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네가 제일 예쁘더라 (40/95)

40. 네가 제일 예쁘더라2022.02.16.

16550809617863.jpg

  폐하 때문에 잠을 못 잤다니, 이상야릇한 상상을 하게 되잖아. 안 그래도 둘이 같은 침실을 쓴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휴이터가 입을 비죽였다. 물론, 우려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없겠지?

16550809617869.jpg“요즘은 폐하 곁을 지키는 시간이 줄었네?”

휴이터가 찝찝함을 털어내며 대화 주제를 바꿨다.

16550809617875.jpg“어어.”

이블린이 한숨을 폭 쉬었다. 그게 바로 요 며칠 내내 잠을 설치는 이유였다. 한시도 제 곁에서 떨어지는 걸 허락하지 않던 바스티안이 갑자기 그녀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거. 문제는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명색이 호위기사단장인데, 이래도 되는 걸까?

16550809617869.jpg“이브? 무슨 생각해?”

이블린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휴이터가 이블린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16550809617875.jpg“그냥,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괜찮은가 싶어서.”

16550809617869.jpg“…….”

뭐 얼마나 더 붙어 있어야 만족하려고.

16550809617869.jpg“이브,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속으로만 따진 휴이터가 이블린의 팔꿈치를 붙잡고 옆으로 밀었다.

16550809617875.jpg“으응? 왜? 뭔데?”

16550809617869.jpg“할 말이 있어. 빨리. 누가 들으면 곤란해.”

졸지에 으슥한 길목으로 끌려간 이블린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쨌든 황제의 연인이라는 입장이니, 괜한 오해라도 사면 곤란했다.

16550809617869.jpg“이브, 임신 기사 터트린 사람, 너희 아버지가 맞는 거지?”

16550809617875.jpg“갑자기 그건 왜?”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추는 휴이터에 이블린 또한 진지해졌다.

16550809617869.jpg“요즘,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종종 만나러 오더라.”

16550809617875.jpg“디에스티 공작님을?”

16550809617869.jpg“그래.”

황궁에서 퇴근하고 돌아가다가 공작저를 막 떠나는 티에르 공작의 마차를 본 적도 두어 번 있었다.

16550809617875.jpg“……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아?”

16550809617869.jpg“정확히는 모르지만, 네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다더라고. 폐하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황궁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몸도 약한데 걱정이 크다, 뭐 이런 거.”

16550809617875.jpg“……어떻게든 날 다시 데려가고 싶으신 모양이네. 알려줘서 고마워, 휴이.”

아직도 딸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 행세를 하고 다니시는군요. 쓰게 웃은 이블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09617869.jpg“어쨌든 몸조심해. 아벤토 후작 사건도 그렇고, 황궁이라고 안전한 건 아니니까.”

16550809617875.jpg“응, 그럴게.”

휴이터에게 안심하라며 작게 웃어준 이블린이 다시 밝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휴이터는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블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16550809636199.jpg“디에스티 경, 난 솔직히 자네가 내 사위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얼마 전 마주쳤을 때, 웃으며 슬쩍 흘리던 티에르 공작의 말이 생각났다. 굳이 이 말까지 이블린에게 전할 생각은 없었다.

16550809658006.jpg“휴이터, 너까지 이블린에게 괴로운 짐이 되지 마라. 너라도 이블린을 지지해줘야지.”

  귀족 회의가 끝난 뒤, 부친이 그에게 한 첫마디는 경고였다.

16550809658006.jpg“파시아가 죽고 나니 다들 티에르 가문이 만만해진 모양이야. 파시아가 살아 있더라면 아무 소리도 못 했을 종자들이 목소리만 커져서는. 이블린을 끌어내리려 혈안이 됐더구나.”

  그 말을 듣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누구보다 이블린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웃게 해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괴롭더라도 이블린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했다. 어차피 이블린이 원하는 건 티에르가의 가주이고, 황제가 티에르 가문에 데릴사위로 갈 수는 없다. 그러니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블린의 곁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16550809617869.jpg‘폐하, 아무래도 제가 좀 더 여러 면에서 유리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조금 치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글쎄, 그렇게 따지면 질투심을 숨기지 않는 황제도 저와 다를 바 없지 않나. 그가 보란 듯 제 눈앞에서 이블린을 낚아채 간 것만 여러 번이었다. 이블린을 보지 못하게 문을 쾅 닫아버리던 유치함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16550809617875.jpg“휴이? 안 갈 거야?”

16550809617869.jpg“가.”

돌아보며 묻는 이블린에 금방 생글생글 웃음 띤 얼굴로 변한 휴이터가 조르르 이블린에게 다가갔다.

16550809617869.jpg“그러고 보니, 이제 티파티지?”

16550809617875.jpg“응, 맞아.”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도 굳이 출근해서 업무를 처리하는 게 이블린다웠다.

16550809617869.jpg“그거 때문에 사교계가 떠들썩했다더라.”

16550809617875.jpg“내가 주최하는 건 처음이니까. 제법 화려하게 준비했어.”

16550809617869.jpg“그래?”

16550809617875.jpg“응, 궁금하면 너도 올래?”

16550809617869.jpg“뭐? 내가 거길 왜!”

휴이터가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16550809617875.jpg“예전에 알리에타랑 둘이 소풍 가면 무조건 따라오려고 했잖아. 알리에타가 만든 쿠키 먹고 싶다면서.”

16550809617869.jpg“…….”

하, 내가 진짜 쿠키 먹으러 갔겠어? 너 보러 간 거지.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하긴, 친구를 가장해 곁에 붙어 있었으니 그쪽으로는 아예 짐작조차 못 할 거다. 어차피 지금 마음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이블린이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을 거고.

16550809617869.jpg“됐어, 초대는 고맙지만 사양할게.”

16550809617875.jpg“왜? 혹시 알아? 네 이상형인 영애가 올지?”

16550809617869.jpg“잊었나 본데, 이브. 나는 너보다 먼저 사교계 데뷔를 끝냈어.”

16550809617875.jpg“아, 그렇지.”

16550809617869.jpg“그 말은 즉, 영애 대부분은 안면이 있다는 말이지.”

16550809617875.jpg“……그래?”

어, 그럼, 아쉴브 영애도 알아? 바로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지만, 이블린은 금방 호기심을 지워냈다.

16550809617875.jpg“그래? 그럼, 가장 아름다운 영애는 누구였어?”

16550809617869.jpg“……없던데.”

16550809617875.jpg“참나, 쑥스러워하기는.”

16550809617869.jpg“네가…….”

16550809617875.jpg“응?”

16550809617869.jpg“네가 제일 예쁘더라.”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16550809617875.jpg“……고마워?”

눈을 깜빡인 이블린이 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예쁘다니, 휴이터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16550809617875.jpg“사교계 데뷔 좀 먼저 했다고 입에 발린 소리도 하네? 툭하면 못생겼다고 놀리더니.”

그간 검술 연습하며 땀을 뚝뚝 흘리는 꾀죄죄한 모습만 보였으니 이해는 가지만.

16550809617869.jpg“이브, 넌 진짜…….”

휴이터가 무어라 따지려다가 포기했다. 그래, 황제도 이런 애랑 당장 뭘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 한편으로는 이블린이 눈치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이 됐다.

16550809617869.jpg“됐고, 이거나 받아.”

16550809617875.jpg“응? 이게 뭐야?”

이블린이 작은 벨벳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금색 구슬이 일렬로 박힌 머리 장식이었다.

16550809617869.jpg“그러니까, 음.”

휴이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16550809617869.jpg“그냥, 오늘 잘하라는 의미로. 네 첫 티파티잖아.”

16550809617875.jpg“……휴이, 이건 좀 감동인데?”

씩 웃은 이블린이 팔꿈치로 휴이터의 옆구리를 세게 쳤다.

16550809617869.jpg“아야,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빨리 가기나 해, 알리에타가 기다리겠어.”

16550809617875.jpg“고마워, 휴이. 그럼 후기 전할게!”

휴이터는 서둘러 떠나는 이블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선물의 보답으로 고마움의 키스 같은 건 없었지만, 이블린이 웃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미소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아직은. * * *

16550809720532.jpg“하, 얼굴 한 번 안 비춘다 이거지.”

졸지에 휴이터의 연민을 얻은 바스티안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잠깐 업무만 보고 오겠다던 이블린은 오전이 다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았다. 당장 오후에는 티파티가 예정되어 있는데. 며칠 이블린 몰래 처리할 게 있어 잠시 자유를 줬더니만, 이때다 싶어 만끽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없는 틈을 타 알리에타의 방으로 가버린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16550809720532.jpg“그래, 결국 아쉬운 사람은 나지.”

바스티안이 어떻게 하면 이 손에 잡힐 듯 잡혀주지 않는 아가씨를 꼭 붙들어 맬 수 있을까 고민할 때였다.

16550809617875.jpg“폐하께서는 안에 계시지?”

16550809658006.jpg“네, 단장님.”

집무실 앞에서 이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톤이 약간 높은 게 즐거워 보였다. 난 버려두고, 혼자 즐거워? 앞으로 집무실이나 지키게 할까. 저울질하던 바스티안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16550809617875.jpg“……폐하!”

놀란 토끼 눈이 된 이블린이 그를 올려다봤다.

16550809720532.jpg“이블린, 무척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야.”

16550809617875.jpg“네, 저도 그렇습니다.”

이블린이 순순히 인정하자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16550809720532.jpg“요즘 즐거워 보여.”

16550809617875.jpg“네?”

제가요?라고 되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16550809720532.jpg“자꾸 그대의 직무를 잊으면 곤란해.”

16550809617875.jpg“…….”

아니, 제가 잊은 게 아니라요. 폐하께서 저를 멀리하셨잖아요? 말하자니 어쩐지 투정 부리는 것 같았다.

16550809617875.jpg“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지만, 이블린은 일단 양보하기로 했다.

16550809720532.jpg“반성하는 태도가 아주 훌륭해. 어쨌든 잘 왔어. 그대에게 줄 게 있거든.”

바스티안이 이블린에게 습관처럼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잡은 이블린이 의아해하며 바스티안의 뒤를 따랐다. * * *

16550809617875.jpg“이번에는 코르셋 세게 조이지 마!”

응접실에 앉아 있던 바스티안은 문 너머에서 투덜거리는 이블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음을 흘렸다. 알리에타에게는 저런 투정도 부리는구나 싶었다.

16550809658006.jpg“어휴, 어차피 임산부라 그러지도 못해요!”

이블린을 달래듯 어르는 잔소리도 들렸다. 이블린을 휘어잡는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것 같았다. 알리에타에게 방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곧 문이 열렸다. 바스티안은 웃음을 머금은 채 몸을 일으켰다.

16550809720532.jpg“그 옷, 잘 어울리네.”

몸의 선이 드러나지 않게 소매와 가슴 부근에 풍성하게 볼륨을 넣은 물빛 드레스였다. 임산부라는 걸 강조하려고 한 거겠지만, 우아하고 사랑스러움이 배가 된 느낌이었다.

16550809720532.jpg“이리와.”

이블린의 손을 잡아 이끈 바스티안이 네모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건 푸른색 보석이 줄지어 박힌 목걸이였다.

16550809617875.jpg‘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이블린의 눈이 가늘어지려던 찰나,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돌려세웠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손등으로 쓱 걷어낸 바스티안이 하얀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고리를 채우는 손길에 이블린은 숨을 참았다.

16550809720532.jpg“다 됐어.”

그대로 이블린의 양팔을 잡으니 뒤에서 안은 모양새가 됐다. 바스티안은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16550809617875.jpg“!”

이블린이 간지러워 몸을 움츠리는데 다시 몸이 빙글 돌고, 눈앞에 바스티안이 나타났다. 바스티안이 손끝으로 이블린의 볼을 톡 건드렸다.

16550809720532.jpg“오늘 그대의 무기가 되어줄지도 모르니, 절대 풀지 마.”

목걸이가 무기라니? 꽤 무겁기는 한데.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809720532.jpg“잘 다녀와.”

이블린의 아리송한 표정을 보고 쿡 웃은 바스티안이 고개를 내려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 * *

16550809658006.jpg“어머, 이블…… 아니, 단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티파티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한 셀리메 후작 영애가 부채를 팔랑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16550809658006.jpg“제복 입은 모습 좀 보나 했는데, 아쉽네요.”

16550809617875.jpg“갈아입고 올까요?”

16550809658006.jpg“호호, 아니에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티에르 영애.”

큭큭대며 웃은 셀리메가 뒤늦게 예의를 갖췄다.

16550809617875.jpg“나야말로 초대에 응해주어 고마워요.”

셀리메를 시작으로 이블린은 찾아오는 손님을 차례대로 맞았다. 그리고.

1655080979824.jpg“보니카 아쉴브입니다.”

이블린은 한 번씩 궁금했던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16550809617875.jpg“반가워요, 아쉴브 영애.”

보니카 아쉴브. 그녀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1655080961786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