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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둘만 있는데 어때 (31/95)

31. 둘만 있는데 어때2022.01.16.

16550807028684.jpg‘아, 고민한다.’

바스티안은 심각해진 이블린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물론 알고 꺼낸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티에르 가의 영애로서 철저하게 교육받아온 이블린이 유일하게 못 하는 게 무엇인지. 모든 걸 곧잘 해내던 이블린이지만, 요리만큼은 소질이 없었다.

16550807028684.jpg‘과연 뭐라고 할까.’

바스티안은 즐겁게 이블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못한다고 발을 빼도 귀여울 듯했고, 할 수 있다며 허세를 부려도 귀여울 듯싶었다. 이블린이 그의 앞에서 곤란해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이블린이 이런 속내를 알면 화를 내겠지만.

16550807028696.jpg“폐하.”

16550807028684.jpg“응.”

16550807028696.jpg“그러니까…… 꼭, 그걸 드시고 싶으신 건가요? 그런 거라면 제가 주방에 부탁해서…….”

16550807028684.jpg“그대가 만든 게 먹고 싶어.”

이런. 왜 하필, 하고 많은 것 중에서 그런걸? 솔직히 그간 그의 행적을 봤을 때, 손을 잡아 달라거나 그런 걸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16550807028684.jpg“괜찮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16550807028696.jpg“…….”

16550807028684.jpg“그냥, 아까 초상화를 보고 나니 옛 기억이 떠올라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좀 힘들었을 때, 누가 그걸 주면서 위로해 준 적이 있거든.”

16550807028696.jpg“아.”

이블린이 난처한 탄식을 흘렸다.

16550807028696.jpg‘나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 헤어지셨지.’

선황후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았을 어린 황태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아렸다. 그녀 또한 모친을 잃고 힘들었기에 잘 알았다. 바스티안은 붉은 입술을 말아 무는 이블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공작가에 드나든 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그래도 엄밀히 따지자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과일을 얹은 바바로아도, 커스터드 푸딩도. 전부 티에르 공작가에서 이블린과 즐겨 먹던 거였다. 그 시간 동안, 허한 마음을 위로받은 건 사실이니까.

16550807028684.jpg“역시, 어려운 부탁이었나.”

16550807028696.jpg“아니에요, 폐하.”

이블린은 어쩐지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리는 바스티안을 보며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16550807028696.jpg“제가, 그 맛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보겠습니다.”

이블린이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0807028696.jpg“어쨌든, 약속드린 거니까요.”

16550807028684.jpg“기대할게, 이블린.”

바스티안이 입꼬리를 미끈하게 끌어 올렸다. 처음부터 이블린을 괴롭히기만 할 목적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이블린이 꽁꽁 걸어둔 마음속 빗장을 하나씩 풀 수만 있다면. 어떤 사소한 계기라도 필요했다. 공작가에 숨어버린 이블린을 굳이 끌어다 옆에 둔 건, 단순히 그녀의 안전만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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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807057093.jpg“몇 번을 말해야 하죠? 잔을 쥐는 손 모양이 틀렸습니다.”

응접실에 매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접실이라고 해도 낡은 테이블이 전부인 좁은 공간이었다.

16550807057111.jpg“죄, 죄송합니다.”

16550807057093.jpg“사과할 때는 그렇게 목을 움츠리지 말라고도 말했지요, 마르다 양.”

16550807057111.jpg“…….”

아몬드 색의 눈동자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챙 백작 부인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16550807057093.jpg‘내가 돈만 아니었으면.’

한때는 황성에서 사교계를 주름잡던 그녀였다. 남편이 도박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여전히 황성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을 텐데. 시골까지 쫓기다시피 내려온 그녀의 요즘 일과는, 이 정체 모를 아가씨의 예절 교육을 담당하는 거였다. 백작 부인이 맞은 편에 앉은 마르다를 아래위로 훑었다. 깡마른 체구에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 노란 기를 띠는 얼굴 위에 잘게 퍼진 주근깨. 평범한 이 층짜리 집만큼이나 평범하고 특색 없는 외모.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만큼은 예외였다. 아마도 어느 고위 귀족의 숨겨진 딸인 게 틀림없었다. 저 곱슬머리를 묶은 리본에 달린 루비만 해도 그랬다. 대외용도 아니고, 집에서만 사용하는 리본에 보석을 박아 놓을 정도면 꽤 돈 좀 쓰는 아버지를 둔 모양이었다.

16550807057093.jpg‘나중에 보면 알겠지.’

어쨌든 그녀의 목표는 하나였다. 마르다를 어디에 내놓아도 망신당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귀족가의 영애로 만들어 놓는다면, 큰돈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꽤 오랜 시간을 가르쳤는데도 이 아가씨는 어째 발전이 없었다.

16550807057093.jpg‘도대체 누구 피를 물려받았기에 이 모양인지.’

백작 부인은 눈을 매섭게 떴다.

16550807057093.jpg“잘 들어요, 마르다 양.”

16550807057111.jpg“네, 백작 부인.”

16550807057093.jpg“내가 가르친 영애들은 어딜 가서 흠 잡혀 본 적도 없는 훌륭한 아가씨들뿐이에요. 내 수치가 될 생각은 하지 말아요.”

16550807057111.jpg“……네.”

16550807057093.jpg“내가 말했던가요? 그 유명한 티에르 공녀도 내게 교육받았다고요.”

실은 아주 오래전, 티에르 공녀의 교육을 맡은 가정 교사가 하루 병가를 내는 바람에 대신 가 준 것뿐이었지만.

16550807057111.jpg“티에르 공녀요?”

주눅 들어 있던 마르다가 고개를 휙 들며 관심을 내보였다.

16550807057093.jpg“그래요, 정말 그렇게 완벽한 영애는 본 적이 없어요. 곧 황후 폐하가 되신다지요? 장담하는데, 아주 훌륭한 황후가 되실 겁니다.”

16550807057111.jpg“…….”

마르다의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 황후 자리는 제 거거든요. 아버지가 저를 그 자리에 올려주기로 했지요. 이블린 티에르가 아니라, 나 마르다 티에르를. 큰소리치고 싶은 욕구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버지의 무서운 눈을 생각하니 참아졌다.

16550807111637.jpg“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돈 한 푼은커녕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라.”

  2년 전 이블린에게 편지를 보냈다가 매섭게 혼쭐이 났었지. 더는 부친의 눈밖에 벗어나는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 구질구질한 시골 바닥을 떠나야 하니까.

16550807057111.jpg“부인, 한 번만 더 가르쳐 주세요. 저 잘할 수 있어요.”

16550807057093.jpg“하아, 어디. 다시 한번 보지요.”

백작 부인이 콧잔등을 꾹꾹 눌렀다.

16550807057093.jpg“부디, 티에르 공녀의 반만 해줘도 좋겠군요.”

  * * * 그 시각. 백작 부인이 자랑하는 완벽한 영애, 이블린은 난감한 얼굴로 주방에 서 있었다.

16550807028696.jpg“음, 어쩐지 말려든 것 같은데.”

이블린이 한숨을 쉬었다. 아까, 바스티안이 황제궁의 주방에 있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바로 내려온 거였다. 그 짧은 시간에 재료부터 도구까지 완벽히 준비된 걸 보니 처음부터 그녀의 거절은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

16550807028696.jpg‘이제 어쩐다.’

알리에타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바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블린은 알리에타가 지금 바스티안의 명령으로 강제로 휴식을 취하며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었다.

16550807028696.jpg“폐하.”

등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에 이블린이 몸을 돌렸다. 바스티안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편한 옷차림이었다.

16550807028684.jpg“이블린, 머리 이렇게 둬도 괜찮아?”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가슴 언저리에서 흔들리는 백금발 끝을 손끝으로 쥐었다.

16550807028696.jpg“아, 묶을 거예요.”

16550807028684.jpg“이리 와, 내가 해줄게.”

조리대에 기대어 앉아 긴 다리를 쭉 뻗은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끌어와 제 다리 사이에 세웠다.

16550807028684.jpg“가만히 있어 봐.”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머리를 한 손에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 빗어 내렸다.

16550807028696.jpg‘읏.’

이블린은 자꾸만 흠칫하게 되는 몸을 참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굵은 손가락 끝이 목덜미를 스치는 게 느껴졌다. 알리에타나 다른 하녀들의 손길과는 달리 어설픈 움직임이 예민해진 감각을 더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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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07028684.jpg“됐다.”

이블린이 고민하는 사이 제 할 일을 마친 바스티안이 느슨하게 묶은 머리를 이블린의 한쪽 어깨로 내려주었다.

16550807028696.jpg“아, 감사합니다.”

이블린이 제 머리를 무심코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보는 바스티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16550807028696.jpg“바스티, 머리 묶어 줘.”

  몸가짐의 중요성을 교육받은 꼬마는 조금이라도 외향이 흐트러지는 걸 못 견뎌했다. 하녀들 몰래 숨어 숨바꼭질이라도 할 때면, 꼭 그에게 손을 내밀고는 했는데. 어설프게 묶어주고 나면 꼭 저렇게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16550807028696.jpg“폐하, 피곤하지 않으세요?”

16550807028684.jpg“왜?”

16550807028696.jpg“쉬고 계시면, 제가 만들어서 가져다…….”

16550807028684.jpg“이런, 이브.”

팔짱을 낀 바스티안이 이블린에게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

16550807028684.jpg“눈치가 없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16550807028696.jpg“그게 무슨…….”

16550807028684.jpg“데이트하려는 거잖아. 좀처럼 황궁 밖으로 나갈 시간을 만들기 어려우니까.”

아쉽다는 듯한 바스티안의 말에 이블린은 의아해졌다.

16550807028696.jpg“폐하, 저희는 매일 붙어 있는걸요?”

낮에도 밤에도 밥 먹을 때도. 씻을 때만 빼면 거의 늘. 굳이 데이트 같은 걸 할 필요가 있나요.

16550807028684.jpg“그거와는 다르지. 그건 일 때문이고, 지금은 개인 시간을 낸 거니까.”

16550807028696.jpg“…….”

의미가 다르다고?

16550807028696.jpg‘으음, 데이트라.’

어쨌든 그 단어를 듣고 나니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16550807028696.jpg“그럼 일단 달걀을…….”

중얼거린 이블린이 턱을 괸 채 지켜보는 바스티안의 시선을 의식하며 손을 뻗었다. 달걀 하나를 쥐어 볼에 내리치는 순간. 파삭 달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동시에 옆에서 쿡, 웃는 소리도 들렸다.

16550807028696.jpg“…….”

이블린은 어색하게 굳었다.

16550807057093.jpg“괜찮아요, 공녀님. 앞으로 요리하실 일이 있을 것도 아니고, 이건 수업의 일환일 뿐이니까요. 앞으로 주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자고요.”

  간단한 디저트를 만드는 건데도 실패하고 자존심 상해할 때마다 알리에타는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유모가 틀렸어. 내가 나이 먹고 요리를 하게 될 일이 있더라고. 차라리, 칼질하는 거면 나았을지도. 검술이랑 비슷하니까.

16550807028696.jpg“달걀 껍데기가 너무 얇네요.”

16550807028684.jpg“그래? 닭이 잘못했군.”

16550807028696.jpg“…….”

놀리는 말이었다. 이블린이 창피한 걸 참으며 입술을 꾹 물었다.

16550807028684.jpg“이블린.”

바스티안이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16550807028684.jpg“말했잖아, 어깨의 힘 좀 풀어도 된다고.”

새 달걀을 손에 쥐여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16550807028684.jpg“잘하려고 하지마, 그냥 즐겨.”

쿡 웃으며 속삭인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볼에 하얀 가루를 묻혔다.

16550807028696.jpg“폐하. 먹는 거로 장난치면…….”

16550807028684.jpg“뭐, 어때. 우리만 있는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턱을 부드럽게 쥐어 당겼다. 쪽. 살갗이 스치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16550807028696.jpg“폐하, 잠깐만요.”

다시금 입술을 벌리며 들어오는 열기에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어깨를 다급히 잡았다.

16550807028684.jpg“?”

바로 앞에서 보이는 바스티안의 회녹색 눈동자에 의문이 떠 있었다.

16550807028696.jpg“그러니까…….”

이건 좀 그래. 응, 안되고말고.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입맞춤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처음은 분위기에 휩쓸렸다지만, 두 번째가 되면 그때는 변명도 먹히지 않는 거니까.

16550807028684.jpg“……싫어?”

16550807028696.jpg“지금은 저희 둘만 있는 거잖아요.”

무슨 소리냐는 듯 바스티안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16550807028696.jpg“딱히 보여줘야 할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굳이 이런…….”

16550807028684.jpg“이블린.”

바스티안이 중얼중얼 변명하는 이블린의 입을 막았다.

16550807028684.jpg“우리가 입 맞추는 걸……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16550807028696.jpg“……네?”

이블린이 눈을 들어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이블린, 정말 그래? 그의 표정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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