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게 무슨 일이야2022.01.02.
“저, 저를 그냥 보내 주세요!”
소리친 하녀가 손을 더 앞으로 뻗었다. 검 끝이 제게 향했는데도 이블린은 평온했다.
“내려놓거라.”
“단장님!”
높낮이 없는 이블린의 목소리 위로 사내들의 거친 목소리가 덮였다. 마침 순찰하다가 소란을 발견한 근위대와 기사단원들이 동시에 달려왔다.
“잠깐.”
이블린이 곧장 하녀에게 달려들려는 기사들을 막았다. 덤덤한 연녹색 눈동자는 하녀에게 고정된 채였다. 작은 체구의 하녀는 에바에게 뜯겨 엉망이 된 몰골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뾰족한 단검의 끝도 덩달아 같이 흔들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했다. 진짜 암살자라면, 진작에 반격을 시도했거나 자결을 시도했을 터.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블린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이블린이 말을 이었다.
“네 주변이 보이느냐.”
목에 닿는 칼끝에 흠칫하면서도 하녀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건, 무시무시하게 생긴 기사들이었다.
“그럼 잘 알겠구나. 너는 여기서 잡힐 테고, 그 말은 즉.”
이블린이 한 박자 쉬며 말끝에 힘을 실었다.
“네가 뜻한 바를 이룰 수도 없다는 뜻이지.”
“…….”
“손에 든 걸 내려놓고 얌전히 따르면, 네 사정 정도는 들어주마.”
“……흐흑.”
작은 단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블린이 단검을 발끝으로 쳐서 멀리 보냄과 동시에 하녀가 흐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 * *
“폐하, 폐하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끝없는 고성이 오가던 때, 누군가가 바스티안을 싸움판에 끌어들였다. 이제 그만 한쪽의 편을 들어달라 이거였다.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지금껏 내 의견에는 관심도 없지 않았습니까.”
바스티안이 코웃음 쳤다.
“솔직히,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도 모르겠군요. 차라리 경들끼리 합의하고 결론이 나면 내게 전달하는 게 어떻습니까.”
바스티안의 비꼬는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몇몇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 까칠한 젊은 황제는 유들유들했던 선황제와 여러모로 달랐다.
“그게 싫다면, 그대들이 다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이라도 잘까 싶은데.”
바스티안이 지겹다는 듯 목 언저리를 주무를 때였다. 쾅. 회의장 문이 벌컥 열리고, 다급하게 들어온 병사 하나가 입구 쪽에 있던 다베르 후작에게 다가갔다.
“폐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 사색이 된 후작이 바스티안에게 달려왔다. 회의장에 있는 모든 이가 들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티에르 단장이 암살자를 잡았답니다.”
“……뭐?”
바스티안이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찬물을 끼얹은 듯 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 암살자라고? 굳어버린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오늘 다들 집에 가기는 글렀군요.”
성큼 입구 쪽으로 걸어가 회의장을 벗어나려던 바스티안이 몸을 돌려 귀족들을 바라봤다.
“뭣들 합니까? 계속 싸움이나 하고 계시지요.”
한심하다는 듯 조소한 바스티안이 떠난 후.
“……암살자라니? 뭐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황한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필 회의가 있는 날에?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계략 아닐까요?”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리 오늘 회의가 중요하다지만 폐하도 계신 자리에 굳이 왜 그런 위험한 방법을.”
“그럼 진짜 폐하를 노리고 온 거란 말입니까? 이 황궁이 어디 그런 조무래기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랍니까?”
“어허, 입조심하시오, 듣는 귀가 많소.”
삼삼오오 본인의 세력대로 모여든 이들이 숙덕댔다.
“어허, 어찌 귀족회의의 대표들이란 자가 본인들 잇속만 챙긴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황실이 안정되는 것 외에 뭐가 중요하다고들 이러는지.”
“…….”
디에스티 공작은 그와 뜻을 같이하는 귀족들이 투덜대는 걸 들으며 아들을 떠올렸다. 휴이터의 부탁을 들어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래서야 회의에서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듯했다.
‘그나저나, 황궁에 암살자라니.’
디에스티 공작이 걱정스레 출입구를 바라봤다. 요즘 들어 사건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투박한 나무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은 이블린은 눈앞의 하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밧줄로 손과 발을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앉은 하녀는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근육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몸, 검을 쥘 때 보이던 미숙함.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니, 솥을 닦을 때 쓰는 볏짚을 말리려고 볕 좋은 데다 널어놨었거든요. 그걸 가지러 가는데 저 애가 정원에 웅크리고 있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 가까이 갔더니, 글쎄 검에다가 이상한 액체를 뿌리고 있더라고요.”
“숨어서 보고 있자니까 검을 품에 숨기고서는 본궁 쪽으로 가려 하지 뭐예요? 그래서 일단 붙잡고 봤지요.”
자초지종을 묻자 한껏 흥분한 에바는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에바는 다른 조사실에서 진정을 취하게끔 두고 이쪽으로 넘어온 거였다.
“궁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됐더구나.”
이블린이 입을 열자 하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신분도 확실하고, 곧 본궁으로 소속도 옮길 예정이었던데. 그런 네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흐흑.”
말없이 울기만 하는 하녀를 보며 이블린이 한숨을 흘렸다.
“네가 검에 묻힌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니?”
“…….”
“그냥 맹물이었다.”
“!”
그제야 하녀가 고개를 들어 이블린을 바라봤다.
“몰랐던 모양이구나.”
그녀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확신이 더해졌다.
“네가 누군가를 해하려 했다는 정황이 뚜렷한 이상, 처벌은 피하기 어려울 거야.”
“…….”
“하지만, 네가 솔직히 말한다면 처벌의 강도는 약해질 수도 있지.”
원하는 답이 아니었는지 하녀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마도 죽을 작정으로 이런 일을 결심한 모양이었다.
“뭐가 그리 억울했니?”
“…….”
“익숙하지 않은 검을 손에 쥘 만큼.”
이블린의 마지막 말에 하녀의 흐느낌이 더 커졌다. 이미 눈물범벅이 된 젖은 얼굴이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킨 이블린은 꺽꺽대며 우는 하녀의 재갈을 직접 풀어주었다.
“솔직히 말해주렴.”
“귀족, 귀족회의장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귀족회의? 의외의 답이었다.
“제 여동생……의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이내 통곡하는 소리가 조사실 안을 가득 채웠다.
“제 여동생이…… 아이를 가진, 흐흑, 채로 강에 뛰어들었어요. 아이, 아이 아빠가, 흑, 책임지지 않겠다고…… 제 동생을 버려서요! 호, 혹독한 매질까지 당했답니다!”
“……상대는?”
“아, 아벤토 후작입니다!”
말을 마친 아이가 바닥에 엎어져 으아앙 울음을 터트렸다.
“제 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귀족 나리라면, 이렇게, 이렇게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겨도 되는 건가요? 불쌍한 제 동생을……!”
울부짖는 목소리에 원한과 원망이 가득했다. 조사실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든 이블린은 곧 바스티안을 발견했다. 그의 회녹색 눈이 안위를 확인하듯 그녀를 빠르게 훑는 게 느껴졌다.
“폐하.”
“……아벤토 후작을 불러오게.”
일단 이블린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한 바스티안이 미간을 찡그리며 옆에 있던 기사단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 * * 바스티안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이동한 이블린은 마음이 착잡했다. 아벤토 후작가는 친 황제파로 익히 알려진 가문이었다.
“폐하, 아벤토 후작은 어떤 사람인가요? 정말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인가요?”
이블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만나본 적이 없어 후작의 사람 됨됨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뭐, 행실이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지. 이런 문제가 생겨도 이상하지는 않을 만큼.”
후작의 여성 편력은 바스티안도 들은 바가 있었다.
“…….”
이블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귀족회의, 에바, 궁의 하녀, 하녀의 여동생, 아벤토 후작, 친황제파. 묘하게 이어진 연결고리들이 찝찝했다.
“타이밍이 좋아. 꼭 노린 것처럼.”
바스티안이 어이없다는 듯 흘리는 말에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후작은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귀족회의 투표 권한을 박탈당하게 될 거다. 더불어 황제파의 인원도 줄어들 터.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런 일의 원인을 제공했으니 그에 대한 징계는 피하기 어려울 거였다. 결국, 어느 쪽이든 황제파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자칫 바스티안에게도 누가 될 수 있고.
“폐하, 부르셨습니까.”
마침 집무실에 도착한 후작의 공손한 태도에 바스티안과 이블린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쪽으로.”
바스티안이 먼저 상석에 앉으며 앞의 자리를 턱짓했다. 바스티안의 뒤를 지키고 선 이블린을 힐끗 본 후작이 일단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후작.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네, 폐하.”
서슬 퍼런 바스티안의 경고에 후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왜 그를 따로 부른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후작. 이글락 마을의 메이란이란 아이를 기억합니까?”
“……예?”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온 후작의 눈이 순진하게 끔뻑였다.
“왜, 밤을 보낸 여인이 너무 많아 기억하기가 어렵습니까.”
“그, 그것이.”
바스티안이 툭 던진 말에 후작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블린의 눈치를 살폈다.
“석 달 전, 그대가 이글락 마을에서 취한 아이라더군요.”
“……그 아이라면…… 기, 기억합니다, 폐하.”
“그 아이가 죽은 건 알고 있습니까?”
“네?”
후작이 눈을 더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도 놀랐지만, 그걸 왜 제게 묻냐는 듯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대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그 아이에게 매질했다던데.”
“네에에? 아니, 그게, 아니…… 무슨 그런……”
후작이 입을 뻐끔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기사단장이 잡았다는 암살자가, 그 아이의 혈육입니다. 그 일로 원한을 품고 그대에게 복수하려 했다는군요.”
“!”
상황 파악을 마친 후작이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 아닙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억울하다?”
“네, 메이란이란 여인을 취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후의 일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무엇이 말인가?”
후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아이일 리가 없습니다. 저는…….”
“…….”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입니다!”
이건 또 무슨? 이블린과 바스티안이 동시에 할 말을 잃고 손가락을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