보레아.”

잠시 생각하던 이블린이 보레아를 붙잡았다.

16550803234882.jpg“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신문기사를 크게 내줘요.”

16550803289652.jpg“네, 어떤 내용입니까?”

16550803234882.jpg“티에르 공녀가 황궁으로 들어갔다는 내용과 함께, 공작가의 지참금이 기대된다는 걸 강조해서요.”

16550803234876.jpg“……?”

내용을 들은 바스티안이 의외라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이블린은 공작가를 턴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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