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재워주려고2022.02.13.
‘흠.’
바스티안은 귀족 회의 때 유독 핏대를 세우던 이를 기억해냈다. 이블린이 황후가 되는 걸 결사반대하던 이. 그가 바로 아쉴브 후작이었다. 평소에는 입을 꾹 다문 채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던 이가 웬일로 의견을 내나 했더니.
‘딸이 있었군.’
뒤늦게 그의 가족 사항을 깨달은 바스티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욕망이 투명한지. 조소하는데 이블린과 눈이 마주쳤다. 살짝 벌어진 이블린의 입술이 유독 붉었다. 와중에 저 입술이 탐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뭐,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나.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이 이는 듯해서 바스티안은 목을 매만졌다.
“……폐하? 무슨 문제라도?”
“아니.”
바스티안이 싱긋 웃으며 몸을 물렸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었다. 손을 잡으면 안고 싶고, 입을 맞추면 더 한 걸 바라게 되는. 음, 지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지. 이블린의 경계심이 낮아지고 있는 요즘,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이블린, 안 잘 건가?”
“마저 정리하려고요…….”
“그래, 그럼 먼저 자. 난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네? 어디 가시는…….”
“오단하고 다녀올 테니 쉬도록 해.”
달밤에 검이라도 휘둘러서 힘을 빼놓아야 사고 치지 않을 것 같다는 건, 자존심 때문에라도 말할 수 없었다.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성큼 멀어졌다.
‘뭐지?’
갑자기 어딜 간다는 걸까. 이블린은 문 너머로 사라지는 바스티안을 눈으로 좇았다. 보니카 아쉴브. 이블린은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곱씹어 보았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바스티안의 태도가 왠지 묘해졌다.
“…….”
편지지 끝이 조금 구겨졌지만, 이블린은 깨닫지 못했다.
. .
“…….”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던 이블린이 몸을 왼쪽으로 돌렸다.
“…….”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
그러다가 벌떡 일으켰다.
“하아, 잠이 안 와.”
달빛이 가득한 침실 벽면을 멍하니 응시하던 이블린이 옆자리로 시선을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바스티안이 존재감을 뿜어내며 누워 있었을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이 시간까지 대체 뭘 하시는 거지?’
그가 침실을 떠나고 벌써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였다. 영애들에게서 온 답신을 다 정리하고 누울 때까지 바스티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궁에 온 이후로 먼저, 그것도 혼자 잠자리에 누워 본 건 처음이었다. 바스티안은 매번 꼭 같이 잠자리에 들기를 원했고, 그때마다 손을 붙잡고 자야 한다며 주장해댔으니까. 잠든 줄 알고 손을 슬쩍 빼내려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움켜쥐어오기 일쑤였고. 그래놓고, 정작 당사자가 없다니. 계속 난감하게 만들던 사람이 막상 옆에 없으니까 이상했다. 그동안 한 침대를 쓰는 게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정작 그가 없어서 잠이 안 오게 될 줄이야.
“……아쉴브?”
그 순간, 바스티안이 지은 묘한 표정이 자꾸만 뇌리에서 맴돌았다. 그러니 기분이 찝찝해져서 도통 잠이 안 오는 거다. 진짜 그 영애와 뭔가 있는 걸까? 연무장에 가서 오단과 대련하고 있을 바스티안의 모습이 그려졌다.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보고 나니까 그리운 거지. 그런데 계약 관계인 내 앞에서 티를 내기는 좀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몸을 혹사해서 슬픔을 잊으려 한다거나? 그런 상상을 하고 나니 막 창피해지려 했다. 황제가 마음에 두었다던 여인이 그녀 자신은 아닐까, 잠시나마 고민했는데. 지금은 그런 고민을 했던 게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역시 계약서를 다시 썼어야 했나.”
바스티안의 호의만 믿고 미뤄둔 건 큰 실수였다. 이러다 계약이 엎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래, 지금 마음이 불편한 건 계약이 걱정돼서 그런 거야.
“……어차피 끝까지 폐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바스티안의 도움으로 힘을 키우는 시간을 단축하려던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차분하게 심호흡한 이블린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갈수록 정신만 또렷해졌다. 침대는 차갑고, 와중에 바스티안의 향기는 진하게 남아 있고. 무슨 바람 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도 아닌데.
“하아.”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안 되겠다 싶어 침대를 빠져나온 이블린이 두툼한 숄을 걸치고 잰걸음을 옮겼다.
“단장님?”
끼익, 문이 열리자 침실 앞을 지키던 보레아가 아는 척을 해왔다.
“폐하는?”
“아직 연무장에 계실 겁니다. 아까 부단장과 함께 가시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렇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장님 오시기 전에는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소리냐며 쳐다보니 그가 씩 웃었다.
“잠이 거의 없으셨거든요. 지금이야 단장님이 계셔서 덜하지만, 전에는 산책이나 검술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고는 하셨습니다.”
“……그래요?”
우습게도, 그 말을 듣자 풍랑이 치듯 요란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난 잠시 하녀장을 만나고 올게요.”
“네, 단장님.”
그래도 침실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어서, 이블린은 복도 끝에 있는 알리에타의 방으로 향했다. 바스티안과 그녀를 제외하면, 알리에타는 이 층에 기거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하녀들의 시중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바스티안이 배려해준 거였고. 생각해 보면, 낯설어야 할 황궁 생활이 편안한 건 바스티안이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 준 덕분이었다.
‘많은 걸 받기는 했지.’
고마움을 인지하며 걷다 보니 복도 끝에 이르렀다.
“알리에타?”
예의상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앉아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주인이 돌아왔다.
“아이구, 깜짝이야!”
알리에타가 시꺼먼 그림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이제 오는 거야? 수고 많았어, 유모.”
“공녀님? 왜 이러고 계세요?”
“잠이 안 와서.”
알리에타의 손을 끌어당겨 제 옆에 앉게 한 이블린이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알리에타가 이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고민이 생기면 곁으로 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가는 건, 어릴 적부터 이블린의 습관이었다.
“아니, 그냥.”
“그런데 왜 이 시각에 걸음 하셨어요, 폐하께서 걱정하실 텐데요.”
“걱정 마, 지금 안 계셔.”
“……네?”
알리에타가 곤란한 신음을 흘렸다. 이블린이 모른 척 알리에타의 품에 파고들었다. 푸근한 알리에타를 끌어안고 있으니 조금씩 마음이 놓이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어휴, 싸우셨어요? 그렇다고 부부가 벌써 각방을 쓰면 안 되는데.”
어차피 가짜 부부인데 뭐. 그리고 폐하께는, 다른 사람이 있는걸. 이블린은 대답을 삼켰다.
“부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붙어 있어야 하는 거라고요.”
“…….”
“공녀님! 듣고 계세요?”
알리에타의 잔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듯이 웅얼거렸다. . . 잠시 후. 눈을 뜬 이블린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나 언제 잠들었지?’
분명히 밤이었는데, 주변이 밝았다. 게다가 제가 누워 있는 곳은 바스티안과 함께 쓰는 침실이었다. 알리에타의 방에 있었는데, 왜 여기에? 아무리 알리에타가 힘이 좋다지만 그녀를 안아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몽유병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뭔가 싶어 이불을 걷어내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찔끔 돌리니 바스티안이 침실 입구에 삐딱하게 기댄 채 서 있었다.
“…….”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바스티안의 눈썹이 꿈틀댔다.
“감히, 외박을 해?”
낮은 목소리가 음험하게 울렸다. 내리뜬 시선은 약간이지만 화가 난 듯 보였다.
“왔는데, 그대가 없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보레아에게 말하고 갔는걸요.”
외박이라니요? 누가 할 소리를? 왜 그가 서운함을 토로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녀를 옮긴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됐다. 굳이 그 새벽에 잠든 자신을 안고 이곳으로 데려왔을 바스티안을 상상하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잠깐 알리에타를 만나러 간 건데 잠이 들었나 봐요.”
“그 시간에 거기에는 왜?”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잠이, 안 왔어?”
바스티안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렇군, 잠이 안 왔군.”
바스티안이 재차 읊조리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이블린의 시선도 점차 위로 향했다.
“왜? 내가 없어서?”
“아닌, 아닌데요.”
고개를 가로저은 이블린이 주춤주춤 뒤로 몸을 물렸지만, 이미 바스티안의 그림자에 갇힌 후였다. 한쪽 무릎을 침대에 얹은 바스티안이 몸을 숙이며 두 손으로 이블린의 양옆을 탁 짚었다. 바스티안의 두 팔 안에 갇히고 만 이블린은 반사적으로 이불을 움켜쥐어 가슴께로 끌어올렸다.
“이런, 혼자 둔 게 무척 미안해지는데.”
“안 미안해하셔도 돼요.”
“보상해야겠군.”
이블린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은 바스티안이 그대로 누워버렸다.
“지금, 지금 뭐 하시는!”
“재워주려고. 나 때문에 잠을 설친 거잖아.”
“아니요? 아주 푹 잤는데요?”
“푹 자기는. 데리러 갔을 때 보니까, 인상을 잔뜩 쓰고 있던걸.”
“거짓말하지 마세요.”
“흠, 내가 왜 거짓을 말하지?”
바스티안이 제 팔을 풀어내려 낑낑대는 이블린을 꼭 끌어안으며 이블린의 머리칼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이브, 우리 출근하지 말까?”
은근하게 묻는 목소리가 위험하게 들렸다.
“아니요, 안 됩니다.”
정색하며 외치니 머리 위에서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더 짓궂게 놀리는 게, 평소의 바스티안이었다. 어쩐지 힘이 쭉 빠져서 이블린은 몸을 늘어트렸다. 진짜 사랑하는 이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 설마, 그런 사람은 아닐 거야. 알리에타도 바람둥이는 아닐 거라고 했잖아? 아쉴브 영애는, 그냥 우연의 일치였는지도.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블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등을 덮으며 속삭였다.
“앞으로 외박은 절대 안 돼. 알겠어?”
“알겠으니 그만 놔 주세요, 폐하.”
평온을 되찾은 이블린이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바스티안을 꾸짖었다.
“명을 따르지요, 공녀님.”
못 이기는 척 팔의 힘을 풀고 몸을 일으킨 바스티안이 이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동작이 물 흐르듯 퍽 우아해서 이블린은 그만 웃어버렸다.
“아침 먹어야지.”
빨리 잡으라는 듯 까딱이는 손끝을 본 이블린이 제 손을 얹었다. 휙 잡아당기는 힘에 이블린의 몸이 침대를 벗어났다. 휘청거리는 이블린을 붙잡아 바로 세운 바스티안이 손을 잡은 채로 앞장섰다. 그 뒤를 따르며, 이블린은 얽혀 있는 손을 힐끗 쳐다봤다. 바스티안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단단하고 뜨거웠다. * * * 황제궁으로 향하는 길목.
“이브, 피곤해?”
나란히 걷던 휴이터가 슬쩍 하품을 참는 이블린을 보며 물었다.
“아, 응. 잠을 좀 못 잤거든.”
“!”
휴이터의 말문이 막혔다. 이블린이 황제와 같은 침실을 쓴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둘 사이가 어찌나 좋은지, 침실이 있는 층은 호위 기사 몇 명을 빼고는 누구 하나 얼씬도 못 하게 한단다.
“이게 다 전부 폐하 때문이야.”
“……어?”
이블린이 투덜대는 말에 휴이터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체, 뭐, 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