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마음에 들어?2022.01.05.
“불임이라? 그대에게 아들이 하나 있지 않나.”
“……방계에서 비밀리에 입양해 왔습니다.”
바스티안과 둘만 남게 된 이블린이 헛숨을 터트렸다.
“폐하,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비밀로 해주십사 간청드립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제 아내는 자결할지도 모릅니다.”
후작 부인이 자존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 했던가.
“골치가 아프군.”
“폐하,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 후작을 노린 목적은 분명해 보이는데 말이지.”
하다못해 결론이 나지 않을 회의를 중단시키고, 다음으로 미루기만 해도 성공이었을 테니.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던 바스티안이 곧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러다 이블린을 빤히 응시했다.
“이블린.”
“네?”
“내가 그대의 기사단장직을 지켜내면, 내게 고맙겠지?”
갑자기 그런 걸 묻는다고? 지금 상황에?
“네, 뭐…… 그렇지요.”
의아해하면서도 이블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고마운 만큼 큰 상으로 보답해주리라 믿지.”
“폐하, 그게 무슨…….”
“티에르 공작과 디에스티 공작을 불러.”
바스티안이 씩 웃었다.
“하나를 내주고, 두 개를 얻어 보자고.”
“…….”
“일을 벌인 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자는 말이야.”
이블린은 그의 생각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 * *
“폐하께서 왜 우리를 찾으시는 걸까요. 공작께서는 짐작 가는 일이 없으십니까?”
“글쎄…….”
티에르 공작의 질문에 디에스티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 참, 폐하의 의중은 좀처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칫 무례할 수 있는 발언이지만, 디에스티 공작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젊은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안 될 때가 많았으니까.
“그보다도, 자네. 오늘 회의에서 오간 이야기들, 마음에 너무 담아두지 마시게.”
“……아.”
“이블린이 호위기사단장직에 임명될 때부터 걱정 많이 했던 걸 알고 있네.”
티에르 공작이 답지 않게 황제와 대립하기도 했으니까.
“그대가 이블린을 아끼는 마음은 잘 알지만, 걱정과 달리 이블린은 잘 해내고 있고, 또 황후가 될 터이니 그만 마음 놓도록 해.”
“……글쎄요, 어느 쪽이든 어깨가 무거운 자리지 않습니까. 자식이 고생하는 걸 보고 싶은 아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숨 쉬는 티에르 공작을 본 디에스티 공작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족이고, 상인이고, 여기저기 다 들쑤시고 다닌답디다.”
티에르 공작의 행보를 우려하는 이야기는 그도 이리저리 듣는 게 있기는 했다.
‘파시아가 걱정했던 게 이런 일이었나.’
선대 티에르 공작이었던 파시아는 그의 오랜 친우였다. 그리고 그는 제 사위를 썩 탐탁지 않아 했었다. 그렇다 해도, 가문의 주인이 된 그에게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훈수를 둘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블린을 아끼지 않나. 파시아와 리본느가 떠나고, 이제 이블린의 곁에는 부친 하나뿐이었다.
“공작께만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휴이터를 사위로 맞고 싶었습니다. 그게 딸아이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크흠. 뭐든 바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디에스티 공작이 못 들은 척 말을 흘렸다.
“그렇습니까.”
티에르 공작이 고요히 웃었다. 평소라면 그 무슨 무엄한 소리냐며 핀잔했을 텐데. 공작의 반응이 묘하게 달랐다. 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호의적이지도 않던 공작의 심경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겠는데?’
휴이터를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모쪼록, 이블린이 아끼는 존재들은 그에게 탐나는 제물이었다.
* * *
“폐하, 부르셨습니까.”
“……앉으시죠.”
뒷짐을 지고 창밖을 보던 바스티안이 담담하게 손님을 맞았다.
“폐하, 암살자라니…… 어찌 된 일입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디에스티 공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 그래도 그 일을 의논하려고 두 분을 따로 불렀습니다. 귀족회의의 대표들이시니.”
“…….”
시종이 두 공작의 앞에 찻잔을 놓고 나가길 기다린 바스티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벤토 후작을 노렸다더군요.”
“예? 후작을요? 아니…… 어째서?”
디에스티 공작이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다. . .
“아니, 이런!”
자초지종을 알게 된 디에스티 공작이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토록 사생활을 조심하라고 일렀건만!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무척 아쉽군요, 귀족회의를 만들고, 또 오랜 시간을 거쳐 귀족회의에 권한을 더 많이 부여한 것은, 황실을 대신하여 제국민을 더 가까이서 보살피라는 이유였는데 말입니다.”
바스티안이 엄지 끝으로 검지 손톱을 쓱 문지르며 읊조렸다.
“신기한 일입니다. 다들 권력에는 늘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걸 잊는가 봅니다.”
“……송구합니다.”
“아니면, 내가 황제로서 탐탁지 않으신가들.”
싸늘하게 읊조리는 바스티안의 뒤로 작은 회오리바람이 일렁였다.
“폐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두 공작이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없으면 제국도 없는 거였다.
“황궁에 암살자가 들었다, 암살자의 타깃이 사생활이 난잡한 귀족이었다, 사실 여부를 증명해 줄 여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기자들이 좋아할 만한 먹잇감이군요.”
바스티안의 이어지는 말에 디에스티 공작이 짙은 한숨을 쉬었다. 권력의 이동을 꿈꾸는 귀족들과 대립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세력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아벤토 후작의 사생활을 알면서도 묵인한 결과였다.
“폐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제 불찰이 큽니다.”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디에스티 공작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이 일이 어떤 미래를 초래할지 염려됐다.
“경이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두 분의 의견이 궁금하군요.”
바스티안의 질문에 두 공작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일을 크게 만들어 봐야 좋을 게 없기는 하지요. 폐하. 귀족회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해 징계는 하되, 조용히 넘어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귀족회의 권한을 박탈하시지요.”
디에스티 공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결론을 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큰 일로 번지기 전에 선을 긋는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 되었군.’
티에르 공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티에르 공작의 의견은?”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차분한 티에르 공작을 보며 바스티안이 말끝을 늘였다. 아마도 그는 지금 상황이 꽤 만족스러울 터.
“그럼, 그렇게 정리하시지요.”
“네, 폐하.”
“아, 그 전에 잠깐.”
바스티안이 잊을 뻔했다는 듯 손가락 끝을 까딱였다. 하나를 내어줬으니, 둘을 받을 차례였다.
“이블린 티에르에게 기사단장을 계속 맡기도록 하지요. 이런 선택을 할 수 있게끔 조용히 범인을 잡아 준 공이 크지 않습니까.”
“폐하, 제 딸아이의 건강을 생각해 주시지요. 폐하의 아이 아닙니까.”
황제의 요구에 티에르 공작이 곧장 읍소해왔다. 황제가 이렇게 제 의견을 강력히 드러내면, 귀족회의의 판도가 바뀔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근위대장에게 일을 돕게 할 생각입니다. 단장과 가까운 친우이고 황실에 충성이 깊은 자이니 기꺼이 나서줄 테지요.”
“물론입니다, 폐하.”
디에스티 공작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리고 아까 내 의견을 물은 것에 대해 답을 주자면.”
바스티안이 두 공작을 번갈아 보며 차갑게 일갈했다.
“이블린 티에르 외에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을 생각은 없습니다. 내 의사는 전했으니, 두 분이 오늘 회의를 잘 정리해주리라 믿겠습니다. 그럼 이만.”
말을 끝낸 바스티안이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기사단장직도 지켰고, 다음 회의까지 결혼 문제도 시간을 벌었으니. 이제 이블린에게 상을 받으러 갈 차례였다. * * *
“……피곤하다.”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던 이블린이 눈두덩을 꾹꾹 누를 때였다.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블린.”
“폐하.”
의자에 파묻혀 있던 이블린이 몸을 바로 했다.
“그냥 앉아 있어.”
손을 휘휘 내저은 바스티안이 책상 앞으로 다가와 이블린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표정이 안 좋군.”
“머리가 조금 아파서 그렇습니다.”
“그래?”
이블린을 빤히 보던 바스티안이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금발 머리를 동여매고 있는 끈을 살짝 잡아당겼다.
“폐하.”
이블린이 뭐 하는 거냐는 듯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방해물이 없어지자 얇은 실타래 같은 백금발이 물결치며 동그란 어깨 위로 떨어졌다.
“곧 업무도 끝날 텐데, 긴장 좀 풀고 있으라고.”
이블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긴 바스티안이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진짜 못 말려. 이블린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이블린.”
“네.”
“기사단장직은 유지하기로 했고, 대신 근위대장에게 그대의 일을 돕게 하겠다고 했어. 이쪽이 여러모로 그대도 편하겠지?”
“폐하.”
이블린의 얼굴에 밝은 빛이 번지는 걸 보며 바스티안이 되레 표정을 구겼다.
“그렇게 좋아할 거 없어, 검술 훈련을 같이하는 걸 허락한 건 아니니까. 그건 내가 책임지고 훈련시켜 주지.”
“으음.”
“결혼식 문제는 다음 귀족회의에서 정해질 거야. 그대가 황후가 되는 문제도.”
“아, 결혼식…….”
“왜? 빨리 올리고 싶었어?”
“…….”
입을 다무는 이블린에 바스티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바스티안의 오해와 달리 이블린은 말을 아낀 것뿐이었다. 바스티안이 마음에 두었다던 여인이 생각나서였다.
“그나저나.”
고개를 기울인 바스티안이 제 턱을 매만졌다.
“역사적인 첫 키스를 기념하려고 했는데 이런 사건을 터트리다니. 그것도 ‘또’ 임신 추문을 말이지.”
혼전임신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황제와 공녀를 떠올리게끔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누가 꾸민 일인지, 고마워서 선물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야.”
의심 가는 배후야 뻔하지만, 그것도 밝혀내야 하는 거겠지. 바스티안을 볼 낯이 없어 이블린은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단장실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군.”
몸을 돌린 바스티안이 책상에 몸을 기대고 바뀐 단장실 내부를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신경 써주신 덕분에 편하게…….”
“아니, 저 초상화 말이야.”
“네?”
이블린은 멀어지는 바스티안을 눈으로 좇았다. 긴 다리를 성큼 움직인 그는 어느새 자신의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의 초상화에 대한 감상을 묻다니. 이블린이 픽 웃으며 바스티안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래서 감상은?”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웬일로 솔직한 이블린에 바스티안의 눈꼬리가 휘었다.
“폐하.”
“응.”
“저희 말이에요.”
그림을 물끄러미 보던 이블린이 조용히 바스티안을 불렀다.
“어릴 때 만난 적은 없었을까요?”
“……그건 왜 묻지?”
혹시, 조금이라도 기억이 돌아온 걸까. 바스티안의 입가에서 특유의 미소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