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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연애하는 중 (36/95)

36. 연애하는 중2022.02.02.

16550808447705.jpg“디에스티 경.”

한숨을 쉰 다베르 후작이 얼떨떨하게 서 있는 휴이터를 불렀다.

16550808447705.jpg“온 김에 차나 한잔하고 가시지요.”

16550808447715.jpg“……네, 올라가겠습니다.”

어느새 두 사람은 꽤 멀어진 후였다. 잠시 지켜보던 휴이터가 곧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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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6550808447724.jpg“폐하, 어디 가시려는 건가요?”

잠자코 바스티안을 따르던 이블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산책이라기에 근처의 정원이나 몇 바퀴 돌 줄 알았더니, 그는 궁에서도 가장 외곽진 변두리로 향하고 있었다.

16550808447727.jpg“내 아지트.”

16550808447724.jpg“그때 그 약초가 있는 온실 아니었나요?”

16550808447727.jpg“설마 이 넓은 황궁에 거기 한 군데일까.”

하긴, 그렇지. 수긍한 이블린이 잡힌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까부터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그것도 깍지 낀 상태로. 걸어오면서 마주친 모든 이들이 손을 힐끔대는 게 보였다.

16550808447727.jpg“왜? 부끄러워?”

이블린의 시선을 눈치챈 바스티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묻는 목소리가 짓궂었다.

16550808447724.jpg“이러다 일은 안 하고 연애나 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요.”

16550808447727.jpg“음, 우리가 연애한다는 자각은 있었군.”

일부러 태연하게 받아치자 한술 더 뜬 대답이 돌아왔다.

16550808447724.jpg“아니, 그…….”

무어라 대꾸하려던 이블린은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꼬투리만 잡혀서 이상한 쪽으로 대화가 흘러갈 확률이 높았다. 이블린은 그녀보다 반 발자국 앞서 걷는 바스티안을 힐끔 쳐다봤다. 넓은 어깨와 등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 하녀들이 숙덕대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 연무장에서 황제궁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16550808470668.jpg“얘, 너 그 이야기 들었어?”

16550808470668.jpg“뭔데?”

16550808470668.jpg“어젯밤에 본궁 하녀 하나가 폐하의 눈에 들려다가 망신당했다는 거!”

16550808470668.jpg“아, 그거? 들었어, 일부러 물을 뒤집어쓰고 젖은 몸으로 폐하의 앞에 뛰어들었다며?”

16550808470668.jpg“응, 폐하께서 시선 한 번 안 주고 가버리셨다더라. 어휴, 내가 다 수치스러워.”

이블린은 전혀 모르는 일인 걸 보니,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모양이었다. 하필 지나쳐갈 수도 없는 좁은 길이었다. 인기척을 드러내기도 난감해서, 이블린은 계속 이어 들을 수밖에 없었다.

16550808470668.jpg“신입인 거지? 그러니까 그런 미친 짓을 했겠지? 폐하가 얼마나 냉정하신 분인데. 본궁은 지금쯤 난리 났겠네?”

16550808470668.jpg“맞아, 으, 폐하의 그 표정만 떠올려도 얼어붙는 기분이야.”

이블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황제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지내다 보니 전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말해줄 수도 없고.

16550808470668.jpg“이게 다 단장님 때문이야.”

내가 뭘? 무심코 귀를 기울이던 이블린이 움찔했다.

16550808470668.jpg“단장님께 너무 스윗하게 대하시니까, 폐하가 다정한 분이라고 착각하는 애들이 생기는 거지. 난 폐하께서 그렇게도 웃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거 처음 알았잖아.”

16550808470668.jpg“하긴, 원래도 외모만 보면 정말 멋있으시잖아. 그런데 요즘은 다정한 모습까지 보이시니 다들 난리긴 하더라. 한 번만 안겨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애들도 많던데.”

16550808470668.jpg“다들 꿈도 크다. 단장님 같은 분이니까 폐하도 그러시는 거지. 정말 천사처럼 아름다우신데, 멋있기까지 하셔.”

갑자기 나오는 제 칭찬에 이블린은 하마터면 헛기침을 터트릴 뻔했다.

16550808470668.jpg“누가 뭐라니? 꿈이니까 꾸는 거지! 하, 부럽다. 나도 그렇게 사랑받아보고 싶어.”

16550808470668.jpg“얘, 농장 창고에서 일하는 타미가 너한테 관심 있다더라.”

16550808470668.jpg“야!”

티격태격하는 하녀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이블린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그 대화를 통해 이블린은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먼저, 바스티안이 그녀 눈에만 멋있어 보이는 건 아니란 것. 그에게 안기고 싶어 하는 여인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의외로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건, 그녀만 안다는 것.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16550808447724.jpg‘이러니까 내가 헷갈리지.’

처음에는 그저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건 줄 알았는데.

16550808447727.jpg“필요에 의해서가 아니지 않나.”

16550808447727.jpg“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야.”

  진짜 연애도 아닌데, 자꾸만 진짜처럼 구니까. 틈만 나면 그의 말을 해석하고 곱씹게 되고 만다.

16550808447724.jpg‘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은데, 신경이 쓰여.’

이블린이 한숨을 쉬려는 찰나, 바스티안이 걸음을 멈췄다.

16550808447724.jpg“……!”

덩달아 멈춰서 고개를 든 이블린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눈앞에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16550808447724.jpg“황궁에서 관리하는 농장, 맞죠?”

16550808447727.jpg“맞아.”

정령들의 사랑을 받는 땅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제국민은 자연이 주는 걸 소중히 여기는 관습이 있었다. 황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황궁에서 쓰이는 식자재는 대부분 외부에서 공수해오지만, 몇 가지 작물은 황궁에서 직접 관리하며 키우기도 했다.

16550808447724.jpg“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처음 본 것처럼 놀라는 이블린에 바스티안이 픽 웃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블린이 농장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어릴 때 이블린이 황궁에 온 건 딱 세 번이었는데, 그중 한 번, 이블린을 이곳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16550808447724.jpg“그런데, 여긴 왜 오신 건가요?”

16550808447727.jpg“보면 알아.”

바스티안이 농장 입구에 있는 창고 문을 열었다. 말이 창고지 커다란 저택 같은 곳이었다. 이블린은 주인이라도 된 듯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바스티안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바스티안이 향한 곳은 창고의 지하였다. 어둡고 습한 공간의 양쪽 벽면으로 길게 뻗은 선반에 와인병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16550808447727.jpg“와인 좋아해?”

16550808447724.jpg“잘, 모르겠습니다.”

16550808447727.jpg“취향은?”

16550808447724.jpg“그것도 잘…….”

이블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사교계 모임을 나간 적이 없다 보니 술을 마실 기회가 거의 없었다.

16550808447727.jpg“그래?”

잠시 생각하듯 선반을 둘러보던 바스티안이 병 하나를 쑥 빼낸 뒤 이블린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고 또 한 병을 빼서 손에 들고는 빠르게 창고를 벗어났다.

16550808447724.jpg“이렇게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16550808447727.jpg“몇 병 없어져도 몰라.”

16550808447724.jpg“폐하.”

이블린이 한숨 쉬듯 바스티안을 불렀다. 분명히 개수를 세며 관리하는 이가 있을 터.

16550808447724.jpg“담당하는 이가 곤란해지면 어떡해요.”

16550808447727.jpg“그대는 참, 모두에게 다정하기도 하지.”

왜인지 그의 말에 불만이 섞여 있는 듯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추측하는데 바스티안이 다시금 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원통으로 된 치즈 앞이었다.

16550808447727.jpg“오펜 자작에게 받은 거 있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내렸다.

16550808447724.jpg“아, 폐하.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16550808447727.jpg“잘라.”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품에서 와인병을 빼내며 지시했다.

16550808447724.jpg“……네?”

검으로 막 손을 뻗던 이블린이 굳었다. 이 명검을, 고작 치즈 자르는 데 쓰라는 거야 지금? 아직 개시도 못 했는데? * * *

16550808470668.jpg“어서 와요, 마르다 양.”

마차에서 내리던 마르다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오는 내내 어떤 사람들일까 걱정했는데, 백작 부부의 인상이 썩 나쁘지 않았다.

16550808579889.jpg“안녕하세요.”

마르다는 수줍은 척 가느다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16550808470668.jpg“먼 여행길이 힘들었지요? 짐은 하녀들에게 정리해놓으라 이를 테니, 일단 들어가서 좀 쉬도록 해요.”

백작 부인이 마르다의 등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마르다는 두리번거리고 싶은 걸 참으며 눈으로만 백작가를 훑었다. 그간 살던 2층짜리 나무로 된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문에서부터 저택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한 것도 놀라운데, 저택 자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컸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마르다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혀를 깨물어야 했다. 화려한 대리석 장식과 샹들리에, 고급 카펫. 전부 그녀가 꿈꾸던 것들이었다. 그러다 곧 억울해졌다.

16550808579889.jpg‘백작가가 이 정도면, 공작가는 대체 어느 정도인 걸까?’

부친이 티에르 공작인데도, 그녀는 공작가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구경은커녕 지금까지 시골구석에 숨어 살아야 했다.

16550808470668.jpg“자, 앞으로 지낼 방을 준비해 뒀어요. 마르다 양의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한참이나 긴 복도를 걷고서야 멈춰선 백작 부인이 방문을 열었다. 방의 크기가 원래 살던 집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컸다. 가구며, 장식이며 얼핏 봐도 신경 쓴 티가 났다.

16550808579889.jpg“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마르다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백작 부부는 이제 그녀가 잘 보여야 할 대상이었다.

16550808470668.jpg“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일단 좀 쉬는 게 좋겠어요, 따뜻하게 몸도 좀 담그고요. 그리고 저녁을 함께 먹는 게 어때요?”

16550808579889.jpg“네, 좋아요.”

16550808470668.jpg“얘, 마르다 양을 도와주렴.”

16550808470668.jpg“네, 마님.”

마르다는 제 옆에서 허리를 꾸벅 숙이는 또래의 하녀를 보며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16550808470668.jpg“그럼 마르다 양, 조금 이따가 만나요.”

16550808579889.jpg“네, 백작 부인.”

16550808470668.jpg“후후,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야죠?”

16550808579889.jpg“……아.”

16550808470668.jpg“부담 갖지 말아요, 천천히 하면 되니까.”

백작 부인이 인자하게 웃어 준 뒤 몸을 돌렸다.

16550808579889.jpg‘드디어, 나도 귀족 영애가 된 거야.’

우아하게 걸어가는 백작 부인의 뒷모습을 보니 실감이 났다. 이제 막 황후가 되기 위한 첫발을 뗀 거다. 마르다가 상기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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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컥.

16550808470668.jpg“…….”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백작 부인이 뛰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우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16550808470668.jpg“어떻소?”

계단 중반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백작이 부인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16550808470668.jpg“쉿,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해요.”

남편의 팔을 잡아끌어 1층 서재로 향한 백작 부인이 밖의 동향을 살핀 뒤 문을 닫았다.

16550808470668.jpg“생각보다 너무 평범한 것 같은데. 부인이 보기에는?”

페런 백작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이 마르다를 양녀로 들이기로 한 데는 큰 뜻이 있었다. 부부에게는 아들만 둘이었지만, 둘 다 어느 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팔푼이였다. 많은 돈을 들여 중앙 사교계까지 진출했건만, 영 자리를 못 잡고 있어 고민하던 차. 중앙으로 진출하도록 도와준 후작 하나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16550808470668.jpg“이참에, 딸 하나를 들이면 어떻소? 황후 자리가 비어 있지 않소.”

16550808470668.jpg“아니, 이미 황후는 정해진 거 아닙니까? 티에르 공녀가 임신까지 했잖아요!”

16550808470668.jpg“티에르 공녀가 몸이 약하다는 건 잘 알고 있잖습니까. 선황후도 금방 돌아가셨지요. 하다못해 황비 자리만 차지해도 나쁘지 않잖소.”

16550808470668.jpg“……그렇긴 하지만.”

16550808470668.jpg“생각만 있다면, 내가 괜찮은 영애를 소개해주리다.”

  이래저래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아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랬는데, 막상 실물을 보니 이게 잘한 선택인지 영 확신이 들지 않았다.

16550808470668.jpg“저래서야, 황후는 무슨, 황비 후보에도 들기 어렵겠는데.”

16550808470668.jpg“그런데 여보.”

백작 부인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16550808470668.jpg“꼭, 어디서 본 얼굴 같지 않아요?”

16550808470668.jpg“으응?”

16550808470668.jpg“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꼭 분위기가 티에르 공작님이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16550808470668.jpg“!”

페런 백작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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