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진짜 남편이라면?2022.01.23.
‘……그럴 리가.’
이블린은 새어 나오려는 조소를 참았다. 딱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애정을 가질 계기나 이유가 없었다. 그간 접점이 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랬더라면, 굳이 이런 계약을 제안하지도 않았겠지. 호위기사단장직에 앉힐 이유도 없고, 굳이 이렇게 돌아오는 길을 선택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래도, 내게 호의적이신 건 나쁘지 않아.’
확실히 그랬다. 이 계약에서 그녀는 엄연히 바스티안에게 특혜를 입은 ‘을’의 입장이니까. 이블린은 바스티안의 반듯한 이마부터 선이 또렷한 입술까지 차례로 관찰했다. 평소 같으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만약 이게 계약이 아니라 진짜라면 어땠을까.’
이블린은 처음으로 새로운 가정을 해보았다. 연애는 자유롭게 해도 된다지만, 그녀나 황제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당연히 결혼이 전제될 터.
‘결혼이라.’
이블린은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결혼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가주가 된다면, 가문을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하긴 하니까. 결혼하지 않고 방계의 누군가를 입양해 후계로 키워도 되지만, 그럴 때는 여러모로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친부모 쪽에서 한몫 챙기려 하다 보니 분란이 생기기도 하고. 깔끔한 건 역시 내 아이에게 물려주는 거였다. 이블린이 몸을 빙글 돌려 엎드린 자세로 진지한 고민을 이어갔다.
‘만약 이게 진짜 결혼이라면?’
황제라는 것만 빼면 바스티안은 꽤 괜찮은 파트너기는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랑 지내는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남편이라면 재미있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냉정하게 따져 보자면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겼고, 똑똑한 데다, 능력도 있고. 진짜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꽤 훌륭한 후계자가 될지도.
‘너무 나갔어.’
아이의 얼굴까지 상상해보던 이블린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계약 기간이 끝나면 깔끔하게 헤어질 사이인걸. 무엇보다 상대는 황제였다. 황후를 들이고 진짜 후계를 봐야 하는 게 그녀보다 더 중요한 사람. 만약 그와 진짜 부부가 된다면, 그녀는 티에르 가문의 가주 보다도 제국의 황후로서 살아가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아직 황후가 가문의 작위를 가져간 사례는 없기도 하고. 이블린은 단단히 얽혀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보다 훨씬 크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
“커스터드가 너무 달아.”
손가락 끝을 입으로 가져가 물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요?”
“요리하면서 맛보는 건 기본이지? 직접 먹어 봐.”
그리고 그 손가락이 다시…….
“…….”
입술 사이로 들어와 혀끝을 누르던 감각이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블린이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 할 때였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무의식에 붙잡는 건가. 몇 번 빼내 볼까 시도하던 이블린은 포기하고 얌전히 몸을 바로 하며 누웠다. 어쩐지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그래, 가급적 맞춰주자.’
일단은 계약 기간 만큼은 그가 그녀에게 호의를 가진 게 좋았다. 응,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야. 계약을 위해서야. 그래도 침대는 좀 더 큰 거로 바꿔 달라고 해야지. 이블린은 맞닿은 손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 * * 다음 날 아침.
“폐하, 오늘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평소와 다름없이 어미 새처럼 제 앞에 음식을 놓아주는 바스티안을 보던 이블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데?”
“공작가에서 데려온 아이요, 이번 후작 사건에 연루된. 그 아이 좀 만나서 달래주려고요.”
“그래, 다녀와.”
바스티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응? 왜? 더 할 말이라도?”
“……아뇨.”
이블린은 깔끔하게 손질된 바스티안의 머리를 보는 척하다가 시선을 내렸다. 어제 그렇게 신경 쓰이는 발언을 해놓고, 황제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좀 평소보다 느긋하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이블린은 바스티안에게 자꾸만 쏠리는 신경을 끊어냈다. . .
“공녀님!”
황제궁 내의 작은 정원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에바가 조르르 달려왔다.
“에바, 좀 쉬었니?”
이블린이 그런 에바에게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에바가 데보라를 잡는 데 큰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범인과 단둘이 있었다는 게 문제가 됐다. 덕분에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나온 에바를 격려하고 위로하려 준비한 자리였다. 알리에타가 전해 준 말도 내내 마음에 걸렸고.
“상처는 괜찮니?”
“아이, 그럼요.”
“네가 큰일을 했구나.”
“헤헤.”
에바가 뿌듯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큰 상을 받게 될 거야.”
“음.”
“……기쁘지 않니?”
에바의 반응이 어쩐지 시큰둥했다.
“저는 그런 상보다는, 예전처럼 공녀님 곁에서 공녀님을 모시고 싶어요.”
우물쭈물하던 에바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런, 에바.”
이블린이 혀를 작게 찼다.
“지금 직무가 마음에 들지 않니? 혹시 황궁에서 지내는 게 어려워?”
“아녜요!”
에바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절 황궁에 데려와 주신 것도 감사하지만, 저는 역시 공녀님 곁이 좋아요.”
에바가 이윽고 손가락을 꼼질대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 두들겨 맞고 아플 때,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던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그때부터, 저는 공녀님께 충성하기로 마음 먹었는걸요.”
“난 당연한 일을 한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에바. 네 마음은 고맙지만, 청을 들어주기는 어려워, 미안해.”
에바의 동그란 눈에 실망이 들어찼다.
“너무 실망하지 말았으면 해.”
“…….”
“그리고 앞으로는 위험한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고.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다치지 않았을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이블린이 에바의 손등을 톡톡 달래듯 도닥였다.
“며칠 푹 쉬도록 해.”
“네, 공녀님.”
서운한 기색을 애써 숨기려 하는 에바를 보며 이블린은 푸스스 웃었다. 그렇게 에바와 얼마간의 대화를 나눈 뒤. 에바가 떠나고 난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블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리에타.”
“네.”
“에바를 혼자 두지마, 영민한 아이와 짝을 지어 움직이게 해.”
“네, 그럴게요.”
이블린이 한숨을 폭 내쉴 때였다.
“단장님!”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오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블린이 새로운 손님을 맞았다.
“키르아에서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의뢰를 맡긴 후부터 매일 보고서를 받던 차였다.
“알피도 자작이 아버지를 만나는 건 예상했던 부분이고.”
보고서를 빠르게 훑던 이블린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목격자, 진짜를 찾았군요.”
“네, 예전에 알아보라 하신 쪽은 단장님의 예상대로 연막이었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살아서 꽤 애먹었답니다.”
“고생했겠네요, 인센티브를 더 주도록 해요.”
이블린의 한쪽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 * *
“폐하, 기사단 오후 훈련 시간이라, 잠깐 확인만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감사합니다.”
딱딱한 말투로 보고를 마친 이블린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블린의 움직임을 따라 하나로 묶은 백금발이 말 꼬랑지처럼 흔들렸다. 곧 이블린이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아무리 봐도 화난 것 같은데.”
픽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바스티안이 조금 전 이블린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폐하, 황궁을 며칠 비워도 될까요?”
“안 돼.”
“폐하, 기사단 업무는 문제가 없게끔…….”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대가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게 싫은 거야. 말했을 텐데?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고.”
“폐하.”
“안 돼. 걱정되니까.”
그의 말에 이블린의 표정이 오묘하게 굳었다. 아마도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는 거라 여겼을 터.
“이블린, 계약 내용을 잊었어? 이럴 때 사용하라고 기사단을 내 허락 없이 움직여도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지.”
“…….”
“아니면, 그대의 수하들을 믿지 못하는 건가?”
“아닙니다.”
수긍한 것처럼 물러섰지만, 속으로는 서운했을 거다. 이블린이야 티를 안 낸다고 노력했겠지만…… 어쩌나, 훤히 보이는데.
“폐하, 다트입니다.”
“아, 마침 잘 왔어.”
턱을 괸 채 문을 보고 있던 바스티안이 몸을 바로 했다. 몇 개의 작은 바구니가 담긴 트롤리를 끌고 온 다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다가 단장을 만났는데…… 음, 두 분,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내가 이블린을 서운하게 했거든.”
“싸우셨군요.”
말린 약초와 꽃잎을 넣어 만든 차를 통에 채워 넣던 다트가 껄껄 웃었다.
“그래서, 뭐 때문에 싸우셨습니까?”
. .
“어이쿠, 이유도 안 들어보시고 다짜고짜 안 된다고 하셨단 말입니까? 단장이 서운해할 만하지요.”
자초지종을 들은 다트가 티포트에 가져온 차를 넣으며 핀잔했다.
“물론, 불허하신 건 잘하셨습니다. 지금 같은 때에 떨어져 계신 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칭찬과 비판, 둘 중에 하나만 하도록 해.”
“그럼 칭찬으로 하겠습니다.”
다트가 짙게 우린 차를 바스티안의 책상 위에 놓아주며 웃었다.
“지금의 단장은 폐하의 몸에서 억지로 떼어낸 분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블린의 몸에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정령의 기운을 다시 찾아오는 거였다.
“이론상으로는 쉽지만,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지요. 요 몇 달, 폐하께서 곁에 계신 덕분에 그나마 기운이 안정화된 거고요.”
한 마디로, 이블린의 몸에 스며든 기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가장 쉬운 건 역시 진짜로 아이를 낳는 거긴 합니다. 그럼 자연스레 아이에게로 기운이 전부 넘어갈 테니까요.”
“안 돼.”
바스티안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만약 이블린이 그의 모친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단장에게 의외로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랬다면, 진작 알았겠지. 기억을 잃는 부작용도 없었을 테고.”
더는 쓸데없는 소리는 꺼내지도 말라는 듯 차가워진 황제를 보며 다트가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아끼시면서, 왜 서운하게 하셨습니까.”
“아.”
차를 한 모금 마신 바스티안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이블린이 쌓아 둔 담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데, 모처럼 좋아진 분위기를 그의 손으로 망가뜨릴 마음은 없었다.
“꽃에 물을 주는 중이지.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라고.”
“그게 무슨…….”
“지금은 여기에다 뿌리를 내려도 될지, 꽃을 피워도 될지 고민하는 게 보이거든.”
이블린이 가끔 그의 눈치를 보는 것도, 할 말을 참는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간 망할 티에르 공작이 날개를 펼칠 수 없게 막아놓은 탓이겠지.
“이블린이 내게 대드는 걸 보고 싶어서.”
바스티안이 찻잔을 다시금 쥘 때였다. 집무실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폐하.”
곧 이블린이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사뭇 우렁찬 목소리였다.
“봤지?”
바스티안이 다트를 향해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