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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안아주고 싶은 (38/95)

38. 안아주고 싶은2022.02.09.

단숨에 이블린의 허리를 감은 바스티안이 몸을 겹쳐 왔다.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느낌에 이블린은 본능적으로 바스티안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흔들리는 까만 머리칼 사이로 회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진득해서 아득해질 정도였다.

16550809083094.jpg“어디에서 힘을 얻냐고 물었지.”

16550809083099.jpg“…….”

16550809083094.jpg“채우는 건 그대 몫이야, 이블린.”

바스티안이 속삭이는 말이 그의 숨결에 섞여 이블린의 입술로 닿았다.

16550809083094.jpg“내가 약해지면 제국도 위태롭지.”

16550809083099.jpg“…….”

16550809083094.jpg“그러니까, 그대의 책임이 막중해.”

짓궂게 놀리려는 말투도 아니었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그의 말이 낮게 가라앉은 공기처럼 이블린을 에워쌌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듯 마음이 일렁였다. 정말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 이블린이 머뭇대다 손을 미끄러뜨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바스티안의 목덜미에 닿았다. 스치는 손길이 간지러워서, 나무를 짚은 바스티안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 이블린은 조심스레 바스티안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16550809083099.jpg“이러면, 무례한 걸까요?”

감히 황제의 얼굴에 손을 댔으니까.

16550809083094.jpg“……아니.”

바스티안이 눈을 내리깔며 이블린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블린은 엄지 끝으로 바스티안의 미끈한 피부를 쓸 듯이 문질렀다. 그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진 듯도 보였다. 그동안 받은 게 많으니까. 응, 그러니까. 그녀 또한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주고 싶었다. 그래야 공평한 계약 아닐까. 이블린은 지금 제가 하는 행동을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래서 이러는 거라고. 그를 위로해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에게 마음의 빚을 졌기 때문이라고. 이 계약을 좀 더 수월하게 하고 싶어서라고. 바스티안은 복잡해 보이는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가만히 지켜봤다. 멈칫거리는 손길에, 한 번씩 입술을 깨무는 움직임에. 이블린의 고민과 혼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스티안은 이블린을 그대로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졸지에 위치가 바뀌어 바스티안을 내려다보게 된 이블린이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6550809083094.jpg“고민하지 마, 이블린.”

떨어져 버린 이블린의 손을 잡아 다시 제 얼굴에 가져다 댄 바스티안이 손바닥 안쪽에 입을 맞췄다.

16550809083094.jpg“그저 위로해주는 건데 고민이 필요해?”

손바닥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감촉에 이블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16550809083094.jpg“그대 아니면, 난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 없거든.”

16550809083099.jpg“…….”

16550809083094.jpg“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건, 그대가 나와의 내기에서 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대가 감당해야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고민하지마. 단호하게 읊조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잘 때마다 그를 편안하면서 괴롭게 만드는 달콤한 향기가 숨을 가득 채웠다. 이블린은 매달리듯 안겨 오는 바스티안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밀어내야 할까, 안아줘야 할까. 어쩌면 강해 보이는 이 사람이 조금은 외로웠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이블린은 바스티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위로하듯 조금 천천히 도닥이자 그가 픽하고 흘린 웃음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 ……웃다니. 괜히 민망해져서 손을 멈출 때였다.

16550809083094.jpg“계속해.”

살갗을 붙인 채 속삭인 바스티안의 입술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16550809083094.jpg“위로해주는 김에. 그대가 먼저 입을 맞춰 주면 좋겠는데.”

16550809083099.jpg“…….”

16550809083094.jpg“다음엔, 그렇게 해주길 기대하지.”

바스티안이 쿡 웃은 뒤 곧장 입을 맞춰왔다. 눈을 내리뜬 채 다가오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빛이 나는 것 같아서. 이블린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두 번째 입맞춤은, 달콤한 포도 향과 쌉싸름한 와인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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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809112444.jpg“이건 색을 입혀 만든 머랭 쿠키인데, 일부러 달지 않게 만들었어요.”

16550809083099.jpg“음, 괜찮은 것 같아.”

입에 쏙 넣어 맛을 본 이블린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티파티에 쓰일 디저트였다.

16550809112444.jpg“과일을 얹은 디저트가 메인이기는 하지만, 못 먹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몇 가지 따로 준비해두려고요.”

16550809083099.jpg“좋은 생각이야.”

쭉 나열된 디저트를 눈으로 훑던 이블린이 한 군데서 멈췄다.

16550809083099.jpg“……바바로아네?”

16550809112444.jpg“아, 복숭아랑 오렌지를 넣은 거예요.”

보자마자 바스티안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걸 만들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였으니까.

16550809112444.jpg“왜요? 별로인가요?”

16550809083099.jpg“그건 아니고, 음…… 몇 개 챙겨줄래? 밤에 간식으로 먹을 수 있게…….”

16550809112444.jpg“아, 폐하랑 드시려고요?”

16550809083099.jpg“아니?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거야.”

16550809112444.jpg“알겠어요, 믿어 드릴게요.”

16550809083099.jpg“…….”

속아 주겠다는 듯 음흉하게 웃는 알리에타에 이블린은 뒤늦게 멋쩍어졌다.

16550809112444.jpg“요즘 두 분 부쩍 친해지신 느낌이에요.”

16550809083099.jpg“그야, 같이 일하고 있으니까.”

16550809112444.jpg“그렇죠, 그렇게 붙어 다니면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지요.”

16550809083099.jpg“그만해, 알리에타.”

16550809112444.jpg“네. 주무시기 전에 드실 수 있도록 몇 가지 준비해 놓을게요.”

16550809083099.jpg“응, 그리고 어차피 남은 건 하녀들과 먹을 거지?”

16550809112444.jpg“네.”

16550809083099.jpg“데보라에게도 좀 가져다줘.”

16550809112444.jpg“그 아이에게 마음을 많이 쓰시네요.”

16550809083099.jpg“그냥, 자꾸 신경이 쓰이네. 에바는 요즘 어때?”

16550809112444.jpg“요즘은 좀 조용해요. 잘 적응하는가 싶고요.”

16550809083099.jpg“그래, 한 번씩 살펴보도록 해.”

16550809112444.jpg“네.”

알리에타에게 고맙다며 인사한 이블린이 주방을 빠져나왔다. 늘 그랬듯, 바쁜 나날이었다. 티파티가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틈이 날 때마다 데보라를 만나기도 하고, 아벤토 후작 사건을 조사하는 데 시간을 쓰기도 했다. 이블린이 빠르게 걸으며 습관처럼 복장을 점검했다. 느슨해진 검집을 고쳐 쥐자니, 문득 바스티안의 말이 떠올랐다.

16550809083094.jpg“그대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닐 거라는 게 마음에 들어.”

  이블린은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요즘 들어 부쩍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전보다 잦아진 스킨십이었다. 함께 농장을 다녀온 후, 바스티안이 갑자기 손을 잡아 온다거나, 눈이나 입술에 입을 맞추는 횟수가 확연히 늘었다. 문제는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그녀 자신이었다.

16550809083099.jpg‘이거 괜찮은 걸까.’

굳이 따지자면, 그게 싫지 않다는 게 더 걱정이었다. * * *

16550809083094.jpg“전부 그대가 먹으려는 건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블린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다가온 황제의 시선이 테이블 끄트머리에 가 있었다. 알리에타가 약속대로 준비해 준 디저트였다.

16550809083099.jpg“알리에타가 주고 갔어요. 오늘 티파티에 쓸 디저트를 점검했거든요.”

이블린은 그녀가 먼저 부탁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16550809083094.jpg“바바로아네.”

바스티안의 한쪽 입꼬리가 미끄러져 올라가는 걸 보니 잘한 선택 같았다.

16550809083099.jpg“……드시겠어요?”

이블린이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16550809083094.jpg“뭐, 그러지.”

이블린이 특별히 부탁하더라는 건 이미 알리에타에게 들은 후였다. 바스티안은 놀리려다 참기로 했다. 새침하게 모르는 척하는 이블린이 귀여웠다. 이블린이 슬쩍 접시를 밀어주자 바스티안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 냉랭한 얼굴로 디저트라니, 이처럼 안 어울리는 그림이 또 있을까. 커다란 손바닥에 있는 디저트가 앙증맞았다. 이블린이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편지지로 시선을 내렸다.

16550809083094.jpg“그런데, 잠옷이 바뀌었네?”

16550809083099.jpg“……네?”

소파 위로 긴 다리를 뻗으며 눕듯이 앉은 바스티안이 스푼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의 회녹색 눈동자가 이블린의 목덜미부터 아래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하얀 팔과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던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긴 소매에다가 땅에 끌리겠다 싶을 만큼 긴 잠옷이었다. 목을 전부 덮는 레이스 장식은 또 어떻고. 전에는 얇아서 몸 실루엣이 비칠 정도였는데, 지금은 몇 겹으로 꽁꽁 싸맨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가릴 수 있는 부분은 다 가린 잠옷이었다. 이블린은 그가 잠옷을 언급할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음, 갑자기 더운 것도 같고.

16550809083099.jpg“황궁이 생각보다 추운 듯하여.”

16550809083094.jpg“흐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비음을 흘리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은 할 말이 없어졌다.

16550809083094.jpg“좋은 자세야, 이블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목에서 나풀거리는 레이스를 툭 치며 칭찬했다.

16550809083094.jpg“이런 경계심은 얼마든지 찬성이야.”

16550809083099.jpg“…….”

16550809083094.jpg“날 의식한다는 거잖아?”

그 말에 오히려 더 부끄러워졌다. 속내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16550809083099.jpg“이번에 티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준비하는 김에 다른 옷도 좀 더 준비한 것뿐이에요.”

16550809083094.jpg“그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지.”

바스티안은 얌전히 남은 디저트를 입에 물었고, 이블린은 짓궂게 올라가는 바스티안의 입꼬리를 애써 못 본척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내려앉고, 이블린이 편지에 집중할 때였다.

16550809083094.jpg“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지?”

이블린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바스티안이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이블린은 그의 행동을 막으려다 말았다. 이 황궁에서 그가 원한다면 보지 못할 게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사적인 내용이 담긴 것도 아니고, 티파티 초대에 응한다는 답신일 뿐이니까. 다만 그녀의 어깨 위로 쓱 다가온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바스티안이 곧 그의 턱을 이블린의 어깨에 툭 얹었다.

16550809083099.jpg“……셀리메 후작 영애의 편지예요.”

이블린은 귓가에 닿는 숨소리를 의식하지 않으려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호들갑스러운 성격답게, 답장 내용도 요란했다.

16550809083099.jpg“어릴 때부터 종종 안부를 주고받던 사이였어요.”

16550809083094.jpg“그렇군.”

바스티안이 옆에 쌓여 있는 편지 봉투를 눈으로 훑었다.

16550809083094.jpg“흠, 제국 전역의 영애를 다 불러 모을 생각인가.”

16550809083099.jpg“일단 초대장은 다 보냈어요. 참석 여부와는 상관없이.”

16550809083094.jpg“사교계까지 손에 넣으시겠다? 바쁘겠어, 이블린. 공녀로도 살아야 하고 단장으로도 살아야 하고. 야망이 원대하군.”

16550809083099.jpg“폐하.”

16550809083094.jpg“칭찬이야.”

16550809083099.jpg“뭐, 두루두루 손에 넣어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짓궂게 놀리니 제법 태연한 대꾸가 돌아온다. 부쩍 친근해진 이블린의 태도에 바스티안은 만족스러워졌다.

16550809083094.jpg“내가 해줄 건?”

16550809083099.jpg“황궁에서 열 수 있게 허락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16550809083094.jpg“욕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16550809083099.jpg“조금 전에는 야망이 크다고 하셨잖아요.”

바스티안이 쿡쿡 웃자 맞닿은 어깨를 타고 진동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어깨에 기대어 있을 작정이신지. 이블린은 그를 밀어낼까 하다가 그냥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블린이 보낸 사람을 확인할 때였다.

16550809083094.jpg“……아쉴브?”

바스티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16550809083099.jpg“?”

이블린이 편지지를 꺼내려다 멈췄다.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바스티안의 고개가 멀어졌다. 이블린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모호한 표정인 바스티안의 반응이 못내 신경 쓰였다.

16550809083099.jpg‘이런 반응은 처음인데.’

이블린은 편지 봉투로 시선을 내렸다. 보니카 아쉴브. 실물을 본 기억은 없는 영애였다.

16550809083094.jpg“난 이미 원하는 상대가 있거든.”

  문득, 처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혹시, 그때 말씀하신 그 영애인가요? 묻고 싶은데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지. 이블린은 의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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