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역시 보통은 아니야2022.01.30.
간지러운 소리를 하거나, 입을 맞추거나.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
고민을 끝낸 이블린이 발을 내디뎠다.
‘음?’
다가오는 이블린을 보는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서서히 위로 솟았다. 과연, 이블린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궁금해하는 사이 이블린은 어느새 책상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다가와 있었다.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다음 행동을 기대하며 기다릴 때였다.
“!”
손을 뻗은 이블린이 책상 위에 있던 바스티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휙 끌어당기는 힘에 순간 중심을 잃은 바스티안이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책상 끝을 붙잡았다. 바스티안이 자리를 잡길 기다려 준 이블린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잡고 있던 바스티안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레이디에게 예를 갖추는 기사처럼, 아주 정중한 태도로.
“부탁드려요, 폐하.”
이블린이 입술에 호를 그렸다.
“이러면 될까요?”
“…….”
멍하니 이블린을 보던 바스티안이 곧 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똑똑하지, 우리 아가씨가. 그래, 맞아. 이래야 이블린 티에르지. 이블린의 도발이 기꺼웠다.
“내가 졌어. 좋아, 허락하지. 어쨌든 입을 쓴 건 맞으니까.”
“……약속하신 거예요.”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손을 놓아주며 확답을 받아내려 했다.
“대신, 내가 같이 갈 거야.”
“네?”
“내가 못 갈 상황이면 무조건 오단과 함께. 기사단원 최소 열 명 이상은 데리고 움직일 것.”
그 말은 평범한 기사단 열 개의 전력을 데리고 움직이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폐하, 그건 좀.”
좀 과한데요.
“말했잖아, 내가 같이 가지 못할 때라고.”
“……네.”
이블린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여기서 반발해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었다.
“오해하지 마. 그대를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야. 내 마음 편해지자고 그런 거니까. 솔직히 반대한 것도, 그대가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니까.”
“…….”
음, 또 훅 들어오시네. 이블린의 귓바퀴가 조금 붉게 물들었다. 그가 마음에 두었다던 여인이 혹시 나였을까, 한 번 의심하고 난 후라 그런지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리고, 외부인들에게 얼굴을 보여서 안 돼. 일단, 표면으로는 임산부라는 거 잊지 말고.”
“명심할게요.”
“좋아. 이걸로 이야기는 정리된 거지?”
“네, 감사합니다. 폐하.”
결론이 흡족했는지 이블린의 눈꼬리가 곱게 접혔다. 바스티안은 해사하게 웃는 이블린이 마음에 들었다. 늘 인형처럼 그린듯한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진짜로 즐거울 때 나오는 미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법이었다. * * *
“자작, 기다리게 했군요.”
문을 열고 성큼 들어온 이블린이 단장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펜 자작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 훈련을 지켜보고 바스티안에게 들려 보고까지 끝내고 오니 본의 아니게 늦어 버렸다.
“괜찮습니다, 바쁘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군요. 지난번에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졌어요.”
“아닙니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요.”
오펜 자작이 한층 친절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이블린이 대화 몇 마디만으로 하녀를 제압하는 걸 눈앞에서 지켜본 뒤, 그녀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
“어제 폐하를 상대로 훌륭한 대련을 펼치셨다고요.”
“아.”
“소문이 황궁 밖까지 퍼졌습니다.”
기사단원들을 굳이 구경꾼으로 세우더라니, 이것조차 바스티안의 노림수였을까.
“상황상, 제대로 된 대련은 아니었습니다.”
이블린이 민망해하며 진실을 말하자, 오펜 자작이 그녀의 배로 얼핏 시선을 주었다가 바로 거두었다.
“그러고 보니, 축하 인사를 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자작이 작은 상자를 이블린의 앞으로 내밀었다.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이블린이 이내 장난스레 눈꼬리를 접었다.
“음, 자작이 이런 걸 내밀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요.”
“제가 폐하께 입은 은혜가 큽니다.”
그의 성격을 짓궂게 지적했지만, 자작은 진지했다.
“첫 아이잖습니까. 폐하의 기쁨이시니, 폐하를 위해 준비한 거기도 합니다.”
“……고마워요. 열어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바스티안을 향한 그의 충심이 느껴졌다. 이블린은 바스티안이 존경받는 황제라는 사실에 조금 뭉클해진 기분으로 상자를 열었다. 선물은 아기를 위한 옷과 손 싸개였다. 허례허식 없이 정말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
이블린은 조금 멍해졌다. 임신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 역시 실망할까. 죄책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진짜 임신이었으면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덜 느꼈으려나.
“……고마워요, 자작.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한 가지 더 드릴 게 있습니다.”
“뭐죠?”
이블린이 복잡해진 마음과 함께 상자를 조심히 닫으며 물었다. 몸을 일으켜 소파 옆으로 간 오펜 자작이 곧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고급스러운 천으로 싸인 기다란 물건이었다.
“폐하께서 단장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꺼내 보시죠.”
“이건…….”
의아해하며 금색 술이 달린 끈을 풀어낸 이블린의 눈이 곧 커다래졌다. 은빛 날이 날카로운 장검이었다.
“네, 쿠즈네에서 만든 검입니다.”
“!”
명검을 만들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의 검은, 큰 금액을 준다 해도 구하기 힘들다 들었는데.”
“네, 폐하께서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앞으로 검을 드는데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 가벼운 게 필요하다고요.”
“아.”
“태중 아이는 금방 자랄 테니까요. 단장께서 좋아하는 검을 다루지 못하게 되는 게 안타까우셨던 모양입니다.”
“…….”
이블린은 검집을 손끝으로 쓸었다. 궁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때만 해도, 그녀의 실력을 믿지 못해 그러나 싶어 서운했다. 그랬는데, 지금 이 선물은 그녀를 훌륭한 기사로 인정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대를 호위기사단장직에 앉히길 잘했다고 생각해.”
그의 말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사람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얼음물에 담갔다가. 이토록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할 수 있다니.
“그럼, 지금까지 진행된 부분 보고 드리겠습니다.”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오펜 자작이 곧장 본론으로 돌아왔다.
“주문을 넣을 물품 목록입니다. 확인해주시면 바로 진행하려 합니다.”
“아, 고마워요.”
감상에서 깨어난 이블린이 자작에게 받은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돈을 써야 하는 부분과 아낄 수 있는 부분을 확실히 구분한 게 보였다.
“폐하께서 자작에게 황궁 살림을 맡기신 이유를 알겠네요. 이대로 진행하고, 추가로 필요한 게 생기면 연통을 보내도록 하죠.”
“네.”
“그리고, 혹 제가 차 밭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 기억하나요?”
“……네.”
“그거, 진심으로 한 소리였어요.”
“……정말 차 밭이 보고 싶으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요. 대답 대신 미소를 짓자 자작이 의미를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티파티 후가 좋겠어요, 한 번 일정을 의논해 보죠.”
“네, 곧 찾아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서류를 내려놓던 이블린이 오펜 자작을 바라봤다.
“조만간 알피도 자작을 만날 생각인데, 같이 보겠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펜 자작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지금 같은 표정으로 앉아만 있어 줘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
오펜 자작이 헛숨을 삼켰다. 역시 보통은 아니야. 웃으면서 제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끌고 가지 않나. 이블린 티에르는 볼수록 느낌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필요로 하신다면, 도와 드려야지 않겠습니까.”
“고마워요.”
오펜 자작과 다음을 기약한 이블린이 생긋 웃었다. * * *
“수해 피해를 복구하는 건 전부 황실 구호 자금을 사용했습니다.”
“상황은?”
“상당수 복원된 상태입니다.”
다베르의 보고에 바스티안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홍수, 산사태, 가뭄 등. 선 황제의 서거 시점 전후로 제국 내에 자연재해가 연달아 터졌다. 이러니 황제가 곧 제국이라는 말이 나온 거겠지. 바스티안이 손끝을 까딱여 바람을 만들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힘.’
황제가 힘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다루냐에 따라 제국의 흥망이 결정된다니, 그 정령왕이라는 자는 얼마나 무책임한 건지. 이블린에게 힘을 반절 넘긴 후로, 그의 힘은 계속 불안정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가 황제가 되면서 힘은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안정을 찾았다.
“피해 지역에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가야지.”
집무실 한쪽 벽면에 걸린 태피스트리로 시선을 준 바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전역이 그려진 지도였다.
“마침 겹치는 동선이기도 하고.”
이블린이 가고자 하는 지역과도 가까운 곳이니,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다.
“귀족회의 움직임은 계속 주시해, 다베르.”
“네, 폐하.”
지도에서 시선을 떼어내는데 건물 밖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블린이었다. 몸을 일으킨 바스티안이 창가로 다가갔다. 근처 정원에서 휴이터와 대화를 나누는 이블린이 보였다.
“흠, 역시 붙여놓지 말았어야 했나.”
오펜 자작을 만났다면, 선물은 전해 받았을 텐데. 기쁜 얼굴로 그에게 올 이블린을 기대했건만, 왜 휴이터와 있는 걸까. 감옥에 갇힌 하녀도 만나야 하고, 티파티 준비에 기사단 업무까지. 귀여운 그의 영애는 책임감이 너무도 강한 나머지, 시간을 잘게 쪼개어 활용하고 있었다.
“마냥 옆에만 둘 수도 없고.”
“신경 쓰이십니까?”
다베르가 턱을 매만지는 바스티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즐겁지는 않군.”
“그러게 왜 기사단장직을 맡기셨습니까.”
근위대장과 엮일 수밖에 없는 자리인데.
“여전히 그 소리인가.”
바스티안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이해는 안 됩니다.”
다베르는 황제의 의중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좋아한다면서 황후로 들이는 것도 싫다 하고, 그렇다고 티에르 공녀가 황비나 정부로 들일 만한 위치도 아니고. 가끔은…… 그냥 괴롭히려고 데려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진짜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한 건가. 무언가 그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다트는 뭔가 알고 있을까. 그는 바스티안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베르 후작이 어떻게 다트를 떠볼까 고민할 때였다. 바스티안이 창을 훌쩍 뛰어넘었다.
“폐하!”
“!”
다베르의 외침에 뒤를 돌아본 이블린과 휴이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황제를 보고 덩달아 놀랐다.
“폐하! 이런 위험한 행동을!”
“또 혼내려고? 그대는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 정도 높이로는 안 죽어.”
“……아.”
바스티안이 손끝으로 이블린의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펴주었다.
“이블린.”
“네, 폐하.”
“산책해야겠어. 오늘 내내 생각을 많이 했더니 피곤해.”
이블린이 본능적으로 위의 창문을 바라봤다.
‘안 됩니다.’
다베르 후작이 눈짓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폐하, 아직 업무가 덜 끝…….”
“그대의 업무 중에, 날 호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블린의 말문이 막혔다.
“……아뇨, 없습니다.”
“그럼 앞장서.”
명령조와는 다르게 손을 잡는 움직임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