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움켜 쥔 옷자락2021.12.12.
“뭐?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음식에 장난질이라니?”
공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은 공작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지시를 내린 적도 없거니와, 그걸 핑계로 기사단원들이 저택을 수색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공작가를 비우는 때를 기다렸군.’
이로써 이블린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건 확실해진 셈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호위기사단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뭐라도 된 줄 착각하는 모양이군.”
뭐라도 해보겠다며 꿈틀대는 노력이 가상하긴 하다만. 어차피 저택을 샅샅이 뒤졌어도 이블린이 건진 건 없었을 거다. 중요한 걸 거기다 둘 리도 없고, 몇몇 장부가 있긴 하지만 암호처럼 써놓았으니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을 터.
“그래서, 이블린은 황궁으로 들어갔다고?”
문제는 이블린이 황궁으로 갔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찝찝하다는 거였다. 황제와 붙어 무슨 짓을 벌일까, 역시 시야에 두어야 하는데.
“네, 아침에 폐하와 함께 떠났습니다. 고용인들도 거의 다 내보낸 탓에 공작가는 거의 텅 비어 있고요.”
“뭐야?”
“몇몇은 직접 황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황궁으로?”
벌컥 짜증을 내려던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그 아이는?”
“그 아이라면…… 아, 함께 황궁으로 갔습니다.”
“그래? 그럼 됐어.”
그제야 안심한 공작이 미소를 되찾았다.
* * *
“잠깐.”
바스티안이 곧장 침실 문을 열려는 호위기사를 만류했다. 최대한 업무를 빨리 끝내고 올 생각이었는데, 밤이 깊어서야 일이 끝나고 말았다. 직접 손잡이를 잡은 바스티안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늘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공간인데, 안에 이블린이 있다고 생각하니 오늘따라 기분이 새로웠다.
“이브…….”
이블린을 부르려던 바스티안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이블린이 보였다. 놀라서 가까이 다가간 바스티안은 픽 웃어 버렸다. 잠깐 쉬려다 잠이 든 건지, 머리는 쿠션에 기대고 다리는 의자 밑으로 내린 불편한 자세였다. 심지어 손에 펜을 쥔 채로.
“괜한 걱정을 했군.”
누가 어디서 자느냐를 가지고 입씨름할 미래를 상상하며 왔는데, 조금 허탈하기도 하고. 쿡쿡 웃던 바스티안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종이로 향했다.
‘편지?’
바스티안은 이블린이 아직 완성하지 못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걸 보니, 슬슬 대외활동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테이블 한쪽에는 아직 뜯지 못한 편지가 수북했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사교 활동으로 바빴을 터.
‘흠, 필체도 꼭 본인 같네.’
삐져나간 곳 없이 깔끔한 필체가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도 잘 알지만. 편지를 내려놓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에서 펜을 살짝 빼냈다.
“…….”
힐끗 쳐다보니 이블린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하긴, 피곤한 하루였을 거다. 깨우는 대신, 이블린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안을 때마다 긴장하며 뻣뻣해지고는 했는데, 잠이 든 탓인지 가볍기만 했다.
‘아무래도 더 먹여야겠군.’
바스티안은 아침 메뉴를 고민하며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주는 순간까지도 이블린은 깨지 않았다. 바스티안은 곤히 잠든 이블린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동그란 이마로 한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이 마치 달빛 같았다.
“……예쁘네.”
응, 역시 예뻐. 내 곁에서 이렇게 늘 편안했으면 하는 바람은, 욕심인 걸까. 어떨까, 이블린. . .
“으음.”
몸을 뒤척이던 이블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침실?’
분명 응접실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 이블린이 곧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침대 바로 옆으로 누군가의 다리가 길게 뻗어져 있었다. 시선을 올리자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잠이 든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황제의 조각 같은 얼굴이 더욱 서늘했다.
‘왜 여기에…… 아.’
곧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린 이블린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설마, 나 때문에 저렇게 자고 있는 거야?’
이블린이 바스티안에게 손을 뻗다 말고 멈칫했다. 그렇지, 함부로 흔들어 깨울 상대는 아닌데.
“……폐……!”
목소리를 내려던 이블린의 뇌리에 불현듯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곧장 제 옷차림부터 확인한 이블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생일 연회 때처럼 흐트러진 차림은 아니었다.
“폐하.”
목을 흠흠 가다듬은 이블린이 점잖은 목소리를 냈다. 바스티안은 반응이 없었다. 역시 흔들어 깨워야 하나.
“……폐하?”
이블린의 손끝이 바스티안의 팔에 막 닿으려던 때였다. 강한 힘이 이블린의 손목을 낚아챘다. 흡사 야생의 짐승 같은 속도였다.
“폐하, 이블린 티에르입니다.”
“아.”
손의 힘을 푼 바스티안이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제가 멋대로 침대를 차지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이블린이 손을 빼내며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괜찮아,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야.”
“잠깐 쉰다는 게…….”
“더 자도록 해.”
“…….”
폐하께서 옆에 계시는데 잠이 올까요. 이블린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챈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잠 안 올 것 같으면, 산책이나 할까?”
“……네.”
이블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블린이 먼 곳을 응시했다. 침실 테라스에서는 황제궁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넓은 정원을 비추는 환한 달빛이 퍽 운치 있게 느껴졌다.
“꿀차야.”
“아, 감사합니다.”
이블린은 바스티안이 건넨 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달달한 아카시아 꿀 향이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잠이 안 오면 마시고는 했는데. 모처럼 추억에 젖는 기분이라 이블린은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응시했다.
“어때, 앞으로 지낼 만하겠어?”
“조금…… 낯설긴 합니다.”
“어쩐 일로 솔직하네.”
“…….”
대답 없이 조용히 차만 홀짝이는 이블린을 보며 피식 웃은 바스티안이 시선을 옮겼다.
“슬슬 사교계에도 나설 생각인 것 같던데.”
“아, 네.”
편지를 본 모양이라 생각하며 이블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안 그래도 그 일로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게 뭐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콧잔등을 매만지는 이블린이 귀여웠다.
“원래는 공작가에서 티파티를 열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레 황궁으로 오는 바람에…….”
“그런 것까지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돼. 이제 그대의 공간이기도 하니까. 하녀장과 의논해, 다베르에게 물어도 좋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면 썩 기쁘지 않은데.”
이제는 바스티안이 요구하는 게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고마워요.”
씩 웃는 황제를 보니 역시 정답이었다.
“좋아. 또 필요한 건?”
“연무장……이요.”
이때다 싶어 이블린은 가장 원했던 걸 말했다. 검술 연습을 할 장소가 있으면 좋겠어요. 기사단도 제가 임신한 줄 알고 있으니, 거기서 함께 끼어 훈련하기도 좀…….” 가짜 임신인 걸 아는 사람은 알리에타와 다트, 다베르 후작과 휴이터까지 넷뿐이었다.
“검술 연습? 할 필요가 있어?”
“폐하, 저는 호위기사단장입니다.”
이블린은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한 것 같지만, 구겨진 미간에서 불쾌함이 드러났다.
“아시다시피 대대로 티에르 공작은 제국 최강의 검이라는 찬사를 들어왔고요, 제가 여자라서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알지, 그놈의 티에르 습성. 고집이랄지 뚝심이랄지.
“혼자 훈련할 건 아니잖아. 근위대장과 훈련하려고?”
“……허락, 해주시면요?”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이블린에 바스티안의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그렇다면, 내가 훈련 상대가 되어주지.”
“네?”
“기억 안 나? 요 몇 달 간 내가 그대의 훈련을 꽤 많이 도왔던 것 같은데.”
“!”
이블린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기억하고 말고요. 그야말로 개처럼 굴렀지요. 아침마다 연무장을 뛰기도 하고, 갑자기 산을 타기도 하고. 덕분에 체력이 얼마나 늘었다고요?
“자, 잠시만요, 폐하.”
“왜, 최강의 검이 되겠다며? 아, 내 검술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좋아, 지금부터 해 뜰 때까지 대련해볼까?”
“아, 안 돼요. 오늘 해야 할 일정이 많습니다, 폐하!”
이블린이 당장이라도 정원으로 뛰어내릴 것 같은 바스티안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다급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래?”
바스티안이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움직였다. 이블린이 더욱 옷자락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이블린과의 거리감이 한 1mm 정도는 줄었으려나. 흡족해진 바스티안이 한 걸음 물러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좋아, 훈련은 다음으로 하고. 곧 나올 신문이나 기다리자고.”
달밤의 고생길이 열리는 걸 막아낸 이블린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한숨 돌리고 나니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신문 기사를 기다리는 황제를 보니 더욱 그랬다. 물어봐? 말아? 이제는 물어봐도 될 것 같은데.
“……폐하.”
“응.”
“폐하께서는…… 제 부친이 탐탁지 않으신가요?”
“아, 정확히 봤어.”
조심스러운 질문과 달리 명료하고 흔쾌한 대답이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음.”
바스티안이 턱을 쓸었다.
“그대를 괴롭히는 이들은 다 싫어.”
“……네?”
“자, 공작이 우리에게 줄 선물이 뭘지 기대해보자고.”
바스티안이 찻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 * * 아침이 되어서야 공작가로 돌아온 티에르 공작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처럼 정돈되어 있긴 하지만, 미묘하게 달라진 곳들이 보였다.
‘역시 이곳까지 건드렸군.’
없어진 게 있는지 집무실과 제 침실까지 확인한 공작이 그제야 외투를 벗었다.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안락의자에 앉은 공작이 어깨를 주무를 때였다.
“공작님.”
“뭐야.”
휴식을 방해받은 공작이 날카롭게 눈을 흘겼다.
“오늘 신문입니다. 보셔야 할 것 같아서…….”
“신문?”
보좌관이 건넨 신문을 낚아챈 공작의 뱀 같은 눈이 굵은 활자로 향했다. [티에르 공녀, 드디어 황궁 입성] 혀를 찬 공작이 신문을 펼쳤다.
“…….”
공작의 눈동자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티에르 공작가의 지참금은 얼마일까]
‘지참금!’
[현 황제와 제국 최고의 가문인 티에르 가문 공녀의 결혼. 결혼 당사자의 위치만큼이나 지참금 규모도 역사에 기록될 만큼 클 것으로 보인다. 지독한 딸 사랑으로 유명한 티에르 공작이기에 더더욱 기대되는바. 티에르 가에는 특히나 좋은 영지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제국에서 가장 비옥하기로 소문난 에버너, 아름다운 숲과 강으로 유명한 달레나 영지 등. 공작이 어떤 영지로 딸 사랑을 증명할지 궁금하다.]
“이걸 노린 거였어!”
공작이 신문을 와락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