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침대에서 만나2022.01.19.
잠깐. 지금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아니, 폐하, 뭔가 잘못 전달된 것 같습니다.”
이블린이 급히 목소리를 키웠다.
“그대에게 그런 취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바스티안이 곤란하다는 듯 입가를 가렸다.
“음, 나는 그런 취미는 없는 데 말이야.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맞춰줄 수도…….”
“폐하, 잠시만 제 이야기를 좀.”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손을 붙잡으며 애타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멋대로인 황제가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기 전에 오해를 풀어야 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바스티안은 코앞까지 다가온 먹잇감을 힐끔 내려다봤다. 그의 다리 사이에 선 이블린이 덫인 줄도 모르고 들어온 새끼 호랑이처럼 보였다.
“굳이 연기해야 할 상황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뜻이었어요.”
이블린이 조금 차분해진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연기.”
바스티안이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연기, 라.”
“…….”
“이블린.”
“네, 폐하.”
“어젯밤에도 설마, 연기라고 생각해서 응했어?”
“…….”
“난 아니었는데.”
겨우 묻어 놓은 기억을 끄집어내 지적하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의 말문이 막혔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지 않나.”
이블린에게 잡혔던 손목을 빼낸 바스티안이 역으로 이블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얽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야.”
“…….”
이블린의 고개가 휙 들렸다. 하고 싶으니까 한다고?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바스티안은 시시각각 변하는 이블린의 표정을 지켜봤다. 이블린이 아무리 냉정함을 유지하려 해도, 그의 눈에는 미세한 변화가 전부 보였다. 이블린은 그의 말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이블린.”
바스티안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이블린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정말,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내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입술 바로 위에서 멈춘 뒤 속삭였다.
“왜 처음부터 내가 그대에게 이런 계약을 제안했을까.”
“!”
바스티안의 회녹색 눈동자에 짙은 감정이 일렁였다.
“지금부터 잘 생각해 봐.”
* * * 캄캄해진 밤. 황궁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정원에 까만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주변을 휘휘 살핀 그림자가 덤불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작은 손이 조심스레 바닥을 더듬을 때였다.
“거기 누구지?”
멀리서 경계심 가득한 근위병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크.’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그림자가 몸을 웅크리며 숨을 참았다.
“……고양이인가?”
근처 덤불을 칼끝으로 쿡쿡 찌르기도 하고 헤쳐보던 사내가 다시 멀어졌다.
‘휴우.’
인기척이 멀어지고서야 그림자는 다시금 바닥을 더듬었다. 그러다 작게 뭉친 쪽지를 찾아냈다. [계획 변경. 동향 감시. 장소 파악.] 내용을 확인한 그림자의 입속으로 쪽지가 사라졌다. * *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요!”
황제의 부름에 침실로 달려온 알리에타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소중한 보물인 공녀님이 온몸에 하얀 가루와 크림을 덕지덕지 묻힌 채 서 있었다.
“음, 그게.”
이블린이 멋쩍어하며 볼을 긁적였다.
“저는 분명히 디저트를 만들러 가신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입이 아니라 몸으로 먹었지.”
침실에서 머리를 털며 걸어 나오던 바스티안이 대답을 대신했다.
“폐, 폐하!”
알리에타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황제의 모습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저 존귀한 몸에 대체 이 무슨!
“재료가 아주 신선했어. 안 그래?”
바스티안이 동의를 구하듯 이블린을 보며 씩 웃었다.
“폐하께서 방해만 안 하셨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 바스티안을 보는 이블린의 눈초리가 불퉁해졌다.
“자, 그럼 하던 걸 계속해야지?”
이블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빨리 요리를 계속하라며 재촉했다. 재촉만 했으면 다행이었다.
“이블린, 순서가 그게 맞는 거지?”
“오늘 내로 먹을 수는 있는 건가?”
“지금 혹시, 독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나? 그래?”
엉망진창이 된 몸은 그의 말에 휘말려 좌충우돌한 결과였다.
“욕조에 물부터 받아 놓을게요. 어휴, 이 모습을 본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아랫사람들이 무어라 생각할는지. 두 사람을 황망하게 보던 알리에타가 허둥지둥하며 사라졌다.
“걱정이 많은 게 꼭 그대와 같네.”
알리에타의 뒷모습을 본 바스티안이 이블린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블린의 턱을 쥔 바스티안이 그녀의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니면, 그대가 그대의 유모를 닮아 걱정이 많은 건가.”
그리고 이블린의 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
느른한 손길에 이블린이 볼을 감싸 쥐며 한 걸음 물러섰다.
“크림. 아직 묻었길래.”
그런 이블린을 보며 바스티안이 느긋하게 제 엄지 끝을 핥았다.
“맛은 있네.”
싱긋 웃은 바스티안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침대에서 만나, 이블린.”
. .
“어린아이도 아니고, 두 분 대체 뭘 하신 거예요?”
“바바로아를 만들려고 했지.”
이블린의 속눈썹이 팔랑거리자 하얀 가루가 허공에 날렸다.
“세상에, 이 머리가 어떤 머리인데, 달걀이 다 묻었잖아요?”
“왜, 머릿결도 좋아지고 잘 됐지 뭐.”
“공녀님!”
어휴, 말이나 못 하시면. 알리에타가 씩씩대며 이블린의 엉킨 머리를 푸는 데 집중했다. 알리에타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블린은 눈을 비볐다. 요리하던 중반 즈음부터 디저트를 얻어먹기는 틀렸다 싶었는지, 바스티안은 다짜고짜 그녀의 얼굴에 크림 세례를 선사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블린 또한 지금의 알리에타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기껏 준비해둔 재료가 아깝잖아.”
“…….”
“억울하면 그대도 해.”
계속 살살 긁으며 시비를 거니 그만 욱하고 말았다. 결국, 막판에는 바스티안이 걸어온 싸움에 진지하게 응하고 말았지만.
“유모.”
“네에.”
알리에타의 대답이 아직도 까칠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알리에타의 손이 멈췄다.
“웃고 떠든 것도 꽤 오랜만이고.”
“…….”
“처음에는 몰랐는데, 꽤 짓궂고 장난기도 많으셔서. 좀…….”
생각할수록 모든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 같아.”
이블린이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이블린의 웃음소리에 알리에타는 코끝이 매워졌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이에요.”
에휴, 사는 게 뭔지. 짠한 분들 같으니라고. 그래서 잔소리는 이쯤에서 넣어두기로 했다. * * *
“그러니까, 허리를 세우고, 턱은 살짝 당기면서…….”
마르다가 챙 백작 부인에게 배운 걸 떠올리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털썩. 머리 위에 올려둔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참.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몸에 짜증이 났다. 자리에 그대로 풀썩 주저앉은 마르다가 발을 동동 구를 때였다. 쿵쿵.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늦은 밤, 여자 둘만 사는 집을 찾아올 이가 누가 있을까.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마르다가 걸음을 멈췄다.
“문 두드리지 말라니까는.”
“아, 깜빡했어.”
모친의 교태 섞인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최근 옆 마을 목수와 가까이 지내는 것 같더니만, 결국 눈이 맞았나 보다. 숙덕대던 두 사람이 곧 함께 집을 나섰다.
“내가 그토록 안 된다고 일렀는데도. 하아, 아버지가 알면 용서하지 않으실 텐데.”
마르다가 불안하게 창밖을 응시할 때였다. 쿵쿵. 다시 손님이 찾아왔다.
“누, 누구시죠?”
“……공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에 마르다가 문을 벌컥 열었다. 부친이 종종 보내는 이였다. 어머니를 봤을까? 못 봤어야 하는데. 마르다의 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들어오세요.”
“짐을 싸셔야겠습니다.”
닫힌 문 앞에 선 사내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짐, 이요?”
마르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도 이제 공작가로 가는 건가요? 아버지께?”
오래도록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아닙니다, 페런 백작가로 가실 겁니다.”
“네? 왜 공작가가 아니죠?”
“……그냥 따르시면 됩니다.”
마르다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부친이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이런 명령을 내릴 때마다 화가 났다. 백작가로 보내는 이유야 보나 마나 뻔했다. 이블린 티에르가 황궁으로 갔으니까. 똑같은 아버지를 뒀는데, 누구는 공작 영애고 누구는 백작 영애. 이게 뭐람, 후작가도 아니고 백작가라니! 느낌부터가 다르다고, 느낌부터가.
“……알겠어요.”
그렇다 해도 따르지 않으면 그녀의 손해였다.
“참.”
이 층으로 올라가려던 마르다가 몸을 돌렸다.
“아버지께 부탁 좀 드려 주세요.”
“……일단 말씀해 보시지요.”
“어머니를, 해결해 달라고요.”
“…….”
“나중에 문제가 될 싹은 미리 잘라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말에 담긴 뜻이 명료했다. 할 말을 마친 마르다가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이 층 계단을 올랐다. 미래의 황후가 될 텐데, 어머니 문제로 발목을 잡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손.”
침대에 누운 이블린은 그녀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드는 커다란 손을 보며 난감해졌다.
“결국 디저트는 못 먹었으니까, 상은 이걸로 대체해야지.”
가만히 있으니 손가락이 까딱였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블린은 따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앞으로 잘 때마다 손을 잡는 것으로 해.”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이블린은 얌전히 바스티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감싸 쥐어 오는 커다란 손의 뜨거운 온기도 퍽 익숙해졌다. 같은 침대를 쓰는 것도 이렇게 익숙해지려나.
“이블린, 오늘 고생 많았어.”
으음, 무엇을요? 요리하다가 밀가루를 뒤집어쓴 거? 아니면, 아벤토 후작 사건에 관한 이야기인가?
“오늘 또 한 번 생각했어. 그대에게 호위기사단장직을 맡기길 잘했다고.”
“…….”
이블린은 슬쩍 고개를 틀어 옆을 바라봤다. 바스티안이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내내 놀리다가 이렇게 한 번씩, 사람을 감동하게 한단 말이지. 그에게 인정받으니 마음이 좀 뭉클해졌다. 바스티안의 미동이 없는 걸 확인한 이블린이 아예 바스티안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의 말이 머리에 콕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어?”
당연히 의아하긴 했었다.
“왜 처음부터 내가 그대에게 이런 계약을 제안했을까.”
약속한 상대가 있어서 그런다니까,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
혹시 그 상대가 나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설마…… 진짜로? 이블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