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한 침대를 쓰는 사이2021.12.08.
알리에타가 이블린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그 시각.
“…….”
이블린은 황제의 응접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갑작스레 황궁으로 오게 된 식구들이 신경 쓰였지만, 아직은 환자 흉내를 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슬슬 정오가 되어가고 있는데.’
공작가는 다 정리가 됐을까. 비밀 공간에 있던 건 다 빼 왔을까. 부친은 언제쯤 소식을 들을까. 오단에게 내린 지시는 얼마큼 진행되었을까. 혼자 생각하며 꼬리의 꼬리를 무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폐하.”
방의 주인을 본 이블린이 벌떡 일어섰다.
“이블린? 왜 거기 있어, 좀 쉬지 않고.”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엉거주춤 선 모습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바깥이 신경 쓰여서요.”
“걱정 마, 다베르가 잘 안내해줄 거야.”
“그렇군요.”
이블린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본의 아니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후작에게 떠넘겨버린 셈이었다.
“왜, 아픈 척하고 있으려니까 답답해?”
“아닙니다, 아픈 척하는 데는 전문이라서요.”
이블린의 덤덤한 대답에 바스티안의 웃음이 샜다. 동그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걸 보니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그럼 다른 생각 같은 건 못 하게 해줘야지.
“이블린.”
“네, 폐하.”
응접실을 가로질러 다가온 바스티안이 테이블 하나만을 사이에 둔 채 멈춰 섰다.
“우리의 약속, 잊지 않았지?”
바스티안이 입꼬리 끝을 짓궂게 끌어 올렸다.
“약속이라면…… 아.”
기억을 끄집어낸 이블린이 작게 탄식했다.
“황궁에 오면, 내 침실에서 지내기로 했지.”
한 번 더 상기시킨 바스티안이 웃음을 참았다. 곤란해하거나, 정색하거나. 이블린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역시나 난감하다는 듯 이블린의 눈동자가 스르륵 옆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뭐라고 대답하려나.’
이블린이 또 어떤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가 샘솟았다. 과연 이블린은 무슨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할까. 하지만…….
“알겠습니다, 폐하.”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어?”
“앞으로 여기서 지낼게요.”
“…….”
처음으로 바스티안의 말문이 막혔다. . .
“폐하, 집무실로 가시는 겁니까?”
“아, 다베르. 새로운 손님들은 잘 맞이했나?”
황제궁을 막 빠져나가던 바스티안이 곁으로 다가온 다베르를 보며 느긋하게 물었다.
“네, 나머지는 하녀장이 알아서 할 겁니다.”
“알리에타 말이군.”
“폐하의 명을 따르기는 했습니다만, 괜찮을까요? 아무리 폐하께서 그간 황제궁을 방치하셨다 해도, 공작가의 살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텐데요.”
“지금 나 일 안 한다고 비꼬는 거지?”
“그럴 리가요.”
다베르가 뻔뻔한 얼굴로 바스티안의 시선을 받아냈다.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선하고, 현명해. 그 까탈스러운 선대 티에르 공작이 오래도록 공작가에 둔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고 맡기도록 해.”
“네. 그런데 폐하, 공작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이블린의 편지를 받자마자 호위기사 몇만 데리고 휙 가버린 바스티안이 돌아올 때는 몇 배의 인원을 데리고 왔다. 게다가 그 정체불명의 황금과 무기는 또 무엇이며.
“……궁금해?”
“아닙니다.”
바스티안의 웃음기 없는 미소를 본 다베르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꽤 오랜 시간 바스티안을 보필하며 신뢰를 얻었고, 이제는 그의 보좌관으로 모든 걸 관리하고 있지만, 그의 상관은 한 번씩 냉정하게 선을 그을 때가 있었다.
‘아직은 아닌가.’
바스티안의 온전한 신뢰를 얻으려면 얼마나 더 시간을 들여야 할까.
“그나저나, 단장이 이렇게 빨리 황궁으로 올 줄 알았다면 작업을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다베르가 속마음을 묻으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황제의 명에 따라 황제궁에 이블린이 지낼 곳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아, 그거.”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공간은 준비되었으니 이제 가구와 필요한 물품만 채워 넣으면 끝이었다.
“괜찮아, 서두를 필요 없어. 계획대로 해.”
“그럼 그동안 단장은 어디서 지냅니까.”
“내 침실.”
“……네? 단장이 그러겠답니까?”
늘 태연하던 다베르도 이번만큼은 놀라 걸음을 멈췄다. 다베르의 놀란 표정을 본 바스티안이 혀를 찼다. 조금 전, 이블린의 대답을 들었을 때 자신의 모습이 저랬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렇게 됐으니까, 하녀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침실에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해.”
“……네.”
본궁으로 가는 정원을 가로지르며 바스티안은 아직 쨍쨍한 한낮의 해를 바라봤다. 밤이 오려면 아직 멀어 보였다.
“폐하, 불편하시겠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던 이블린이 생각났다. 불편하시겠지만, 이라. 음…… 뭐가 불편할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앞으로 잠은 잘 수 있을까? 바스티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공녀님, 자꾸 손이 떨려요.”
이블린의 어깨에 물을 끼얹은 알리에타가 긴장한 자라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베르에게 몇 가지 안내를 받고, 함께 온 고용인들에게 숙소를 배정하자마자 이블린에게 달려온 참이었다. 밤새 쉬지도 못했을 이블린을 씻겨주고 잠시나마 쉬는 걸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무려 황제의 침실이라니!
“사실, 나도 여기서 씻으니까 좀…… 어색하기는 해.”
욕조 안에서 몸을 웅크린 이블린이 중얼거렸다. 호위기사단장으로서 바스티안의 침실에 드나들 때와는 기분이 전혀 달랐다. 그래도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대답한 건, 각오를 다지는 차원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황제와의 계약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황제가 계약을 파기하지 않게 하려면, 그녀 또한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나을 것 같았고.
“그런데, 공녀님. 정말 이 방에서 지내시려고요?”
“아, 응. 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괜찮으시겠어요? 당장 오늘 밤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게 나도 고민이야. 이블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넓으니까.”
“그, 그렇긴 하지요. 공작가보다 훨씬 화려한 것이, 역시 황궁이다 싶긴 해요.”
알리에타의 속삭임에 이블린이 쿡쿡 웃음을 흘렸다.
“폐하께서 하녀장을 맡기셨다며?”
“어휴, 말도 마셔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유모는 잘 해낼 거야.”
“후후, 다른 것보다, 공녀님 출근하시고 나서도 가까이에 있다는 게 마음이 놓여요. 황궁에서도 종종 뵐 수 있을 테니까요.”
“위험한 건 하지 말고, 유모가 해줄 건 하나뿐이야. 황제궁에 드나드는 사람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거. 사람뿐만 아니라, 음식, 물품, 모든 걸.”
“걱정 마세요, 그거야 늘 공작가에서 하던 거니까요.”
“응, 솔직히 유모가 함께 와줘서 든든해.”
“네, 공녀님 가는 데는 다 따라갈 겁니다.”
이블린의 손을 꼭 쥔 알리에타가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서두르자, 유모. 오후에 할 일이 많아.”
울컥하는 마음을 참고 배시시 웃은 이블린이 얌전히 알리에타의 손에 몸을 맡겼다. . . 알리에타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씻고 기사단복으로 갈아입은 이블린이 응접실 테이블 위에 장부를 올려놓았다. 부친의 집무실에서 적어 온 서류였다. 알리에타는 업무를 익혀야 한다며 서둘러 떠났고, 모처럼 혼자가 되었으니 조금 더 면면히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돈이 흘러간 흔적을 보면 부친의 목표와 계획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매 20마리? 돈을 물 쓰듯 쓰셨구나.”
장부를 보던 이블린의 눈썹이 구겨졌다. 매는 들어가는 식비가 커서 귀족들도 쉽게 누릴 수 없는 사치품에 가까웠다. 농민들을 생각해 자제하라는 황실의 권고가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티에르 가문의 사람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그가.
“정말…… 너무하시지 않나요, 아버지.”
이블린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답함을 토해냈다. 집무실에서 대략 훑어봤을 때도 짐작했지만, 사교 모임에 쓰이는 돈이 많았다.
“반쪽짜리 티에르 공작 취급을 받더라도, 어딜 가든 아쉽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사실 텐데.”
아무래도 부친의 욕심은 더 높은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조금 이상했다. 어쨌든 명목상 가주인 그가, 왜 영지에서 들어오는 세금이나 상납물을 이중장부까지 만들며 빼돌리는 건지. 그렇게 돈을 모아서 쓸 곳이 있는 건가? 문득 궁금해졌다.
“단장님, 오단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골똘하게 생각하던 이블린이 손님을 맞았다.
“공작가에서 철수한 기사단이 방금 황궁으로 복귀했습니다.”
“다들 고생 많았네요. 오늘 오후 훈련은 빼주고, 푹 쉬게 해요.”
“네, 그리고 말씀하셨던 상단과 길드 목록입니다.”
“벌써? 고마워요.”
서류를 건네받은 이블린이 천천히 목록을 훑었다. 알피도 자작.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부친의 장부에서 자주 보인 상단의 주인이었다.
“알피도 자작이라면, 북부를 기점으로 상단을 시작한, 그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태생이 귀족은 아닙니다, 슈라우츠 공국 출신이거든요. 어릴 때 제국으로 넘어왔고, 알피도 자작가의 딸과 결혼하며 작위를 얻어 상단을 키웠습니다.”
배경까지 완벽하게 부친의 입맛에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부친의 손이 뻗은 자잘 자잘한 길드를 건드려봐야 시간 낭비였다. 가장 부친이 공들인 어장을 건드리는 게 낫지.
“……알피도 자작을 만나봐야겠어요.”
“네, 약속을 잡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단, 여기, 여기랑…… 또 여기 길드에다가 사람 하나를 찾아달라고 의뢰를 넣어줘요.”
부친과 거래가 있는 길드를 골라 짚어 준 이블린이 빈 종이에다 휴이터가 전해준 마차 사고 목격자의 정보를 적어 오단에게 건넸다.
“그리고 키르아에도 동일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의뢰를 넣되, 지금 말했던 길드의 움직임을 주시하라는 의뢰도 함께 넣어줘요.”
“네, 알겠습니다.”
“오단.”
“네, 단장님.”
“키르아는 믿을 만한 곳이겠죠? 필요하다면 내가 길드장을 직접 만나볼까 하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의 명으로 몇 번 이용한 곳이기도 하고, 검증된 곳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정보가 모이는 대로 전해줘요.”
반쯤 경계심을 내려놓은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밤하늘이 어둑해질 무렵. 티에르 공작가의 마차가 시골길을 빠른 속도로 달렸다. 달레나 영지에서 공작가까지는 마차로 반나절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빠듯한 일정에 피곤했지만, 공작의 기분은 꽤 괜찮았다.
“돈을 들인 보람이 있군. 귀족 회의가 기대돼.”
오늘 사냥 모임은 대성공이었다. 공작이 흐뭇하게 눈을 감을 때였다. 다그닥다그닥 요란하던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공작님.”
곧 마차가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인가?”
“공작가에서 보낸 이와 마주쳤습니다. 공작님께 급히 보고드릴 게 있다고요.”
“보고? 그게 뭐지?”
미소를 지운 공작이 불안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