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바스티안이 원하는 것2022.01.12.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그러니까, 그게 왜 갑자기 그냥 궁금해진 건데?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는 것 같은데. 휴이, 너는? 너는 없었어?”
“아니, 없어.”
휴이터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황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대외활동을 잘 안 하잖아. 놀이친구도 따로 두지 않고.”
“그렇지?”
휴이터가 이블린을 알게 된 건 그녀가 큰 사고를 겪고 난 후였다. 그 전에 혹시 두 사람이 만났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야, 내 집무실.”
“아, 응.”
바스티안의 생각을 잠시 미뤄둔 이블린이 내부를 휙 둘러 보았다. 대부분 무늬가 없는 단순한 원목 가구였다. 곳곳에 비치된 무기들을 보니 기사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단장실과는 여러모로 비교돼서 이블린은 조금 민망해져 버렸다.
“이브, 무슨 차를 줄까?”
이블린에게 자리를 권한 휴이터가 다시 신이 나서 입구 쪽으로 향했다.
“차는 됐어, 휴이. 내용만 전해주고 바로 갈 거니까.”
“……그래?”
휴이터가 아쉬운 내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블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운해하지 마, 휴이. 일하는 중이잖아.”
이블린이 그런 휴이터의 마음을 알아채고 큭큭 웃었다.
“폐하의 곁을 오래 비울 수는 없어. 하는 일도 없는 호위기사단장이라고 책 잡히기 싫단 말이야. 가뜩이나 귀족 회의에서 주시하는데.”
바스티안이야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그가 귀족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밀어붙였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이 됐다.
“게다가 이 사건, 원래는 근위대 업무잖아. 규정대로라면, 인수인계 없이 보고서만 전달하면 끝인 거 알지?”
굳이 휴이터에게 직접 전하는 건, 배후가 그녀의 부친일지도 모른다는 심적 의심과 조사 과정에서 아벤토 후작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지켜주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어휴, 알았어, 알았다고.”
한숨을 폭 내쉰 휴이터가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이블린이 어린 동생을 보듯 웃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사건만 일으키려 한 거지, 진짜 아벤토 후작을 죽이려 한 건 아니었을 거야. 데보라에게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구인지부터 찾아야 해. 가족들은 궁에 있는 딸이 신경을 쓸까 봐 동생의 죽음을 숨겼다더라고.”
이블린은 최대한 성심성의껏 데보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후작의 이야기를 종합해 휴이터에게 전해주었다.
“그럼, 휴이. 이만 가볼게.”
핵심만 골라 전한 이블린이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데보라를 조사하느라 꽤 시간을 잡아먹었거든.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아, 그래. 새로운 게 나오면 또 공유할게.”
휴이터는 황제의 곁으로 가는 이블린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붙잡는다고 잡혀 줄 이블린도 아니고.
‘그래, 이건…… 일이니까. 이브는 일 때문에 가는 것뿐이야.’
애써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며. * * * 황제궁으로 향하던 이블린은 외진 길로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으으.”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이블린이 안심하고 기지개를 켰다.
“이 정도면 잘 마무리한 건가.”
정말 정신없고 바쁜 하루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최근 몇 달간 계속 그렇긴 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거면 모를까.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갈수록 더 명료해지는 기분이었다.
‘지난 2년을 생각하면, 지금은 행복하지.’
공작저에 스스로 갇혀, 손발을 묶인 채 자유롭지 못하던 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행복한 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 자유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폐하께 감사해야 겠…… 아.’
황제궁을 코앞에 두고 이블린이 걸음을 멈췄다.
“고마운 만큼 큰 상으로 보답해주리라 믿지.”
바스티안의 당부가 떠올랐다. 상. 또 무엇을 요구하시려나.
“나 너무 적응한 거 아닐까.”
그 속을 알 수 없는 상관에 적응해버린 저 자신이 놀라웠다. 하긴, 그 황제를 옆에 두고, 그의 품에 안겨 단잠까지 잤지.
‘그나저나, 어떤 얼굴로 봬야 하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바스티안을 어떻게 보나 걱정했는데, 큰일이 터지는 바람에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와 입을 맞춘 게 처음은 아니지만…… 구호 활동과 입맞춤을 구분도 못 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으니까.
“하아. 나답지 않게 충동적이었어.”
이미 일은 벌어졌고,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일까. 정 안되면 모르쇠로 일관하는 수밖에. 결심한 이블린이 황제궁 주변을 도는 기사단원을 붙잡았다.
“폐하는 어디에 계시죠?”
“아, 단장님. 폐하께서는 황제궁 주방에 계십니다.”
“……뭐? 거기는 왜?”
생각지도 못한 장소였다.
“요즘 한 번씩 들르십니다. 드시고 싶은 메뉴가 생각나면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난 왜 못 봤지. 그녀가 없을 때만 간다는 건데.
“그냥 밑에 전달하시면 되는데, 굳이 왜…….”
이블린이 의아해하며 주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절반의 성공, 인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티에르 공작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벤토 후작을 귀족 회의에서 내치려던 계획은 성공인데, 호위기사단장직은 결국 유지되는 거로 결론이 났다.
“뭐, 이 정도는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다행인 건 황후 취임과 두 사람의 결혼식에 대한 안건이 다음 회의로 밀렸다는 거였다. 당장 기사단장직에서 이블린을 끌어내리는 게 쉽지 않을 듯하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시점이었다.
“공작님, 알피도 자작이 도착했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해.”
공작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 .
“이블린을 만났다고?”
“네, 그렇습니다.”
이블린이 알피도 자작을? 왜?
“……그래, 내 딸 아이를 만나 보니 어떻던가?”
무심코 싸늘한 표정을 지을뻔한 티에르 공작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을 닮아 훌륭한 영애였습니다.”
외모는 전혀 안 닮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보석을 좋아하는 게 닮았달까. 알피도 자작이 진짜 감상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그렇군.”
“좋은 기회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하, 뭐 그런 서운한 말을. 딸 아이와 가깝게 지내며 소식도 전해주고 하게. 황궁으로 보내고 내가 많이 쓸쓸해.”
공작이 애써 연기를 이어갔다.
“염려 마십시오. 여기 이번 달 장부입니다. 지난번 주신 예산으로 품질 좋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구매했습니다. 서쪽 대륙에서 워낙 인기가 좋아서 부르는 게 값이라더군요.”
“그렇군.”
공작은 흡족한 마음을 누르며 차분한 척 목소리를 낮췄다. 티에르 가문의 재산을 불려주는 게 누구냔 말이야. 나 칼리아노 티에르지.
“아, 그리고 공작님.”
알피도 자작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길드에서 전해 온 소식인데, 최근에 그이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이라면.”
“네, 마차 사고의 목격자 말입니다.”
“…….”
자작은 딱딱하게 굳는 공작의 얼굴을 조용히 지켜봤다.
‘뭔가 구린내가 난단 말이지.’
그가 아내의 사고에 이토록 신경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캐낼 마음은 없었다. 개는 얌전히 명령이나 따라야 맞는 거지.
“찾는 이들은?”
“은밀하게 의뢰를 해 와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른답니다.”
……이블린인가. 그래, 인정하마. 내가 너를 너무 만만하게 봤구나.
“그냥 두라고 하게.”
공작이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이 또한,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 자작을 보내고 공작은 보좌관을 불러들였다.
“지난번에 내린 지시는 보류해야겠어. 일단은 건드리지 말고 계속 이블린의 움직임을 주시해서 보고하라고 해.”
“네.”
“그 창고에 대한 건, 뭐라던가?”
“찾지 못했답니다. 의심스러운 곳도 없고요.”
“흠.”
티에르 공작이 얼마 없는 수염을 매만졌다. 뭘까, 선대 황제가 거짓말을 한 건가. 확인이 필요한데.
“계속 찾으라고 해. 이번 일은 잡음이 생기지 않게 마무리 짓고.”
기사단장직을 유지해야겠다면, 이블린을 바쁘게 만들어 황제와 붙어 있을 틈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르다를 입적시켜야겠어.”
“공작가로, 말씀이십니까?”
“아니. 페런 백작가로.”
이블린이 황궁에 버티고 있는 이상, 마르다를 티에르 가문으로 입적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어차피 마르다를 황후로 만드는 게 목적이니, 꼭 티에르 이름을 달고 나가야 하는 건 아니지.
“이블린, 네게 주는 선물이다.”
이제와 네가 뭘 어찌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닫기를. * * *
“폐하?”
“아, 잘 맞춰서 왔네. 데리러 가려던 참인데.”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찾은 곳은 주방이 아닌 다이닝 룸이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야, 이블린.”
“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아.”
이블린은 바스티안의 뒤를 따랐다.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요리를 보니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황궁에 온 이후로 매일 좋아하는 음식만 먹다 보니, 전에 없던 식탐이 생기는 듯했다.
“이리 와.”
이블린의 팔을 끌어다 의자에 앉힌 바스티안이 따뜻한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폐하, 제가…….”
“가만히 있어. 오늘 힘들었을 테니까 지금부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마.”
“아.”
식사 시중을 들려고 대기하고 있는 시종들을 보며 바스티안의 의도를 이해한 이블린이 얌전히 손을 맡겼다.
“자, 됐다.”
이블린의 손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그녀의 손에 포크까지 쥐여준 바스티안이 제 자리로 가 앉았다. 자신의 자리라고 해 봐야 이블린의 바로 옆이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감히 황궁에서 그에게 그런 사실을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이블린은 진작에 포기한 부분이었고.
“얼른 먹어, 먹고 나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바스티안이 고기를 잘게 잘라 이블린의 접시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이요?”
이제는 퍽 자연스레 받아먹을 수 있게 된 이블린이 포크로 고기를 찍으며 되물었다.
“나랑 약속했잖아. 기사단장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면, 내게 상을 주겠다고.”
“아.”
포크 끝이 고깃덩어리 옆으로 미끄러졌다.
“잊은 건 아니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을 감싸 쥐어 포크질을 도우면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요, 기억합니다.”
“무슨 상을 달라고 할까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
긴장한 이블린이 말끝을 길게 늘이는 바스티안의 입술을 바라봤다.
“바바로아가 먹고 싶어. 복숭아가 들어간 거로.”
“……네?”
“그대가 만들어줬으면 해, 아, 커스터드 푸딩도 나쁘지 않겠어.”
이블린은 마른 침을 삼켰다.
“곤란해?”
“아뇨, 그게 아니라…….”
그녀가 유일하게 못 하는 것. 그게 바로 요리였다. 요리 수업이라고 해 봐야 간단한 디저트를 만드는 거였지만, 이블린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어쩌지? 못 한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이블린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예상치 못한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