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절 이용하셨군요2021.12.29.
“할 말이라도?”
“아닙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요.”
바스티안의 까칠한 질문에 다베르 후작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귀족회의를 앞두고 짜증이 가득할 줄 알았던 그의 상사는 의외로 기분이 괜찮았다.
“아.”
바스티안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아주 좋은 선물을 받았거든.”
아침에 그를 보고 민망해하며 삐걱대는 이블린을 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깨우지 않고 나왔다. 그의 곁에서 편안하게 잠든 이블린을 보는 게 꽤 만족스러웠던 탓이었다. 지금은 어쩌고 있으려나. 이블린도 그처럼 어젯밤 일을 곱씹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지만, 그랬다가는 회의고 뭐고 내팽개치고 싶어질지도.
‘어제도 겨우 참았으니.’
어젯밤, 그 정도에서 멈춘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이블린이 허락할 줄은 몰랐는데. 조금씩 마음을 여는 증거라고 여겨도 될까, 너무 앞서 나가는 걸까. 이블린의 마음을 짐작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회의장 앞이었다. 오늘은 저 보기 싫은 얼굴들조차 잘 견딜 수 있을 듯싶었다. 귀족회의를 핑계로 이블린에게 또 손을 잡아달라고 해볼까.
‘괜찮은 생각 같군.’
음, 벌써 보고 싶네. 이블린이 없는 허전함을 느끼며 바스티안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 * *
“왔군요.”
단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오펜 자작을 본 이블린이 몸을 일으켰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오펜 자작은 책상에서 돌아 나오는 이블린을 보며 조금 얼떨떨해졌다.
“바쁠 텐데 기꺼이 시간을 내주어 고마워요.”
“아닙니다. 당연히 와 봐야지요.”
습관적인 대답을 하면서도 자작은 이블린의 얼굴을 몰래 훑었다. 제복 차림과 정돈된 외모는 어제와 똑같은데, 공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목소리나 말투도 달랐다.
‘그냥 화려한 미인이었는데.’
지금은 숨길 수 없는 기품과 우아함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봐도 완벽한 귀족의 표본 같은 느낌이랄까.
‘같은 사람이 맞나?’
괜한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가는 주도권을 빼앗길 텐데.”
문득 황제의 경고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았었지. 그럼, 어제는 혹시…… 일부러 그런 건가?
“어제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자작.”
“……제가요?”
머릿속을 읽힌 기분에 오펜 자작이 움찔했다.
‘맞구나.’
빙긋 미소만 짓는 이블린을 보며 자작은 확신했다. 여러모로 비슷한 배경 때문에 알피도 상단과는 경쟁 구도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알피도 상단에서 견제하는 일도 잦았고. 공녀가 그런 알피도 자작의 심리를 건드리려고 한 모양이었다.
“……절 이용하셨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앉아서 대화를 나눌까요? 알리에타, 차 좀 부탁할게.”
소파를 가리킨 이블린이 눈꼬리를 접었다. . .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들 위주로 초대할 생각인데, 자작도 알다시피 제가 최근 2년간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았잖아요? 안타깝게도, 요즘 사교계의 유행을 잘 몰라서 도움이 필요해요.”
이블린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작은 자꾸만 이블린에게 향하는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짧은 티타임 동안, 그는 티에르라는 이름을 실감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게 귀족 예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잘난 귀족이라도 하나 정도는 흠결이 보이기 마련인데, 공녀는 아니었다. 덕분에 그녀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꽤 긴장해야 했다.
“너무 화려해서도, 조촐해서도 안 돼요. 이블린 티에르라는 이름이 각인될 수준은 되어야 하죠.”
이블린 티에르의 소문을 퍼뜨려줄 중요한 손님들이었다. 잠깐의 가십으로 소비되는 존재만으로 남을 생각은 없었다.
“영애들 다음에는, 귀부인들을 초대해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고요. 유약하고 아픈 공녀의 이미지를 바꾸는 게 목적이거든요.”
“명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마음이 든든하군요.”
황제궁을 빠져나와 티파티 장소로 염두에 둔 정원으로 막 들어서던 때였다.
“?”
이블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 멀리, 본궁 쪽으로 급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에바?’
저 아이가 본궁에 볼 일이 뭐가 있지. 심부름인가?
“단장님?”
“아, 가지요.”
고개를 갸웃거린 이블린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 * *
‘이블린은 지금 뭐 하려나.’
상석에 삐딱하게 앉은 바스티안은 턱을 괸 채 이블린을 생각했다. 그의 회녹색 눈동자는 핏대를 세우고 고함치는 귀족들을 감흥 없이 담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귀족회의는 난장판이었다.
“귀한 황손을 가졌는데 결혼식이 먼저지요! 황후 책봉식도 서둘러야 합니다!”
“아니, 절차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티에르 가의 공녀라 한들, 절차도 생략하고 황후에 올린다면, 제국법은 대체 왜 있는 거며! 역사는 왜 있는 겁니까?”
불필요한 입씨름이었다. 어차피 바스티안은 이블린을 황후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블린을 ‘안전하게 그의 곁에 두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러기에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블린을 호위기사단장에 앉힌 것뿐이다. 필요하다면 황후에도 앉히겠지만, 그랬다가는 이블린에게 진짜 아이를 낳으라며 온갖 압박을 해대겠지. 이블린에게 그런 고생을 시킬 마음은 없었다.
“글쎄, 지금은 단장직부터 해결하자고요! 임신한 공녀에게 언제까지 단장직을 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처음부터 전례 없이 여인을 기사단장직에 앉히니 이런 불상사가 생긴 거지요!”
“이런, 후작. 그 말은 내가 그냥 넘기기 힘들군요. 이 상황이 전부 내 잘못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혀를 찬 바스티안이 꼬았던 다리를 풀어 반대로 옮기며 말을 얹었다.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떻습니까? 능력만 있으면 되지.”
“그것이 아니오라, 폐하.”
“아, 변명 듣자는 건 아니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시지요?”
조소한 바스티안이 다시 턱을 괬다.
“어, 어쨌든! 호위기사단장직 자리를 해결하고 나야 결혼식이든, 황후 책봉식이든 진행할 수 있는 겁니다.”
“글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어차피 호위기사단장은 명예직 아닙니까, 폐하께서 진짜 호위가 필요하신 건 아니잖아요!”
잠깐 바스티안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던 이들이 곧 싸움을 재개했다. 어차피 제 잇속을 따라 주장하는 것뿐이었다. 각자 바라는 게 다르니, 의견이 하나로 모이기가 힘든 게 당연했다. 바스티안은 저처럼 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지켜보기만 하는 두 사람을 눈으로 훑었다.
‘하나는 티에르 공작, 또 다른 이는…….’
디에스티 공작.
‘공작이 가만히 있다니 의외로군.’
평소의 그라면 당장 황후 책봉식과 결혼식을 동시에 진행하라며 추진했을 텐데.
‘티에르 공작의 입김이 닿았을 리는 없고.’
문득 디에스티 공작과 같은 벽안을 가진 자가 생각났다. 휴이터 디에스티. 입김이 닿았다면, 역시 그쪽일 확률이 높았다.
‘천하의 디에스티 공작이라도 자식이 우선이라 이건가.’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리던 때.
‘슬슬 때가 됐는데.’
티에르 공작은 문 쪽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이곳에 비밀리에 모은 그의 사람들은 정확히 삼 분의 일. 예상은 했지만, 귀족회의를 원하는 대로 끌어가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공작이 귀족들을 차례로 훑었다. 이블린을 황후로 올리려는 무리와 자신의 가문에서 황후를 내고 싶은 이들.
‘끌어들이려면 후자겠지.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딸 사랑이 지극한 공작의 이미지는 유지하는 게 좋았다.
‘미리 준비해두길 잘했군.’
회의 내용이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대안을 마련해놓은 터였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턱에 힘을 주던 티에르 공작이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맞은 편에 앉은 디에스티 공작이 그를 보고 있었다. 티에르 공작은 그냥 회의에 지친 사람처럼 난처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 * *
“날씨만 좋으면 최고의 장소겠군요.”
이블린이 티파티 장소로 제안한 정원을 둘러본 오펜 자작이 소감을 말했다. 적당한 크기의 분수대가 가운데 있고, 싱그러운 잔디가 넓게 있어 테이블을 놓기에도 좋았다.
“실내보다 정원이나 온실에서 파티를 여는 게 요즘 사교계의 유행입니다.”
그것이 더 부를 과시하기에 좋으니까. 최근 사교계의 유행을 모른다더니, 그냥 엄살이었나 보다. 적절한 장소를 찾아낸 공녀의 감각이 뛰어났다.
“그렇군요.”
“네. 날씨가 안 좋아도, 바로 연회장으로 연결되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얼마 전에 폐하께서 단장실로 보내신 선물 목록, 기억하죠?”
“네, 물론입니다.”
“단장실로 들어가지 못한 물품들이 창고에 있어요, 거기서 활용할 수 있는 건 활용하고, 새로 구매하는 물품의 대금은 저에게 청구해줘요.”
“단장님께요?”
필요한 물품을 가늠하며 목록을 작성해 나가던 자작이 펜 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이블린이 요청하는 건 뭐든 제게 대금을 요청하라는 황제의 명이 있던 터였다.
“폐하께는 아무 말 말고.”
이블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한마디를 더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아신다면 제가 혼이 납니다.”
“괜찮아요, 그건 제가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자작은 일단 이블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소문을 듣자 하니 티에르 공작은 꽤 사치를 즐기는 것 같던데, 공녀는 또 다른 모양이었다. 대금을 제게 청구하라는 거 보니 돈이 많은 건 확실한 것 같지만.
“차 종류에 따라 곁들일 다과도 달라질 테니, 준비하는 동안 여기 하녀장인 알리에타와도 의견을 나누도록 해요.”
“네.”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군요.”
이블린이 꽤 많이 기울어진 태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슬슬 귀족회의도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 조용히 본궁에 다녀올까 싶기도 했다.
“중요한 건 정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갈까요?”
“네, 그러시지요.”
이블린이 알리에타와 자작을 데리고 다시 정원을 돌아 나올 때였다.
“너 뭐야? 대체 이게 뭐냐고!”
누군가 크게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걸음을 멈춘 세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뭐야, 너!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한 거야?”
계속되는 고함이 심상치 않았다.
“가보지.”
소란스러움을 따라가니 두 명의 하녀가 한데 엉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에바?”
“이게 뭐 하는 짓들인가!”
하녀들의 얼굴을 확인한 알리에타가 빠르게 다가갔다.
“하녀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머리가 헝클어진 에바가 다른 하녀의 손목을 억세게 움켜쥔 채 소리쳤다.
“이거 놔!”
“이 애! 칼, 칼을 들고 있었다고요!”
“!”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저리 비켜!”
“으악!”
거센 힘으로 에바를 뿌리친 하녀가 손을 밑으로 내렸다. 동시에 검을 뽑은 이블린이 하녀의 코앞에 날을 겨눴다. 장검의 날카로운 날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이블린은 하녀가 두 손으로 쥔 조악한 단검을 힐끗 쳐다봤다. 이블린의 검날이 하녀의 목 옆으로 스르륵 내려갔다.
“네가 나를 공격하는 것보다, 내가 네 목을 베는 것이 더 빠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