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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기묘한 불쾌감 (41/95)

41. 기묘한 불쾌감2022.02.20.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한 붉은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 보니카는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굴곡진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강조한 드레스를 입은 보니카는 정숙한 차림의 영애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보니카 또한 그런 자신을 잘 아는 듯했다. 조금 치켜 올라간 그녀의 눈꼬리가 여유롭게 휘었는데, 그 모습이 저절로 시선을 끌 만큼 고혹적이었다.

16550809866649.jpg“모쪼록 오늘 즐거운 티파티가 되면 좋겠네요.”

깃털이 달린 부채를 촤르륵 펼쳐 얼굴을 반쯤 가린 보니카가 눈꼬리를 접어 웃고는 우아하게 안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짙은 장미 향이 남았다. 잠깐 숨을 참았다 내쉰 이블린이 뒤이어 오는 손님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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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09866663.jpg“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 봐요.”

16550809866663.jpg“그러게요, 풍경이 정말 환상적이에요. 역시 황궁은 차원이 다르네요.”

싱그러운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 한가운데 새하얀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레이스로 장식한 울타리가 빙 둘러있었다. 이국적인 꽃문양이 수 놓인 테이블 위에는 고급 찻잔과 함께 색을 맞춘 갖가지 종류의 디저트가 올려져 있었다. 산들바람을 따라 색색의 레이스가 예쁘게 흔들리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분수대의 물줄기 소리가 아름답게 섞여 운치를 더했다.

16550809866663.jpg“후후, 집으로 돌아가면 동생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겠어요.”

16550809866663.jpg“오늘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꽤 속상하겠는데요?”

삼삼오오 모인 영애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16550809866682.jpg‘이제 다 모인 건가.’

입구에서 마지막 손님을 맞은 이블린이 손님들의 면면을 천천히 살폈다. 무리 지어 있는 것만 봐도 최근 사교계의 흐름이 어떤지 한눈에 보였다. 바스티안의 명으로 다베르가 공유해 준 자료가 있어서 더 쉽기도 했다. 먼저 셀리메 후작 영애를 중심으로 한 친황제파. 또 하나는 중앙으로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신흥 귀족가의 영애들. 마지막은 아마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걸 반대한다던 가문들. 그 중심에 서 있는 보니카가 보였다.

16550809866682.jpg‘흠.’

이블린은 짧게 심호흡한 뒤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16550809866682.jpg“초대에 응해주신 영애들이 다 온 것 같으니, 이제 자리해 볼까요?”

이블린은 각자 자리를 찾아가는 손님들을 보며 친절하게 웃었다.

16550809866682.jpg‘아무래도 친황제파 이외의 가문들은 아버지의 입김이 닿았을 텐데. 그래도 여기에 왔다는 건, 아버지가 여전히 다정한 부친 행세를 하고 다니기 때문이려나.’

이블린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득 싸움에 끼어든 부모들과는 다르게 이제 막 사교계에 발을 디딘 영애들이었다. 미래의 사교계를 이끌어 나가게 될 이들이자, 현재의 사교계 중심에 있는 귀부인들로 연결될 고리였고. 이블린은 목걸이를 매만졌다.

16550809894466.jpg“나를 마음껏 이용해, 내 이름을 얼마든지 팔라는 이야기야.”

  바스티안이 목걸이를 걸어 주며 했던 당부였다. 그는 고맙게도 티파티를 계획한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챈 듯했다. 마침, 앳되어 보이는 영애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얼마 전 중앙 사교계에 진출했다던 자작 영애였다. 이블린이 싱긋 웃자 영애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선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리 2년 동안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제국의 꽃이라 불리던 이블린이었다. 그만큼 언론의 단골 소재였으니, 제국민이라면 이블린 티에르를 모르는 게 더 힘들었다. 그게 부친이 그녀를 집에 더욱 가둬두려 한 이유이기도 할 테고. 이블린은 오늘 그들이 가진 감정에 날개를 달아 줄 생각이었다. 황제의 사랑을 받는 제국의 꽃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혹 최악의 경우로 부친과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날 수도 있으니, 부친보다는 그녀에게 줄을 대는 게 더 유리하게끔 느껴지도록 밑 작업을 해두려는 거였다.

16550809866663.jpg“세상에, 공녀님 덕분에 황궁 구경을 또 해보네요.”

본격적인 모임이 시작되자 한마디씩 소감을 얹었다. 공녀님, 단장님, 티에르 영애. 여러 호칭이 우후죽순 섞여 나왔다.

16550809866682.jpg“오늘은 티에르 가의 안주인으로서 여러분을 초대했어요, 실은 공작가로 초대하려 했는데, 최근 제게 많은 일이 일어나다 보니.”

이블린이 흘리듯 덧붙인 말에 다들 손이나 부채로 입을 가리며 쑥스러운 웃음을 숨겼다. 이블린이 의도한 말을 알아들은 탓이었다.

16550809866663.jpg“워낙, 불같은 사랑을 하고 계시니까요?”

셀리메가 바람을 잡듯이 쐐기를 박았다.

16550809866663.jpg“솔직히, 부러워 죽겠어요. 영애가 그런 반가운 ‘사고’를 쳐 준 덕분에 대리 만족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기사단장 임명부터 임신 스캔들까지, 이블린 티에르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2년 전 불의의 사고만 없었다면, 이블린 티에르는 명실상부 사교계의 정점에 섰을 존재라는 걸. 그리고 지금은 황제의 아이까지 가졌지. 물론 결혼 전 임신이라는 건, 귀족 영애로서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늘 예법에 얽매인 영애들에게는 그마저도 일탈을 꿈꾸게 하는 로맨틱한 일로 느껴졌다. 일말의 카타르시스라고나 할까.

16550809866682.jpg“그렇게 말해주니, 조금 뻔뻔해져야겠군요.”

16550809866663.jpg“후후, 얼마든지요.”

16550809866663.jpg“그런데 영애, 건강은 좀 괜찮은 건가요?”

누군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피오넬 자작 영애.

16550809866682.jpg‘그러니까, 내가 황후가 되는 걸 반대하는 쪽이었지?’

16550809866682.jpg“네, 보다시피요.”

이블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말을 꺼내 준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건강에 대한 소문을 불식시킬 좋은 기회였다.

16550809866682.jpg“사실, 건강이 안 좋은 것보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이기기 어려운 게 컸어요. 조부께서 돌아가신 직후였으니까요.”

16550809922225.jpg“아.”

안타까운 탄식이 곳곳에서 터졌다.

16550809866682.jpg“아버지도 제가 걱정되셨는지, 사교계 데뷔를 반대하셨고요.”

마지막 문장에는 일부러 묘한 뉘앙스를 섞어 흘렸다.

16550809866682.jpg“슬픔을 이기려다 보니 뒤늦게 검술에 빠져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기사단장직까지 맡게 되었네요. 지금은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 하루하루가 행복하답니다.”

이블린이 정말 행복한 듯 웃으며 배를 쓸어내렸다.

16550809866663.jpg“어머, 부러워라.”

16550809866663.jpg“연애결혼인 것도 부러운데, 또 상대가 황제 폐하시라니. 영애는 정말 모든 걸 다 가졌어요.”

16550809866663.jpg“자자, 그쯤하고, 우리 준비한 게 있잖아요?”

셀리메가 부채를 접어 탁탁 손바닥을 내리쳤다.

16550809866663.jpg“우리가 공녀님과 배 속 아기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이런 자리에 빈손으로 올 수 없잖아요?”

셀리메가 눈을 찡긋하며 신호를 보내자 하녀 하나가 크고 작은 선물 상자와 꾸러미가 담긴 트롤리를 밀면서 다가왔다.

16550809866663.jpg“황궁으로 초대해 준 보답이에요.”

16550809866682.jpg“초대에 응해준 것도 고마운데, 선물이라니요.”

16550809866663.jpg“아이 참, 그러지 말고 빨리 풀어 봐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재촉에 미안해하던 이블린이 곧 선물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아기용품, 결혼한 귀부인들이 즐겨 쓴다는 향유, 등등 귀족 영애들이 할 법한 선물이었다. 이블린은 선물을 하나씩 열 때마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고, 선물한 이들은 뿌듯해하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생각보다 즐거운 이벤트였다. 꽤 한참이 지나서야 이블린은 몇 개 남지 않은 상자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용물은 예쁜 색의 라크리마 찻잎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16550809866682.jpg“……어머나.”

병의 내용물을 본 이블린은 곧 난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선물 대부분을 열어 본 터라, 이게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이블린은 마음을 정했다.

16550809866682.jpg“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차향은 몇 달 후에나 즐길 수 있겠군요.”

영애들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서로 눈치를 살폈다.

16550809866682.jpg“이건, 임산부가 마실 수 없는 차거든요.”

이블린이 아쉽다는 듯한 마디를 더하자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빠르게 부채 뒤로 얼굴을 숨겼다. 한참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선물을 준 범인이 누구인지 색출하는 듯 부채 위로 시선들이 오갔다. 그리고 범인은 의외로 순순히 정체를 드러냈다.

16550809866649.jpg“어머, 이런, 제가 크나큰 결례를 범했네요.”

매끄럽게 끼어든 이는 보니카였다.

16550809866649.jpg“제가 임신을 안 해봐서, 그런 건 잘 몰랐지 뭐예요? 게다가…….”

임신을 안 해봐서라니, 교묘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16550809866649.jpg“그 차, 폐하께서 좋아하시던 거예요.”

16550809866682.jpg“…….”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16550809866649.jpg“폐하와 같이 즐기시라고 준비한 건데,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보니카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를 해왔다.

16550809866663.jpg“어머, 아쉴브 영애.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차인 건 어떻게 알고?”

16550809866649.jpg“폐하께서 황태자이시던 때에…….”

셀리메가 웃는 얼굴로 톡 쏘아붙이자, 보니카가 기다렸다는 듯 매혹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0809866649.jpg“음, 그냥 거기까지만 이야기할게요. 자세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기에는…… 으응, 역시 조심스럽네요.”

보니카가 붉은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웃었다. 전혀 조심스러운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황제와 무언가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말이었다.

16550809866682.jpg“…….”

이블린은 생각이 많아졌다. 보니카 아쉴브의 편지를 보고 묘한 반응을 보였던 황제. 그와 인연이 있다고 대놓고 티를 내는 보니카 아쉴브.

16550809866682.jpg‘역시 내 감이 맞았던 건가. 마음에 두었다던 사람이 아쉴브 영애였어? 그래서 저렇게 불편한 티를 내는 거고?’

내가 자신의 연인 곁에 붙어 있는 얄미운 여자라서?

16550809866682.jpg‘그런 거라면…… 좀 이상한데.’

이블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스티안이 진짜 연인을 두고도 제게 계약을 제안한 거라면, 필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런 자리에서 저런 식으로 티를 내면 바스티안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는 걸 텐데, 굳이 저런 행동을 취할 이유가? 아니, 질투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서, 이블린은 곧 후회하고 말았다. 역시 바스티안에게 정확히 물었어야 했다. ‘아는 영애인가요?’ 그렇게 한마디만 물었으면 될 일이었는데, 왜 꺼내지 못했을까. 지금 보니카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 건지 마음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바스티안과 보니카가 정말로 연인 사이라면, 지금 제 존재 자체가 보니카에게는 상처일 테고. 그게 아니라면, 보니카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거였다. 자칫하면 바스티안의 명예에 흠이 갈 만한 이상한 소문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그렇다고 지금 바스티안에게 달려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6550809866682.jpg‘일단은 중립을 지켜야 하나.’

고민하던 이블린은 손에 든 차를 힐끗 쳐다봤다. 어쨌든 바스티안이 이 차를 좋아하는 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16550809866682.jpg‘폐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긴 하네.’

제게 관심 좀 가지라던 그의 말이 왜 지금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기묘한 불쾌감은 또 뭔지. 어쩐지 입안이 텁텁해질 때.

16550809866649.jpg“어머, 설마 모르고 계셨던 건 아니죠?”

보니카의 한마디가 덧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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