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내 얼굴을 좋아했으면서2022.01.09.
“제 모친과 선 황후 폐하께서 친우 사이였다 들었거든요.”
이블린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저희 가문은 대대로 황실과 가까웠으니까, 폐하께서 제국을 떠나시기 전에 한 번쯤은 마주친 적이 있었지 않을까 해서요.”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은.
“아, 물론…… 폐하를 한 번이라도 만났더라면 당연히 기억에 남았을 거긴 한데요.”
덤덤하게 가능성을 이야기하던 이블린이 급히 말을 수습했다. 자칫하면 ‘네 존재감이 없어서 기억을 못 하는 거야.’라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랬다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상관이 어떻게 나올지 조금 두려웠다. 자신이 황제의 말과 행동에 생각보다 쉽게 말린다는 걸 깨닫고 난 후니까.
“……제가 어릴 때 큰 사고를 겪어서요. 그래서 기억이 좀…….”
이블린이 망설이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일에 대한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지만요.”
“……알려주니 고맙군.”
너에게만 특별히 알려준다는 듯한 말에 바스티안이 씁쓸한 한숨을 흘렸다.
“…….”
손가락 끝으로 볼을 긁적이던 이블린이 슬쩍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그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사고는, 어쩌다가?”
바스티안이 느리게 물었다. 이블린이 그때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들었어요. 몰래 놀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 같더라고요.”
정신을 잃을 만큼 고열이 난다든가, 멀쩡히 있다가도 기절하는 등, 큰 후유증을 몇 년이나 앓았을 만큼 큰 사고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공녀님이 지금 걷고 뛰는 것만도 기적이라니까요?”
알리에타가 그녀를 더 애지중지 감싸는 이유였고. 어머니와 알리에타는 종종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얘기하고는 했다.
“기억을…… 잃었다니. 불편하지는 않았나.”
바스티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딱히, 워낙 어릴 때기도 하고요.”
“……그런가.”
바스티안은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이블린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이블린은 다시 그림을 바라보는 바스티안의 옆모습을 슬쩍 올려다봤다.
‘사고 이야기를 괜히 했나.’
과거에 만난 적이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결국 듣지 못했다. 다시 묻기도 애매하고. 이블린이 머쓱하게 머리카락 끝을 매만질 때였다.
“그대가, 건강해져서 다행이야.”
바스티안이 가만히 읊조렸다.
“네, 감사……합니다.”
조용히 대답한 이블린이 고개를 내려 초상화 프레임의 무늬를 눈으로 좇았다. ……걱정해 준 건가? 그가 마음을 써 주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알리에타가 걱정해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랄까. 이블린이 어쩐지 간질거리는 목덜미로 손을 뻗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오단입니다.”
“아, 들어 와요.”
괜히 당황한 이블린이 빠르게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근위대에서 단장님이 한 번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잡힌 하녀를 조사하는데,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고요.”
“아.”
“다녀와.”
이블린이 힐끗 돌아보자 바스티안이 먼저 허락을 해줬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림을 향해 있었다. 흔쾌한 허락에 이블린은 오히려 얼떨떨해졌다. 도통 곁에서 떨어질 틈을 주지 않는 상관이니, 설마 조사실까지 따라오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저녁 식사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폐하. ”
“그래.”
“그럼 오단, 폐하의 호위를 부탁해요.”
“네.”
다시 한번 바스티안의 뒷모습을 힐끔 본 이블린이 단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철컥. 문이 닫히고 이블린의 인기척이 멀어졌다.
“후.”
바스티안이 내내 참았던 한숨을 뱉어냈다. 딱히 불편하지 않다, 라. 미련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그 한마디가 꽤 서운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중얼거린 바스티안이 그림 속 제 얼굴을 바라봤다. 이 초상화를 그리던 날, 그는 이블린을 처음 만났다.
“이블린 티에르입니다.”
작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귀족 예법을 구사하던 꼬마. 아들 사랑이 남달랐던 그의 부친이 가까웠던 티에르 공작에게 부탁해 몰래 황궁으로 초대한 손님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전하.”
“.......”
초상화를 그리는 내내 인형처럼 서 있는 게 싫어 도망치려 했는데, 혹이 붙어 버렸다. 저만 바라보며 따라오는 꼬마에 바스티안은 결국 얌전히 모델이 되고 말았다.
“전하, 제가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뭐?”
“초상화를 그릴 때는 손을 허리에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댔어요.”
가만히 앉아서 구경이나 할까 싶던 꼬마는 엄격한 선생이라도 된 듯 우아하게 잔소리를 했다. 그런 꼬마가 어이없어서 그만 웃어버리고 만 기억. 이제는 그 혼자만 가지고 있는 기억이 됐지만.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책상 근처로 다가갔다. 화병에 꽂힌 장미꽃의 잎이 일부 시들어 있었다.
“안타깝네.”
바스티안이 꽃 잎사귀를 쓰다듬으며 중얼댔다.
“그때 이블린은, 내 얼굴을 꽤 좋아했었는데.”
그의 손길이 닿은 꽃잎에 생기가 돌며 싱그러워졌다. 바스티안은 붉은 꽃잎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바스티안! 다른 이에게 함부로 힘을 사용해서도, 건네서도 안 된다는 걸 알지 않느냐.”
사고로 크게 다친 이블린을 살렸을 때, 부친은 그에게 처음으로 크게 화를 냈다.
“정령을 다루려면 타고난 그릇이 있어야 한다. 그릇이 없는 이에게 힘을 사용하면, 독이 된다는 걸 알면서!”
“내버려 뒀다면 이블린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아, 바스티안. 지금은 살렸을지 몰라도, 네 힘을 품고 있는 한 이블린은 언젠가 또 위험에 처할 거다. 당장 너도 네 힘을 통제 못하지 않느냐!”
“……그건.”
“지금은 네 존재 자체가 이블린에게 위험하게 되어버렸다. 곁에 있으면 네 불안정한 힘에 영향을 받을 테니까.”
함부로 힘을 되찾아왔다가는 이블린의 목숨이 위태롭고, 그대로 두어도 위태롭다. 이블린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힘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반쪽짜리 힘을 통제하고 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제국을 떠나 있겠습니다. 이블린이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아버지께서 통제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국을 떠나있겠다니, 넌 유일한 황자야.”
“이번 기회에 느슨해진 대륙 연합을 공고히 하고 오겠습니다.”
“……널 이블린과 만나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 실수다.”
“저는, 이블린을 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꽃에서 손을 떼어낸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첫사랑이었구나 깨달았다. 익숙한 황궁과 제국을 떠나 낯선 곳을 전전하며 몇 년을 떠돌아다닐 만큼은 좋아했나 보다고. 혼자만의 기억이라도 괜찮다. 이블린에게 그게 더 나은 거라면. 언젠가 때가 되면 전부 말해줄 생각이니까. 그때는 널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그 선택이 네 삶을 멋대로 휘두르게 됐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살아 있는 네가 즐겁게 웃는 걸 봤으니, 적어도 그 시절의 선택이 맞았던 거라고. ……그렇게 믿어도 되지 않을까.
* * *
‘내가 예민한 거겠지?’
조사실로 향하면서도 이블린은 발길이 무거웠다. 바스티안을 혼자 두고 온 게 영 찝찝했다. 뭔가 기분이 썩 안 좋아 보였는데. 바스티안에게 휘둘리느라 정신없기는 해도, 그의 곁에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어쨌든 그것이 호위기사단장의 업무니까.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지.’
이블린이 다짐하며 근위대 초소 근처의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최종 목적지는 조사실 건물에 마련된 임시 감옥이었다. 아직 처벌이 확정되지 않은 이들이 조사받는 동안 머무는 숙소의 개념이었다.
“밥을 먹지 않았구나.”
“…….”
이블린은 모포 위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하녀를 보며 한숨을 흘렸다. 이블린의 목소리에 움찔한 하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엉망인 걸 보니 그녀가 떠난 이후로도 내내 울기만 한 모양이었다.
“후작을 만나고 왔단다.”
이블린의 말에 하녀가 마저 몸을 일으켰다.
“네 이름이 뭐지?”
“데보라입니다.”
“그래, 데보라.”
이블린이 데보라를 부축해 앉게 한 뒤 눈을 들여다봤다.
“……후작은, 네 동생과 관계가 있던 건 사실이나, 아이를 가진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더구나.”
“…….”
“네 여동생이 죽은 것도 모르고 있었어.”
“…….”
하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물론, 그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야.”
이블린이 데보라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후작에게는 선 징계가 먼저 내려졌어, 그리고 황궁 근위대에서 이 사건을 더 조사하기로 했어.”
“……황궁 근위대에서요?”
“그래, 폐하께서 직접 진실을 밝혀내라고 명하셨어. 네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도 철저히 파헤칠 거고, 그 과정에서 후작의 악행이 있다면, 그는 추가로 처벌을 받게 될 거야. 그가 귀족인 것과는 상관없이.”
“…….”
“너도 진실이 알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너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기다려.”
“…….”
“내 말, 이해했지?”
데보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녀의 눈빛에 미약하지만, 희망의 빛이 떠오르는 듯했다. 이블린이 안심하고 몸을 일으켰다.
“데보라, 그러니 너도 진실을 말해줘야 해. 조사에 도움이 될만한 건 전부.”
“네, 그러겠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알게 된 상황부터 하나씩 말해주렴. 검은 어떻게 황궁으로 반입했는지, 검에 묻힌 독은 어떻게 구했는지도.”
물론 진짜 독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이블린의 질문에 데보라가 버석한 입술을 열었다.
“실은, 얼마 전에 제게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 .
“틈날 때마다 만나러 올게, 조사 과정도 전해줄 겸.”
“……감사합니다.”
“밥은 꼭 먹고.”
데보라의 손을 꼭 잡아주며 약속을 받아낸 이블린이 근위대 건물을 빠져나왔다. 복수심에 불타던 데보라의 젖은 눈동자가 뇌리에 강렬히 박힌 터라 마음이 더 쓰였다. 2년 전의 나도 저랬을까 싶은 마음.
“음, 이렇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데.”
이블린이 생각을 털어낼 때였다.
“이블린!”
“……휴이.”
“하아, 아직 있었구나.”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온 휴이터가 허리를 굽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조사 끝내고 나오는 길인데.”
“미안, 하필 내가 휴무인 날에 이런 일이.”
공작저로 날아든 보고에 급히 달려왔지만, 이미 사건은 수습된 후였다.
“괜찮아. 그런 사정 봐 가면서 일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이블린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팔꿈치로 휴이터의 팔을 쳤다.
“넌 다친 데 없고?”
“당연하지. 검 한 번 쥐어 본 적 없는 하녀였어. 암살자라고 말이 퍼진 게 민망할 만큼.”
“……그렇구나.”
휴이터가 말끝을 흐렸다. 왜 나는 네 일에 있어서 한 발짝씩 늦는 걸까.
“오면서 대략적인 내용은 전해 들었지?”
“응.”
“미심쩍은 게 많은 사건이야, 네 집무실로 가자, 휴이. 자세히 설명해줄게.”
“그래, 이쪽이야.”
오랜만에 이블린과 둘이 붙어 있을 수 있게 된 휴이터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휴이.”
“응?”
“우리 어릴 때 말이야.”
“어릴 때? 왜?”
신이 나서 걷던 휴이터가 이블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를 뵌 적 있었을까? 지금의 폐하가 황태자이시던 시절에 말이야.”
“……아.”
즐거웠던 휴이터의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