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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황제의 마음 (22/95)

22. 황제의 마음2021.12.15.

16550804350331.jpg“이블린, 피곤하면 가서 자도록 해.”

집무실 입구 쪽을 힐끗 본 바스티안이 책상 위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이블린의 눈 밑에 거뭇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얀 피부 때문인지 누적된 피로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16550804350338.jpg“괜찮습니다.”

뻑뻑한 눈을 깜빡인 이블린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새벽 내내 바스티안과 담소를 나누다가 그대로 출근까지 이어졌다. 며칠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지 솔직히 피곤하긴 했다. 눈도 시큰거리고. 그래도 바스티안에게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16550804350338.jpg“전혀, 하나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16550804350331.jpg“…….”

다시 고개를 든 바스티안이 기가 찬다는 듯 이블린을 쳐다봤다. 애도 아니고, 한 번 더 강조하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작게 고개를 내저은 바스티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업무는 걱정하지 말고 침실에서 혼자 편히 자고 오라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면서 기어코 출근한 이블린이다.

16550804350331.jpg‘흠, 그간 너무 굴렸나.’

지난 몇 달간, 공작가로 퇴근할 때를 빼놓고는 늘 제 곁에 붙어 있게 했으니 이블린이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6550804350331.jpg“그럼 앉아서 차라도 한잔해.”

16550804350338.jpg“괜찮습…….”

16550804350331.jpg“그대가 그러고 있으면 나도 신경 쓰여서 일에 집중이 안 돼.”

16550804350338.jpg“……네.”

잠시 망설이던 이블린이 발을 뗐다. 지금 황제의 말은 권유라기보다는 지시에 가까웠다. 호위기사단장이란 자가 말이야, 그렇게 비실거려서 되겠어? 마음을 편하게 해줘도 모자랄 판에, 불편하게 해서 되겠냐고. 바스티안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쩐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이블린이 책상 정면에 있는 소파에 앉자 바스티안도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사람을 부르는 대신 직접 티포트를 집어 든 바스티안이 찻잔에 내용물을 한가득 따랐다. 차의 정체는 불면증에 도움이 되라며 다트가 지어준 약재였다. 보통은 그냥 차인 줄 알지만.

16550804350338.jpg“감사합니다.”

찻잔을 받자마자 향을 맡은 이블린은 고민에 빠졌다.

16550804350338.jpg‘꿀차인가. 꿀차 마시면 졸린데.’

나이를 먹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바스티안에게 털어놓자니 애처럼 보일 것 같았다. 이블린은 얌전히 마시기로 했다.

16550804350331.jpg“이블린.”

16550804350338.jpg“네, 폐하.”

차를 홀짝이는 이블린을 물끄러미 보던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16550804350331.jpg“공작에게 받고 싶은 영지가 따로 있어?”

이블린이 찻잔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출근하자마자 바스티안과 함께 신문기사를 확인한 후였다.

16550804350331.jpg“지참금 명목이지만, 그대에게 돌려줄게.”

  기사를 본 바스티안은 흔쾌히 선심을 베풀었다. 이쯤 되니 황제는 대체 이 계약을 통해 무슨 이득을 얻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16550804350338.jpg“글쎄요, 특별히 원하는 곳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공작가의 자금줄을 좀 조여볼까 싶었어요.”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영향력을 키우느라 매년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부친이었다.

16550804350338.jpg“씀씀이가 더 커지는 건 몰라도, 커진 씀씀이를 줄이는 건 힘든 법이니까요.”

어느 곳이든 물줄기를 막아 버리면, 그걸 메꾸기 위해서 무언가 다른 일을 벌일 수밖에 없으니까. 부친의 장부와 길드의 뒷조사만으로 알 수 없는 부친의 또 다른 계획이나 유착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부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돈인 것 같으니, 그걸로 복수하고 싶은 사소한 감정도 섞여 있었고.

16550804350331.jpg“공작이 어딜 내줄지 궁금하군. 개인적으로는 달레나 영지가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턱을 괴고 있던 바스티안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씩 웃었다. 어쭙잖은 영지를 내놓는다면 공작의 딸 사랑이 약하다거나, 속 좁은 짓을 한다며 욕을 먹을 테고. 비옥한 영지를 내놓으면 당장 큰 손해이니 속이 쓰릴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16550804350331.jpg“똑똑해, 이블린.”

16550804350338.jpg“……감사합니다.”

16550804350331.jpg“역시 호위기사단장이 아니라, 보좌관 자리를 내줄 걸 그랬나 봐.”

이블린이 움찔했다. 그는 농담이었겠지만, 다베르 후작이 들었으면 서운해하지 않았을까.

16550804350338.jpg‘계약서 이야기는 좀 더 나중에 하는 게 나을지도.’

너무 잇속만 취하려 드는 거로 보이면 곤란하지. 계약서를 다시 쓰자는 말을 꺼내려고 타이밍을 재는 중이었는데, 이블린은 조금 더 적절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16550804350338.jpg‘그나저나…… 졸리네.’

찻잔을 내려놓는 이블린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눈꺼풀이 무거워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블린의 고개가 점점 기울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16550804350331.jpg“……이런.”

가까스로 손을 뻗어 이블린의 머리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수면제 효과가 그리 강한 건 아닌데,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이블린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테이블을 성큼 넘어간 바스티안이 소파 위에 이블린을 눕히고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블린의 제복으로 손을 뻗다 말고 굳었다.

16550804350331.jpg“…….”

단추를 풀어줄까, 말까. 풀어주면 더 편하게 자긴 하겠지만, 분명히 깨고 나면 매섭게 노려보겠지? 짧은 고민 끝에 담요만 덮어준 바스티안이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16550804404886.jpg“폐…….”

16550804350331.jpg“조용.”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바스티안이 집무실 밖을 지키는 호위기사들의 입을 막았다.

16550804350331.jpg“지금부터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저쪽 응접실로 안내해. 집무실 근처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오게 하고. 노크도 하지 마. 내가 알아서 나올 테니.”

16550804404886.jpg“네, 폐하.”

16550804350331.jpg“…….”

당부를 끝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바스티안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인기척이 들린다 싶더니 썩 반갑지 않은 얼굴이 복도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16550804432405.jpg“폐하. 나와계셨습니까.”

휴이터 디에스티. 이블린을 웃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존재.

16550804350331.jpg“근위대장이 여기엔 무슨 일로, 날 만나러 온 건가?”

16550804432405.jpg“네, 그렇습니다.”

휴이터가 긴장감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처럼 황제는 서늘한 표정이었다.

16550804432405.jpg“……정확히는, 폐하와 티에르 단장을 만나러 온 겁니다.”

마른 침을 삼킨 휴이터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블린이 황궁으로 들어왔다는 기사를 본 참이었다. 실제로 황제궁 근처를 지나다가 익숙한 얼굴을 몇 명 보기도 했고. 이블린과 만나서 스캔들에 관해 대화한 게 고작 어제였다. 하루 사이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황당할 뿐이었다.

16550804350331.jpg“허탕이군, 이블린은 지금 막 잠들었거든.”

바스티안이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닫으며 휴이터의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16550804432405.jpg“…….”

이블린이…… 잔다고? 이블린은 아무 앞에서나 긴장을 풀지 않는데. 휴이터의 눈동자가 까맣게 가라앉았다.

16550804350331.jpg“그럼, 이야기를 들어볼까?”

바스티안이 여유로운 말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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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804432453.jpg“역시 그때 함께 죽여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짜증이 난 공작이 습관적으로 왼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공작가의 문장이 박힌 가주의 인장이었다.

16550804432453.jpg‘내가 어떻게 손에 넣은 것들인데.’

제국 최고의 권세가인 티에르 공작가의 가주. 그가 간절히 바라던 자리였다. 공작은 비참했던 젊은 날을 떠올렸다. 조부의 무능함으로 조금씩 몰락하던 가문은 중앙에 진출해보지도 못하고 풍비박산이 났다. 무기력하게 도박과 술로 시간을 보내는 부친을 보며 그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 다짐했다. 두고 보아라, 언젠가 모두 내 발밑에 꿇어 빌게 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푸대접을 받을 때마다 이를 갈고 또 갈았다.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리본느 티에르를 만난 건 그에게 둘도 없을 찬란한 기회였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를 가진 공작가의 무남독녀. 심지어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밝힐 수도 없는 임신.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을 이용해 그녀의 남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16550804432453.jpg‘그런 것까지 제 어미를 닮다니.’

뻔뻔하게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고 으스대던 이블린을 떠올리며 비릿한 조소를 흘린 공작이 곧 테이블을 내리쳤다. 리본느와 결혼하며 행복한 미래가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장인은 그를 지방 영지로 보내버렸다. 표면적으로는 후계 수업의 일환이라 했지만, 칼리아노는 알았다. 그건 감히 공작가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결국, 공작가 저택의 문턱도 밟지 못한 채 가문의 영지를 전전했다. 마르다도 그사이에 생긴 아이였다. 칼리아노가 공작가에 발을 들인 건, 리본느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서였다. 당연히 이블린의 얼굴도 그때 처음 봤고.

16550804432453.jpg“청렴하고 강직한 공작이라고? 웃기고 있군.”

선대 공작에 대한 평가가 후해도 너무 후했다. 그는 제 권력을 뺏기기 싫어 꾀를 쓰고 남을 이용하는 파렴치한일 뿐이다. 선대와 자신이 다를 게 뭔가. 그저 태어난 배경이 다를 뿐, 그리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몇십 년 동안 꿈꿔 온 목표가 바로 코앞인데 쉽게 포기할까 보냐.

16550804432453.jpg“이제 어쩐다.”

이블린을 호위기사단장직에서 내려오게 하면 당장 황후가 되는 절차를 밟을 테고. 그렇다고 호위기사단장직에 계속 두어 황제와 붙어 있게 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이블린을 끌어와 제 손아귀에 다시 넣어야 했다.

16550804432453.jpg“이봐!”

16550804404886.jpg“네, 공작님.”

마음을 정한 공작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밖에서 대기하던 보좌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16550804432453.jpg“황궁으로 은밀히 연락을 넣어.”

16550804404886.jpg“무엇을 말입니까?”

16550804432453.jpg“배 속의 아이를 없애라고 해.”

16550804404886.jpg“……네?”

보좌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 *

16550804432405.jpg“하아.”

업무 교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휴이터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황제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16550804432405.jpg“폐하, 티에르 단장과 계획하신 게 무엇인지 몰라도, 다른 방법을 고려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16550804350331.jpg“그걸 왜 그대가 걱정하지?”

16550804432405.jpg“그야 티에르 단장은 제 오랜 친우고…….”

16550804350331.jpg“단지, 그 이유?”

16550804432405.jpg“…….”

16550804350331.jpg“이건 이블린과 내 문제야. 선을 지켜, 디에스티 경.”

  사실상 친구의 자리에서 만족하라는 경고였다.

16550804432405.jpg“……아이가 없다는 건 금방 들킬 겁니다.”

16550804350331.jpg“아아, 아이.”

  용기를 낸 지적에 황제는 느른하게 웃었다.

16550804350331.jpg“글쎄, 진짜 생길지도 모르지.”

  오만하고 거만하기까지 한 대답. 신경 쓸 바가 아니라며 경고하는 눈빛에 목덜미가 쭈뼛 서는 듯했다. 그 눈빛에 확신했다. 진짜 연인 사이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황제의 마음은 진짜인 거다.

16550804432405.jpg“아이라니, 이블린이 바라는 미래는 따로 있어.”

이블린이 그런 걸 바랄 리가 없다. 이블린이 황제에게 휘둘리게 둘 수는 없었다. 결심한 휴이터가 부친의 집무실로 향했다.

16550804432405.jpg“아버지.”

16550804404886.jpg“무슨 일이지?”

휴이터를 본 디에스티 공작의 근엄한 표정이 깨져버렸다. 이토록 심각한 표정의 휴이터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16550804432405.jpg“내일모레 귀족 회의에 참석하시죠?”

16550804404886.jpg“그런데?”

16550804432405.jpg“이블린과 황제 폐하의 결혼을 막아 주세요.”

16550804404886.jpg“……뭐?”

공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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