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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제 진짜 시작이야 (19/95)

19. 이제 진짜 시작이야2021.12.05.

1655080356161.jpg“네, 알겠습니다.”

이블린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보레아가 한발 물러서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16550803561615.jpg“일이 전부 끝나면, 누군가 아버지에게 알리러 가는 것까지 확인하도록 해요. 그다음에 황궁으로 복귀하고. 무엇보다, 오늘 공작가에서 벌어진 일은 밖으로 얘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원들에게 함구시켜요.”

1655080356161.jpg“네, 걱정 마십시오.”

16550803561615.jpg“잘 부탁해요, 보레아.”

1655080356161.jpg“네!”

멀어지는 보레아의 뒷모습을 보던 이블린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어스름한 새벽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밤새 그녀의 사정에 맞춰 움직여 준 기사단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블린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를 확인한 바스티안이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1655080356163.jpg“이블린, 정말 그 기사를 낼 거야?”

부드럽게 출발한 마차가 공작가를 벗어날 때쯤,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16550803561615.jpg“네, 너무 치사한가요?”

1655080356163.jpg“아니, 재미있을 것 같아.”

이블린의 머쓱한 물음에 바스티안이 웃음기를 띄우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080356163.jpg“다만, 그대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해서.”

16550803561615.jpg“폐하께서 가르쳐주셨잖아요, 너무 꼿꼿하기만 해도 안 된다고.”

1655080356163.jpg“좋아. 훌륭한 학생이군, 가르친 보람이 있네.”

16550803561615.jpg“……네, 뭐…….”

씩 웃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이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어쩌다 보니 그의 말을 핑계 삼은 것 같아 민망했다. 공작가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서자 바스티안이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사선으로 이블린의 얼굴을 비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창밖의 풍경으로 향했다.

1655080356163.jpg“며칠 내내 정신없었어, 그렇지?”

16550803561615.jpg“네, 정말 그랬네요.”

스캔들이 터진 후부터 지금까지.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일이 워낙 많았던 탓에 꽤 긴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1655080356163.jpg“이제 본격적으로 우리의 계약을 이행할 때가 됐네.”

16550803561615.jpg“…….”

바스티안의 말에 이블린은 마음이 덜컹거렸다. 창에서 시선을 거둔 이블린이 맞은편의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황제는 정말 예상치 못했던 지원군이었다. 덕분에 혼자 오래도록 준비해 온 계획을 실행하게 됐고. 그녀가 평생 충성해야 할 상대. 본의 아니게 그런 상대와 계약 관계로 묶이긴 했지만, 잠깐 마음이 불편한 건 무시하기로 했다. 만약 그가 계약에 충실히 임해주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선택으로 남게 될 테니까.

16550803561615.jpg‘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야.’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이블린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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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80356161.jpg“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16550803590541.jpg“나야말로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응해줘서 고맙게 생각하오.”

1655080356161.jpg“하하, 그간 너무 격조하긴 했습니다. 이렇게 뵈니 좋군요.”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은밀하게 숲에 모인 이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모인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돈은 많지만, 아직 귀족 사회에 녹아들지 못했거나, 고위 귀족이었으나 가문이 몰락하며 중앙에서 밀려났거나. 그리고 그가 뒤를 봐줘 귀족회의에서 발언권을 가지게 됐거나.

16550803590541.jpg“일단 안으로 더 들어가시지요. 아침을 준비해놨으니, 빈속이라도 채우며 더 안부 나눕시다.”

참석한 이들을 면면히 살핀 공작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투레질한 공작의 말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자 그 뒤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움직였다. 낑낑대는 사냥개들과 팔에 매를 얹은 사용인들까지, 은밀한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였다. . .

1655080356161.jpg“이곳은 언제 와도 풍경이 좋군요.”

말에서 내린 알피도 자작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감탄했다. 앞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물가이고, 뒤로는 그들이 지나쳐 온 숲이었다. 잔잔한 강 위로 물새들이 먹이를 먹고 깃을 고르며 한가로이 떠다녔다.

16550803590541.jpg“편하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최적의 장소이지요. 선대 공작께서 여길 내버려 두던 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티에르 공작이 찻잔으로 손을 뻗으며 응수했다.

16550803590541.jpg“일단 따뜻한 차라도 드시지요들.”

눈치껏 다가온 시종 하나가 공작의 찻잔을 채웠다. 손님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이 떴다. 모슬린 천이 깔린 기다란 테이블 위에 준비된 음식이 화려했다. 깊숙한 숲속에서 먹는 아침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귀한 이를 대접할 때나 내놓는 요리들이었다.

1655080356161.jpg“공작님 덕분에 모처럼 호사를 누립니다.”

1655080356161.jpg“티에르 공작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베푸시니 그저 존경할 따름입니다.”

1655080356161.jpg“그러게 말입니다, 선대 티에르 공작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교묘하게 선대를 비난하며 지금의 공작을 치켜세우는 말이었다. 흡족해진 티에르 공작의 얇은 수염이 씰룩였다.

1655080356161.jpg“그나저나, 최근 공작가에 기쁜 소식이 있지 않았습니까? 예상은 했지만, 역시 티에르 가에서 황후가 나오려나 보군요.”

적당히 대화가 무르익었을 즈음, 알피도 자작이 운을 뗐다. 공작이 황제와 묘한 기 싸움을 벌인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는 황제의 장인 자리를 꿰찼다.

16550803590541.jpg“뭐, 그렇게 됐습니다. 부끄럽군요. 내가 딸 아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봅니다.”

1655080356161.jpg“어휴, 젊은 남녀가 그럴 수도 있지요. 손이 귀한 황실의 첫 아이인데,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1655080356161.jpg“맞습니다. 기사를 보니 폐하께서 공녀를 무척 아끼시는 것 같던데요.”

16550803590541.jpg“하하, 딸 아이가 몸이 약해서 걱정이 큽니다.”

누군가의 말에 티에르 공작이 민망하다는 듯 연신 턱을 쓸었다.

16550803590541.jpg“호위기사단장이라는 중책까지 맡아놓고서, 임신이라니. 그저, 아버지로서, 또 황실의 신하로서 부끄럽지요.”

1655080356161.jpg“어휴, 기사단장직이야 다른 이에게 넘기면 그만이지요. 이제는 결혼식 준비만으로도 바쁘지 않겠습니까?”

16550803590541.jpg“……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원하는 반응이 알아서 나오고 있었다.

16550803590541.jpg“참, 후작의 아들이 이번에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했다지요?”

1655080356161.jpg“아, 네, 똑똑한 녀석은 아니지만, 검술은 또 그럭저럭…….”

16550803590541.jpg“다른 누구보다 후작가에서 단장직을 맡아주면 또 마음이 든든하겠군요.”

1655080356161.jpg“물론 저희 가문도 황실에 충성을 다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단장직은 아무래도 디에스티 공작가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거기 차남이 또 황궁 근위대장으로 있기도 하고요.”

후작의 볼멘소리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충성은 그럴듯한 핑계일 뿐이고, 결국 기존의 권력 관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거였다.

16550803590541.jpg“제국도 슬슬 변화할 때가 되었지요. 안 그렇습니까, 후작?”

기다렸다는 듯 티에르 공작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1655080356161.jpg“그렇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있어요, 귀족 사회와 황실만 바라보던 옛날과는 다르지요.”

1655080356161.jpg“암, 기술은 발전하고 있는데 여전히 정령술 같은 것에만 의지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1655080356161.jpg“사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제국이 쇠락하고 있다는 건 이미 선황 때부터 느껴온 바 아닙니까. 전에 없던 자연재해가 발생하기도 하고, 흉년이 드는 지역도 생겨난다지요.”

16550803590541.jpg“크흠.”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던 공작이 적당한 때에 끼어들었다.

16550803590541.jpg“고인 물이 썩는 것은 당연하고, 새로운 물꼬를 터주는 게 우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그게 진정한 충심이지요.”

감히 황권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도는 없다. 이미 기존에 만들어진 권력을 뺏고 싶을 뿐. 같은 목적이 있는 한, 이들은 티에르 공작에게 꼭 필요한 장기 말이었다. 마른 장작이 잘 모였으니, 이제는 작은 불씨 하나만 떨어트려 주면 알아서 활활 타오르게 될 터.

1655080356161.jpg“그렇습니다, 황후도 티에르 가문에서 나왔으니 공작께서 현명하게 폐하를 보필하시면 될 일입니다.”

1655080356161.jpg“젊은 황제에게는 이끌어 줄 충신이 필요한 법이지요.”

16550803590541.jpg“여부가 있겠습니까. 자, 그럼. 본격적으로 여흥을 즐겨 볼까요? 다들 오늘의 목적을 잊지 않으셨지요?”

수염 끝을 꼬아 만진 공작이 고개를 틀어 시종에게 눈짓했다. 사냥을 시작하라는 신호에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른 매들이 쏜살같이 날아가 물새를 낚아챘다. 하늘을 어지러이 오가는 새떼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더없이 탐욕스러웠다. 웡웡! 사냥감을 기다리는 사냥개들이 요란하게 짖기 시작했다. * * *

1655080356161.jpg“세상에, 내가 황궁까지 오게 될 줄이야.”

짐수레에서 내린 하녀들이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1655080356161.jpg“어허, 다들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했거늘.”

1655080356161.jpg“앗, 하녀장님.”

1655080356161.jpg“명심해, 공녀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모든 행동거지를 신경 써야 한다.”

16550803680961.jpg“네.”

알리에타가 신이 나서 달려가는 어린 하녀들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봤다. 어린 하녀들에게 면박을 주긴 했지만, 긴장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공작가에서 오래 일했지만, 이블린이 결혼하고 나면 은퇴하고 고향으로 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황궁이라니.

1655080356163.jpg“알리에타?”

1655080356161.jpg“……폐하!”

무심코 뒤를 돌아본 알리에타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황제가 먼저 아는 척을 해올 줄은 몰랐던 터라 당혹스러웠다.

1655080356163.jpg“오랜만이야.”

1655080356161.jpg“……황송합니다.”

살짝 몸을 든 알리에타가 어색하게 웃었다.

1655080356163.jpg“어릴 때 그대가 만들어 주던 푸딩 꽤 맛있었는데. 아쉽군, 이블린의 앞에서 아는 척할 수는 없으니.”

바스티안이 씩 웃으며 속삭였다. 알리에타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1655080356161.jpg“……기회가 되면 또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1655080356163.jpg“기대하지. 황궁 생활에 대한 건 저기 오는 다베르 후작과 나누도록 해.”

말을 마친 바스티안이 휭하니 사라지고, 혼자 남은 알리에타는 겨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어릴 적, 공작가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황제는 이블린의 사고 이후 발길을 끊었다. 기억을 잃은 이블린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서였다. 그 일을 계기로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알리에타를 제외하고는 전부 바뀌었고, 두 사람의 접점을 기억하는 이도 그녀 혼자였다. 어렸을 때 모습은 사라지고 서늘한 군주의 모습이 된 황제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그가 어렸을 때도 어린 애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16550803708581.jpg“그쪽이 알리에타인가?”

1655080356161.jpg“네, 후작님. 제가 알리에타입니다.”

푸딩이나 만들어 볼까 생각하던 알리에타가 머리를 조아렸다.

16550803708581.jpg“황궁에 온 걸 환영하네, 지금부터 황제궁 안내를 해주겠네.”

1655080356161.jpg“후작님께서 직접이요?”

16550803708581.jpg“앞으로 그대가 하녀장 역할을 맡아서 하게 될 거야. 폐하께서는 곁에 사람을 많이 두시지 않으니, 사실상 시녀장 역할까지 하게 되겠지.”

1655080356161.jpg“……네?”

뭐 이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다 있나! 생각지 못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알리에타가 사색이 됐다.

16550803708581.jpg“폐하의 명일세. 황제궁 우측으로 가면 사용인들의 숙소가 나오고, 이쪽으로 가면 만찬장과 그 뒤로 부엌이 있고…….”

1655080356161.jpg“아이고, 잠, 잠시만요.”

군더더기 없이 빠른 속도로 설명을 잇는 후작에 알리에타는 놀란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었다.

16550803708581.jpg“……이쪽으로 가면 연무장과 기사단 숙소가 있네.”

1655080356161.jpg“저, 그런데, 후작님.”

16550803708581.jpg“뭔가?”

1655080356161.jpg“우리 공녀님, 그러니까 단장님은 앞으로 어디서 머물게 되시나요? 허락하신다면, 단장님이 지내실 곳을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직 결혼 전이니 황후궁은 아닐 테고. 알리에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803708581.jpg“그것이…….”

다다다 말을 쏟아내던 후작이 말끝을 흐리며 황제의 침실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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