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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입술로 때우든지 (34/95)

34. 입술로 때우든지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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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티안이 다트와 대화를 나누는 때. 이블린은 터덜터덜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스티안의 예상과 달리, 이블린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실망했을 뿐. 칼같이 거절하는 바스티안에 순간 서운함을 느낀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황제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16550807796304.jpg‘생각이 짧았어.’

이블린의 동그란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호위기사단장이라는 직책보다 그녀의 개인적인 일을 우선한 게 마음에 걸렸다. 호위기사단장의 역할이 무엇인가, 황제를 잘 보필하는 거였다.

16550807796304.jpg‘걱정돼서, 라는 건…… 역시 내 실력을 의심하시는 걸까?’

처음부터 실력을 검증하고 기사단장에 임명된 것도 아니니까. 다른 기사들처럼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고, 매년 열리는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가 무턱대고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16550807796304.jpg‘그래, 일단은 임신한 거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래서겠지.”

그가 걱정하는 것도 그런 부분일 테고. 이블린은 한없이 깊은 땅굴까지 내려가려는 생각을 다잡았다.

16550807796304.jpg‘그래도, 이건 내가 직접 가야 해.’

그녀는 마차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녀만이 확인 가능한 부분들이 있었다. 다른 이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16550807796304.jpg‘폐하를 어떻게 설득하지.’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믿음과 신뢰를 얻어낼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16550807796329.jpg“이브?”

누군가 이블린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16550807796304.jpg“아, 휴이.”

뒤를 힐끔 본 이블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16550807796329.jpg“마침 단장실로 가던 길이었는데. 자, 받아. 아벤토 후작 사건 관련해서 정리한 서류야.”

16550807796304.jpg“아, 고마워.”

16550807796329.jpg“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16550807796304.jpg“응? 아니야.”

16550807796329.jpg“……그래? 지금 어디 가는 건데?”

별일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는 이블린을 본 휴이터가 일단 옆에 따라붙었다.

16550807796304.jpg“연무장. 곧 기사단 훈련 시간이라.”

16550807796329.jpg“그렇구나. 아, 옛날 생각난다. 우리 맨날 공작가 숲에 숨어서 훈련했잖아.”

16550807796304.jpg“그랬지.”

이블린이 휴이터를 따라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16550807796329.jpg“사람들이 알까, 티에르 공녀가 실은 내기 광이라는 거. 뭐만 하면 내기 걸었잖아, 너.”

대련해서 진 사람이 물 떠오기 같은 소소한 내기였는데, 갈수록 판이 커졌던 게 기억이 났다. 처음에는 일부러 져줬는데, 언젠가부터는 진심으로 상대해야 할 만큼 이블린의 실력이 금방 늘어서 감탄했던 것도.

16550807796329.jpg“나한테 고마워해라, 이브. 네 검술 실력이 일취월장한 건 다 이 훌륭한 스승님을 둔 덕분이니까.”

16550807796304.jpg“……휴이.”

가만히 듣고 있던 이블린이 걸음을 멈췄다.

16550807796329.jpg“응?”

16550807796304.jpg“네가, 아카데미 수석 졸업이지?”

검술 실력으로는 제국 내에서 휴이터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들었다. 매해 개최되는 검술 대회에서도 연달아 세 번이나 우승했고. 휴이터가 근위대장이 된 건 그 영향이 컸다.

16550807796329.jpg“그렇지?”

휴이터가 뿌듯함을 숨기지 않았다. 이블린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죽을 만큼 고생한 결과라는 건 비밀이지만.

16550807796304.jpg“혹시, 폐하의 검술 실력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16550807796329.jpg“……어?”

16550807796304.jpg“정령술을 쓰시니까, 굳이 검까지 완벽하게 다루실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보이지 않는 꼬리를 붕붕 흔들던 휴이터가 시무룩해졌다. 요즘의 이블린은 만날 때마다 황제 이야기뿐이었다.

16550807796329.jpg“기본적으로 제왕 교육을 받으시니…… 그런데, 그건 왜 물어?”

16550807796304.jpg“휴이,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머릿속이 반짝반짝했다. 드디어 해결책을 찾은 듯했다.

16550807796329.jpg“뭐? 야, 어디 가는데?”

16550807796304.jpg“폐하께! 계속 조사 상황 공유하자!”

16550807796329.jpg“이브? 나, 아직 아무 대답 안 했는…….”

손을 휘휘 내저은 이블린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찝찝했다. 이블린은 답지 않게 한 번씩 무모한 일을 저지르는 때가 있으니까.

16550807796329.jpg“뭐, 괜찮겠지?”

여긴 황궁이니까. 휴이터가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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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807874279.jpg“폐하.”

훈련을 통솔하던 오단이 나란히 나타난 바스티안과 이블린을 보며 자세를 고쳤다.

16550807874283.jpg“잠깐 연무장 좀 빌리지.”

16550807874279.jpg“네?”

16550807874283.jpg“대련 좀 하려고.”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하는 말에 오단의 시선이 이블린에게 향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했다.

16550807874283.jpg“단장이 요즘 훈련에 참여를 못 하니 좀이 쑤시는 모양이야.”

바스티안이 덧붙이는 말에 이블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은 짐짓 근엄한 표정이었지만, 바스티안은 그 눈동자에 맴도는 생기를 알았다.

16550807796304.jpg“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집무실로 돌아온 이블린은 재미있는 말을 꺼냈다.

16550807874283.jpg“뭐지?”

16550807796304.jpg“제 실력이 못 미더워 보내주실 수 없는 거라면, 증명하겠습니다.”

16550807874283.jpg“…….”

16550807796304.jpg“저랑, 검술 대련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16550807874283.jpg“좋아.”

  호기롭게 건네는 도전장에 흔쾌히 응한 참이었다.

16550807874283.jpg“대신 기사단의 훈련을 방해했으니, 대련을 지켜보는 건 허락해주지.”

16550807874279.jpg“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자, 다들 훈련 중지!”

오단이 즐거워하며 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16550807796304.jpg“폐하,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이블린은 부지불식간에 연무장 주변으로 흩어져 자리 잡는 단원들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대련을 제안한 건 그녀지만, 설마 다른 이들 앞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가짜인데도 표면상 임산부라는 걸 그녀보다 더 신경 쓰는 황제였으니까.

16550807874283.jpg“준비됐지?”

바스티안이 그런 이블린의 손을 잡고 연무장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16550807874279.jpg“뭐야, 진짜 두 분이 대련하시는 거야?”

16550807874279.jpg“지금 단장님은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16550807874279.jpg“폐하께서 용케 허락하셨네.”

웅성대는 소리가 이블린의 귀에 쏙쏙 날아와 박혔다.

16550807796304.jpg“폐하.”

이블린이 어쩌려고 그러냐는 듯 바스티안을 초조하게 불렀다. 설마, 정말 황궁 밖으로 보내기 싫어서 이러시는 걸까? 그런 치사한 수를 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16550807874283.jpg“오단, 그대의 검을 빌리지.”

바스티안이 오단에게서 검을 건네받은 뒤 가볍게 휘둘렀다.

16550807796304.jpg“진짜 이대로 하시려고요?”

16550807874283.jpg“요즘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며 투덜댄 건 누구였지?”

이블린이 속삭이듯이 묻자 바스티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16550807874283.jpg“자, 이브. 시작하기 전에, 중요한 걸 정하자고. 내기엔 응당 거는 것이 있어야지.”

16550807796304.jpg“……그렇죠.”

이블린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변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었다.

16550807874283.jpg“그대는 자유롭게 운신하는 걸 허락해달라 할 테고.”

바스티안이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16550807874283.jpg“그럼 나는 무얼 걸어야 맞을까.”

바스티안이 검을 지팡이처럼 바닥에 대고 세우며 고민했다.

16550807874283.jpg“좋아, 결정했어.”

바스티안이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비싸게 주고 마련한 검이 상할까 우려하던 오단이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50807796304.jpg“폐하께서 원하시는 건요?”

16550807874283.jpg“비밀이야.”

16550807796304.jpg“네?”

16550807874283.jpg“싫으면 대련도 취소하고.”

16550807796304.jpg“……아뇨, 좋습니다.”

잠시 고민한 이블린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기면 그만이니까.

16550807874279.jpg“두 분 명심하십시오! 임신 초기에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됩니다!”

가장 가까운 관중석에 자리 잡은 다트가 크게 소리쳤다.

16550807874283.jpg“아, 그렇지. 우리의 아기 때문에 그대는 움직이기가 조심스러울 테니까, 나도 페널티를 적용하지.”

바스티안이 큰일 날 뻔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연무장을 둘러싼 기사단에게 들리기에는 충분했다. 바스티안이 검 끝으로 자신을 둘러싼 커다란 원을 그렸다.

16550807874283.jpg“나는 이 선을 벗어나지 않을 거야.”

성인 남자 다섯 명 정도가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16550807874283.jpg“그리고 한 손만 사용하도록 하지.”

16550807796304.jpg“……아.”

이블린이 탄식했다. 기사단원들에게는 이 대련이 정당해 보이겠지만, 진실을 아는 이블린에게는 퍽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살짝 불안해지기도 했고. 어쨌든, 절대 봐주지 말아야지. 임산부 흉내는 내야 하니 무리는 못 하겠지만, 그 정도 페널티쯤이야. 여기서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바스티안의 인정을 받고 말 거다.

16550807796304.jpg“폐하, 저 정말 전력을 다할 거예요.”

양심 없다고 뭐라 하시면 안 됩니다. 경고한 이블린이 호기롭게 검을 들었다. . . 그리고 잠시 후.

16550807796304.jpg‘말도 안 돼.’

이블린은 허공을 날아 연무장 끄트머리에 떨어져 박힌 제 검을 보며 좌절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심지어 몇 번 합을 받아주는 것 같던 바스티안은,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다.

16550807874283.jpg“약속은 잊지 않았지?”

시무룩해진 이블린에게 다가온 바스티안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16550807874283.jpg“상은 기꺼이 받아가지.”

이블린의 턱을 가볍게 쥐어 당긴 바스티안이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주변에서 숨을 들이켜거나, 짧게 환호하다 눈치 보듯 입을 다무는 소리가 들렸다.

16550807874283.jpg“이게 내 조건이야,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입 맞추는 것.”

16550807796304.jpg“…….”

16550807874283.jpg“기분이 좋아졌으니까, 그대가 궁 밖으로 조사를 나가는 건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일으켜 세우고는 유유히 멀어졌다. 이블린은 오단에게 검을 넘겨주고 가버리는 바스티안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 이블린의 주변으로 기사단원들이 모여들었다.

16550807874279.jpg“단장! 역시, 대단합니다.”

16550807796304.jpg“?”

16550807874279.jpg“폐하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잠깐이나마 단장 실력을 의심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16550807796304.jpg“……뭐죠, 이 반응은?”

요란하게 추켜세우는 말들에 이블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16550807874279.jpg“아시잖습니까, 폐하께서는 정령의 힘을 담아 검기를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16550807874279.jpg“네, 그분을 검으로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16550807874279.jpg“그런 폐하께 대련을 청하다니, 우리 단장님. 용맹한 기사라니까!”

16550807796304.jpg“……!”

아차, 속았다.

16550807874279.jpg“……단장님? 설마, 모르셨습니까?”

16550807796304.jpg“왜, 왜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16550807874279.jpg“그야…….”

서로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눈을 끔뻑였다.

16550807874279.jpg“안 물어보셨으니까요?”

이런. 어쩐지 대련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더라니. 허탈해진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뒷모습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능청스러운 상관이 조금 얄미워지려 했다. 한편으로는 훈련 상대가 되어주겠다는 말이 그냥 한 건 아니었구나 싶었고. 마침 뒤를 돌아본 바스티안과 눈이 마주쳤다.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보니 씩 웃은 바스티안이 무어라 벙긋거렸다.

16550807874283.jpg‘그러게, 나한테 관심 좀 두지 그랬어.’

이블린이 헛숨을 뱉었다. * * *

16550807874283.jpg“이블린, 그대의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일을 못 하겠는데.”

업무를 보던 바스티안이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읊조렸다.

16550807796304.jpg“……너무하세요.”

집무실 한편에 서서 바스티안을 노려보던 이블린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16550807874283.jpg“다 알고 덤빈 거 아니었어?”

바스티안이 태연하게 물었다. 이블린은 퍽 억울한 모양이었다. 똑똑하다가도 한 번씩 순진해지는 게 아주 귀엽단 말이지.

16550807874283.jpg“너무 실망하지마, 2년간 이 정도까지 실력을 키웠으면 대단한 거야.”

놀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16550807796304.jpg“……감사합니다?”

16550807874283.jpg“별말씀을.”

16550807796304.jpg“위로는 전혀 안 되지만요.”

16550807874283.jpg“앞으로는 내게 관심 좀 더 가져보고.”

16550807796304.jpg“네, 명심하지요.”

이블린의 불퉁한 말에 바스티안의 웃음이 샜다.

16550807874283.jpg“이블린, 그렇게 황궁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 내게 대련을 신청할 만큼?”

16550807796304.jpg“……네.”

처음으로 바스티안의 시선이 서류에서 떨어졌다.

16550807796304.jpg“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네. 꼭 다녀오고 싶어요.”

입꼬리를 끌어올린 바스티안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16550807874283.jpg“……이블린, 우리가 계약조건을 정할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16550807796304.jpg“…….”

이블린은 티하우스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봤다. 덜컥, 어느 시점에서 생각이 멈췄다.

16550807874283.jpg“자, 이블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도록 해. 폐하. 그냥 들어주시면 안 돼요? 이블린은 그렇게 하고 싶은데.”

  설마, 그건가? 이블린이 미간을 좁혔다.

16550807796304.jpg“폐하.”

16550807874283.jpg“그쪽이 싫으면 입으로 때우는 다른 방법도 있어.”

바스티안이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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