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나와 결혼해 주겠어?2022.02.23.
“배려 고마워요, 영애. 특별히 폐하와 연이 있다니 더 반갑네요. 이 선물은 폐하께 꼭 전해드리지요.”
이블린이 적당히 대꾸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이든, 어쨌든 이 자리에서는 자신이 황제의 연인이었다.
“그런데, 영애. 시녀들을 들일 계획은 없나요? 곧 황후가 되실 거잖아요?”
“맞아요, 혹시 생각해 놓은 분이라도?”
다행히 영애들의 관심은 금방 다른 데로 넘어갔다.
“어머, 시녀라니.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닌가요? 결혼식도 아직인데.”
이번에도 보니카가 끼어들고 말았지만.
“영애,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죠?”
슬슬 못 참겠다는 듯 셀리메의 눈초리가 사납게 변했다.
“어머, 셀리메 영애. 저는 절차를 말한 것뿐이에요.”
찻잔을 내려놓은 보니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육감적인 선이 도드라졌다.
“그렇지만…… 절차가 어떻든 티에르 영애가 황후가 되리라는 건…… 기정사실 같은걸요.”
쭈뼛대며 끼어든 건 조용히 있던 영애였다. 처음에 눈이 마주쳤던 어린 자작 영애.
“지, 지금 영애의 목걸이, 선황후 폐하의 초상화에서 본 거예요……. 황후에게만 물려주는 목걸이라고 들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닿자 볼을 붉힌 영애가 설명을 덧붙였다.
“!”
이건 진짜 몰랐던 건데. 이블린이 제 목걸이로 손을 뻗었다.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굳이 불러서 직접 채워주는 게 이상하다 싶기는 했다. 무기가 될 거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목걸이 끝을 만지작거린 이블린이 본능적으로 보니카의 표정을 살폈다. 내내 태연하고 여유롭던 그녀의 표정이 꽤 일그러져 있었다. 이블린은 확신했다. 황제의 숨겨진 연인이든 아니든, 보니카는 그녀에게 확실히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대체 왜? 내가 그녀에게 미움받을 게 뭐가 있지? 황후 자리를 노리기라도 했나? 이블린이 고민하는 찰나. 갑자기 정원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손에는 처음 보는 악기들이 들려 있었다.
“뭐죠?”
“어머, 저건 뭐지?”
영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내가 준비한 게 아닌데? 이블린도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녀님.”
마침 티파티를 돕던 알리에타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폐하께서 준비해주신 악단입니다.”
알리에타가 모두 들으란 듯 일부러 크게 목소리를 낸 탓에 영애들의 시선이 쏠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걸 확인한 알리에타가 말을 이었다.
“아이에게도 들려줄 겸, 초대된 영애들과 즐겁게 지내시라고 일부러 오펜 상단에 명하셨다는군요.”
“어머나, 감동적이다.”
모두가 감탄하는 사이, 어느새 세팅을 끝낸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덕분에 팽팽하던 기 싸움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됐다. 어쨌든 바스티안이 적절한 도움을 준 셈이었다. 하지만, 처음 의도한 대로 그녀가 사교계의 정점에 설 존재라는 느낌을 심어줬는지는 의문이었다. 영애들에게는 기사단장의 멋진 모습 같은 것보다야, 그쪽이 훨씬 더 먹힐 테니까. 이블린의 고민을 안고 다시 차분한 티파티가 이어질 때였다.
“폐하?”
누군가의 교태 어린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니카였다. 본인이 목소리를 내고도 놀랐는지, 보니카가 상기된 얼굴을 부채로 황급히 가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정원의 입구 끝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바스티안이었다. 바스티안과 보니카를 번갈아 보던 이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관계를 궁금해하기 전에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게 우선이었다.
‘따로 들른다고는 안 하셨는데.’
이블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진짜 보니카 영애와?’
다시금 머리를 치켜든 의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드레스 자락을 곱게 쥔 보니카가 영애들 틈을 비집고 바스티안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바스티안을 보는 보니카의 시선이 마치 제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 열렬했다. 이블린은 묘한 기분으로 보니카의 움직임을 좇았다. 이제 그녀는 어느새 바스티안의 코앞이었다. 두 사람이 이블린의 시야에 함께 잡힐 때쯤. 이블린은 바스티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움찔하고 말았다.
“…….”
바스티안의 회녹색 눈동자가 제게 꽂혀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 외에는 볼 생각도 없었다는 듯, 그는 다른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시리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뭐야, 나 뭐 잘못했나?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당황한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맞으려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입어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잡고 몇 발자국 움직이니 이미 바스티안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폐하, 혹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물으려 했는데. 이블린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이미 그녀는 바스티안의 품에 안긴 후였다.
“……보고 싶어서 왔어.”
머리 위로 떨어진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허리를 끌어안은 단단한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대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왔으니, 혼을 낼 건가.”
바스티안의 다정한 목소리 뒤로 영애들이 숨넘어갈 듯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혼을 내기는요, 적절한 때에 잘 와 주셨네요.’
바스티안의 어깨에 반쯤 가려진 시야로 일그러진 보니카의 얼굴이 보였다. 이블린은 직감했다. 적어도 바스티안이 마음에 품은 여인이 보니카 아쉴브는 아닐 거라고. 비록 연기였든 무엇이었든, 그간 바스티안이 제게 보여준 말이나 행동을 생각했을 때, 그가 정말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이런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있지만.
“폐하, 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바스티안의 등을 다독인 이블린이 손을 내려 그의 팔을 살그머니 붙잡았다. 그러자 바스티안이 안았던 팔에 힘을 풀며 눈을 마주쳐 왔다. 이블린은 또 한 번 움찔하고 말았다.
‘세상에.’
누가 보면 눈에서 꿀이라도 흐른다고 착각할 정도로 다정한 눈빛이었다. 있지도 않은 잔머리를 자연스레 손끝으로 쓸어 넘겨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동그란 귓바퀴를 매만졌다. 그 간지러운 손길에 허리가 찌릿했다. 덕분에 연기하지 않아도 진짜 부끄러운 사람처럼 저절로 몸이 배배 꼬였다.
“……폐하.”
하지 말라는 듯 작게 속삭이자 바스티안이 피식 웃으며 이블린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보지 마, 이브. 사랑스러워서 참기 어려워.”
“폐하, 보는 눈이 많아요…….”
“아.”
바스티안이 그제야 다른 이들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듯 귀찮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관중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스티안의 표정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실례했군.”
“아, 아니, 아닙니다.”
바스티안의 무뚝뚝한 말에 영애들이 뒤늦게 고개를 조아리며 예의를 갖췄다. 실례라니, 전혀 아니었다. 바스티안의 등장부터 이블린을 향한 애정 표현까지, 전부 놓치기 아까운 장면들이었다. 한 편의 로맨스 책이라도 본 듯 모두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일부는 애써 웃는 게 티가 났지만.
“폐하, 마음 써주신 덕분에 즐겁게 보내고 있었어요. 이국의 악단이라니,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팔에 손을 얹으며 눈을 휘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네, 감사해요. 그리고, 이 목걸이.”
이블린이 일부러 단어에 힘을 줬다.
“주실 때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이블린이 목걸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차피 그대 것이 될 텐데. 그대는 내 유일한 연인이자 아내가 될 테니까.”
바스티안의 말에 술렁임이 일었다.
“아, 선물이 하나 더 있어. 이것도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바스티안이 어딘가를 보며 신호를 주듯 고개를 까딱였다. 동시에 먼 곳에서 삐이익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새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빠르게 경계심을 끌어올린 이블린이 어두워진 하늘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펑! 굉음과 함께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펑! 펑!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높이 뻗어가던 금빛 줄기가 잘게 쪼개지더니 하늘을 수놓았다. 색색의 향연이었다. 놀란 이블린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이토록 황홀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늘에서 별 조각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예쁘다.”
이블린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솔직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때, 바스티안은 홀로 이블린의 얼굴을 감상했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위로 색 가루를 뿌린 듯 여러 가지 색이 피어나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표정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이블린의 다양한 표정을 보는 것도, 제 팔을 꾹 움켜쥐고 있는 손을 보는 것도 좋았다. 오로지 그에게만 의지하듯, 그를 붙잡고 선 이블린이 마음에 들었다.
‘오펜 자작에게 큰 상을 줘야겠군.’
바스티안이 흡족해하는 사이, 피날레를 장식하듯 가장 커다란 불꽃이 터졌다.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을 가득 채우던 금빛 줄기가 사라지고 완전한 어두움이 깔렸다.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에요.”
“너무 아름다워요.”
여운에 잠겨 있던 영애들이 하나둘씩 감상을 토해냈다. 웅성대는 감상을 신호 삼아 다시금 청아한 현악기의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폐하, 언제 이런걸…….”
이블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스티안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이블린이 놀라서 그를 일으키려 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바스티안이 곧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안에 든 건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은 연녹색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나와 결혼해주겠어?”
“…….”
“이브, 그대에게 청혼하는 거야.”
바스티안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걸 보고서야 이블린은 정신을 차렸다.
‘오늘 티파티의 목적이 뭐였는지 잊었어?’
바스티안의 표정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기꺼이요.”
이블린은 감동에 젖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바스티안이 끼워 준 반지는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맞았다.
“행복하게 해줄게. 그대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지.”
그대로 이블린의 손을 쥔 채 일어선 바스티안이 고맙다는 듯 이블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감동이에요, 폐하.”
“그럼, 안아줘야지, 이브?”
이블린은 바스티안이 크게 벌리는 팔 안으로 쏙 들어가 안겼다.
“……어쩌죠?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이 안 나요. 좀 놀라서요. 이블린은 바스티안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냥 적당히 우는 척해. 어차피 내 품이라 안 보이니까.”
약간 눈동자가 젖었던 것도 같은데 아닌 척하기는. 헤세 부리는 게 귀여워서 모르는 척해주기로 한 바스티안이 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