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남자로 보여?2021.12.22.
“말씀만 하시지요, 원하시는 건 그게 무엇이든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어머, 감동이네요.”
이블린이 기쁜 듯이 두 손을 모으자 알피도 자작이 어깨를 활짝 폈다. 드디어 오펜 자작보다 먼저 대답하는 데 성공했다.
“음, 그럼…….”
“…….”
이블린의 대답을 기다리는 알피도 자작의 표정이 사뭇 비장해졌다. 뇌리에 박혀버린 황제의 차가운 회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집무실에 들어오며 그 눈을 본 순간,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런 압박감은 처음이었다. 그런 황제가, 이 공녀에게만큼은 달콤하게 굴지 않나. 한마디로, 새로운 권력이 탄생했다는 뜻이었다.
‘공녀에게 잘 보여야 해.’
알피도 자작이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오늘, 공녀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아야 했다.
“아.”
때마침 이블린이 작게 손뼉을 쳤다.
“개인적으로 예쁜 걸 무척 좋아해요. 작고 반짝이는, 그런 거?”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지요. 그리고 작고 반짝이는 거라면, 저희 상단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분야입니다. 저희 알피도 상단이 보석으로 유명하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요?”
알피도 자작의 신이 난 목소리를 들으며 오펜 자작은 한숨을 삼켰다. 최근에 황제가 왜 그렇게 보석을 사들이나 했더니, 이 아름다운 영애가 이유였나 보다.
“…….”
역시 사치를 좋아하는 귀족영애일 뿐인가. 오펜 자작의 표정이 더 어두워질수록, 알피도 자작의 표정은 살아났다. 보석을 좋아하는 건 아버지나 딸이나 똑같구나 싶었다. 좋아하는 이유야 다르겠지만 말이다.
“어떤 보석을 가장 선호하십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흔하지 않은 거?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건 별로…….”
“아휴, 맞습니다. 자고로 희귀할수록 보석의 가치도 올라가는 법이지요. 저희는 대륙 전체를 뒤져도 구하기 힘든 보석을 많이 거래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저희 상단의 컬렉션을 한 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머, 좋아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하하, 보석 이외에도,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고민해 볼게요.”
말꼬리를 늘인 이블린이 뒤늦게 오펜 자작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버틸 뿐이었다.
“음, 오펜 상단에서는 뭐가 유명한가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힌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는 식료품을 위주로 하는 작은 상단입니다. 내세울 것이 딱히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실의 물품을 전부 담당하고 있잖아요?”
이블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건 폐하의 명으로 구해오는 것뿐입니다.”
“……그래요?”
이블린이 실망했다는 듯 입술을 샐쭉거렸다. 알피도 자작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 오펜 자작을 쳐다봤다.
‘저놈이 미쳤나?’
녀석은 황제가 떠나자마자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겉으로 티를 내는 건 아니지만, 같은 상단 일을 하는 그의 눈에는 오펜 자작의 불편한 속내가 다 보였다.
‘멍청한 놈. 제가 아무리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지만,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다니.’
알피도 자작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폐하께 듣기로는, 오펜 상단의 차 밭이 유명하다고 하던데. 몸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가보고 싶어요.”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는 듯, 이블린이 제 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그냥 평범한 차 밭입니다. 귀한 영애께서 가보실 곳은 못 됩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강직하기도 하지.’
이블린은 속으로 웃어버렸다. 황제가 왜 유명하지 않았던 그의 상단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진짜 차 밭이 보고 싶어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마차 목격자가 거주한다는 지역이 그 근방이기에 미리 핑계를 만들어 놓으려는 것뿐.
“알피도 자작.”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이블린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네, 공녀…… 단장님.”
“편하게 불러도 좋아요.”
이블린이 조금 더 살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곧 날을 다시 잡을 테니, 궁으로 또 와주겠어요?”
“영광입니다.”
알피도 자작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닿을 만큼 올라갔다.
. . 두 자작을 보내고 혼자 남은 이블린이 뻣뻣해진 볼을 문질렀다.
‘폐하께서 비켜주셔서 다행이야.’
그녀가 연기하는 모습을 바스티안이 봤더라면, 무척 창피했을 거다. 그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을 황제를 상상하니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그의 곁에 있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황제처럼 그녀를 함부로 놀리고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누구도. 어린 애 대하듯, 친한 친구를 대하듯, 연인을 대하듯. 그는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며 이블린의 정신을 쏙 빼놓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
고개를 흔들어 황제의 생각을 털어낸 이블린이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부친의 비밀 장부를 옮겨 적은 거였다.
“흠.”
부친이 굳이 이중장부를 쓴 이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황실에 내야 할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 황실의 재정을 메우는 건 귀족의 의무였다. 거기서 티에르 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클 테고. 만약 이 사실이 어딘가로 알려진다면? 큰 망신으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귀족들이 세금 징수액을 속이는 게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이라 해도, 티에르 가문이 거기에 동참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바스티안에게는 이런 추측을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뻔하지.’
재산을 몰래 축적하려는 부친과 보석 거래의 큰 손이 되길 자처하며 광산까지 사들인 알피도 상단. 가치는 크지만, 부피가 작아 보관하기에 최적화된 건 역시 보석 아닐까.
‘알피도 자작이 빨리 넘어오면 좋을 텐데.’
알아서 먼저 진실을 불어준다면, 더욱 좋고.
“그나저나, 오펜 자작은 괜찮으려나.”
갑자기 불려와서는 유쾌하지 않은 장면을 내내 봐야 했으니, 웬 날벼락인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블린의 예상은 적중했다. . .
“하, 참.”
오펜 자작은 구겨진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폐하께서 저런 여인을? 왜? 티에르 가문의 힘이 필요하기라도 하신 건가?’
해를 거듭할수록 귀족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황제는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감히 황제에게 왜 저런 여인이냐 물을 수도 없고. 어느새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오펜 자작이 불퉁한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폐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인사치레는 됐어, 이블린과 이야기는 잘 끝냈나?”
“……네.”
“표정이 썩 좋지 않군.”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서류를 보던 바스티안이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것이…… 아닙니다.”
“왜, 막상 만나보니 별로던가?”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정곡인 모양이었다.
“아직 멀었군, 자작.”
“……네?”
“그렇게 멍청하게 굴다가는 이블린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거란 뜻이야.”
“…….”
“나라고 생각하고 대해.”
“네, 폐하.”
내가 공녀에게서 놓친 게 있던가? 아리송해 하던 자작이 일단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를 부른 건, 중요하게 맡길 일이 있어서야.”
“말씀하십시오.”
이번엔 무엇을 부탁하시려나. 정령석? 혹은 바다 건너에서 넘어온다는 귀한 약재? 무엇이든 바스티안이 요구하는 건 까다로웠다. 바짝 긴장한 오펜 자작이 바스티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청혼 준비를 하려고 해.”
“……청혼이요?”
저도 모르게 대꾸한 오펜 자작이 꼴깍 침을 삼켰다.
“그래, 청혼. 세상에 둘도 없을, 가장 멋진 프러포즈가 되어야 해.”
“…….”
저 웃음기 하나 없는 얼음송곳 같은 얼굴로 하는 말이 청혼이라니.
“네, 명심하겠습니다.”
모순을 느끼면서도 오펜 자작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 *
“잠깐만.”
목욕을 마친 이블린이 알리에타가 내민 옷을 보며 망설였다. 잠옷이 너무 야한 것 같은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신경이 쓰였다. 얼마 전, 공작가에서 잠옷을 신경 쓰던 바스티안이 떠올랐다. 갑자기 공기가 확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유모, 잠옷을 새로 준비해야겠어. 최대한 온몸을 다 가리는 거로.”
“네, 그럴게요.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입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나. 외출복을 입고 있는 것도 웃기고. 아니야, 내가 지금 이걸 의식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해. 담요라도 두르자고 생각한 이블린이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런데 공녀님.”
이블린에게 잠옷을 입히고 몸이 건조하지 않도록 향유를 발라주던 알리에타가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꼭, 신혼 첫날 밤 맞이하시는 걸 돕는 기분…….”
“유모.”
“크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폐하와 부부가 되시는 건 맞잖아요?”
“벌써 잊은 거야? 유모가 그랬잖아, 잘생긴 남자는 얼굴값을 한다며?”
그럼 폐하도 바람둥이여야 맞잖아. 알리에타는 이블린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폐하는 예외이신 것 같아요.”
바람둥이라니, 들으면 억울하시겠어. 이블린에게 진실을 알려줄 수 없으니 안타까웠다.
“그럼 공녀님, 푹 주무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으응.”
알리에타가 떠나고 혼자 남은 이블린은 응접실 안을 어색하게 오갔다. 폐하가 오시기 전에 여기서 잠들어 버릴까? 아니야, 그러면 어제처럼 또 침대로 옮기실 텐데. 그렇다고 먼저 침대로 가서 자고 있을 수도 없고. 손톱만 물어뜯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치즈를 훔쳐먹다 걸린 생쥐처럼 이블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폐하.”
이내 덤덤한 척, 자세를 바로 한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바스티안의 까만 머리칼 끝이 살짝 젖어 있었다. 욕실을 그녀에게 내주고 그는 다른 곳에서 씻은 모양이었다. 졸지에 방을 빼앗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날 기다렸나?”
웃으며 다가오는 바스티안을 보자 그 마음마저도 금방 사라졌지만. 막상 코앞까지 다가온 바스티안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음, 저는 여기서 잘 테니까…….”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이블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더러 매너 없는 남자가 되라고?”
“그럼…….”
“폐하께서 여기서 주무실래요?”라고 물을 수도 없고. 이블린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참고로 나는 다른 데서 못 자. 다리가 길어서.”
아, 네, 그러시군요. 이블린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안 잡아먹을 테니까.”
이블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바스티안이 침실로 그녀를 이끌었다.
“의식하는 걸 보니 내가 남자로 보이기는 하나 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래?”
새침한 대답에 바스티안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렇단 말이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을 붙잡은 채로 거리를 좁혔다. 왜, 왜 다가오는……. 이블린이 긴장하며 바스티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어느새 장난기가 사라진 그의 눈가에는 묘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제 입술에서 멈췄다는 걸 깨달은 이블린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
몇 걸음도 채 걷기 전에 톡, 이블린의 다리가 침대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