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벤트, 로맨틱, 성공적2022.02.27.
이블린은 더 꼭 안아주는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맞닿은 귀에서 쿵쿵, 울리는 바스티안의 심장 박동 소리가 왜인지 마음을 편하게 했다.
“폐하,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그대가 놀라지 않았을 테니까. 그대의 연기는 솔직히, 음…….”
“…….”
아, 별로라고요? 폐하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반박하려던 이블린은 그냥 참기로 했다.
“그대 몰래 준비하느라 힘들었어.”
아, 그래서 요즘……. 바스티안이 그녀를 멀리한 이유를 알게 되자 왠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벤트는 성공적인 것 같군. 안 그래?”
“네, 그러네요.”
이블린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인상 깊은 청혼이었다. 일부러 귀족 영애들에게 보란 듯 벌인 일이라는 걸 아는데도 착각할 만큼. 후에 누군가에게 진짜 청혼을 받게 돼도,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청혼이었다.
. . 이블린의 티파티는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채 끝이 났다. 황궁을 떠나기 직전, 영애들은 바스티안이 준비한 기념 선물을 받게 됐다. 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분홍색 진주가 박힌 브로치였다.
“황궁까지 온 그대의 손님이니까, 그냥 보낼 수는 없지.”
감동한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이블린에게 황제가 건넨 한 마디였다. 황제가 이블린 티에르를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 이 사실은 영애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바스티안이 굳이 이블린의 티파티에서 청혼한 건, 그런 의도였다. 그대들의 부모가 이블린이 황후가 되는 걸 반대하든 말든, 황제의 총애를 받는 여인은 이블린 티에르 단 하나뿐이니 똑똑히 봐두라고. 이블린이 사교계에 군림하는 데 그보다 더 든든한 배경은 없을 터. 그리고, 바스티안의 의도를 잘 아는 이블린 또한 이런 깜짝 이벤트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티에르 영애,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바스티안의 이벤트에 감화됐는지 더 많은 영애가 처음보다는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만하면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즐거웠다니, 다행이에요.”
이블린은 일부러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중간중간 바스티안과 눈길을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는 이가 있었으니.
‘세상에, 아름다운 한 쌍이네.’
바로 셀리메였다. 그런 셀리메의 눈에 불순물 하나가 들어왔다. 보니카 아쉴브.
‘어쩜, 무례하기도 하지.’
깜짝 선물을 준비하자고 했을 때는 흔쾌히 동의하더니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어떻게 임산부가 마실 수 없는 걸 준비하지? 임신 기사로 온 제국이 난리였는데 몰랐을 리도 없고, 일부러 그런 게 분명했다. 이블린이 착하기도 하고, 파티를 주최한 당사자니까 좋게 넘어간 거지 오늘 보니카의 행동은 여러모로 결례였다. 셀리메는 보니카가 곁눈질로 바스티안을 힐끗대는 걸 잠자코 지켜봤다. 티파티 내내 여유롭게 우아한 미소를 짓던 보니카는 꼭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불안해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블린 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저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서둘러 드레스 자락을 쥔 셀리메가 잰걸음으로 다가가 보니카의 곁에 섰다.
“……뭐죠?”
“어머, 아쉴브 영애.”
보니카가 왜 따라붙냐는 식으로 노려보자 셀리메도 지지 않고 미소 지었다.
“아까 듣자 하니, 폐하와 연이 있으신 것 같던데?”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근처에 있던 바스티안과 이블린의 귀에 들리기엔 충분했다.
“영애? 갑자기 왜 이래요?”
얜 또 왜 이래? 보니카가 애써 웃으며 당혹스러운 심정을 숨겼다. 하필 청혼이니 뭐니 요란한 이벤트가 있고 난 다음이었다. 안 그래도 들러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티에르 영애를 위한 선물을 고르는데 폐하의 취향을 고려할 정도였잖아요.”
이블린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오려 하자, 셀리메가 눈짓으로 막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나 셀리메 아미. 불의를 보고 참지 않지. 억울한 건 그냥 넘어가지 않지. 오늘 넌 내가 응징하고 만다.
“지금 무슨 말을…….”
보니카가 호호, 웃으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데 바스티안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빤히 보는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역시, 날 기억하는구나. 보니카는 재빨리 미소부터 장착한 뒤 바스티안에게 다가갔다. 한 마리의 흑조처럼 걷는 보니카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폐하, 여기서 뵙다니…… 무척 기쁩니다.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다시?”
바스티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 한쪽만 까딱였다.
“내가, 영애를 만난 적이 있던가?”
“……네?”
보니카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동시에 셀리메는 웃음이 터질뻔해서 부채 뒤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그럼 그렇지. 어딜 넘봐, 폐하의 곁은 우리 이블린 자리야.
“폐하, 그러니까 4년 전에…….”
“미안하지만, 영애.”
바스티안이 보니카의 말을 끊었다.
“워낙 만나고 다닌 이들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기 어렵군요.”
바스티안이 딱히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대화를 끝냈다.
“아, 그, 그러시군요.”
보니카의 붉은 얼굴은 이제 조명으로도 가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요, 아쉴브 영애.”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이블린이 중재에 나섰다. 바스티안은 보니카를 아예 모르는 듯했고, 그 결과 주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영애.”
속사포처럼 말한 보니카가 휙 몸을 돌렸다. 이블린은 터질 것처럼 빨개진 보니카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화려한 외모와 달리 심성은 꽤 여린 모양이었다. 멀어지는 보니카를 보던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쳐다봤다. 그가 ‘왜?’라고 묻듯 눈썹을 까딱였다.
“……아녜요, 아무것도.”
소문으로만 들었지, 다른 여인에게 차갑게 구는 바스티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일하면서 다베르나 다른 이들에게 서늘하게 구는 건 자주 봤지만. 좀 더 따스하게 말해주지 그랬냐는 잔소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이블린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보니카가 진짜 바스티안의 연인이었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싶었다. * * *
“영애, 바로 가는 거예요?”
“네, 그럼 또 봐요.”
다가오는 영애들에게 눈웃음만 빨리 내보인 보니카는 도망치듯 연회장을 벗어났다.
‘날 기억조차 못 했어!’
그야말로 개망신이었다.
‘내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고소하다는 듯 웃던 셀리메의 표정과 우아하게 지켜보던 이블린의 표정이 번갈아 떠올랐다.
“아가씨? 모임은 어떠셨어요?”
“어떻긴 뭐가.”
보니카는 신경질적으로 외투를 낚아채며 마차에 올랐다. 목덜미부터 팔뚝까지 소름이 돋아 있었다. 쌀쌀한 밤인데 맨살을 드러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출발 안 하고 뭐 하니?”
보니카가 얼떨떨하게 서 있는 하녀에게 쏘아붙였다.
“아, 네네. 얼른 출발하라고 할게요.”
“정말 짜증 나.”
마차 문이 닫히고, 보니카는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던지려다가 말았다. 어쨌든 황제가 준 거였다. 그녀에게만 준 게 아니라는 게 싫지만, 또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다시 만나는 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보니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딸 사랑이 지극한 부친 덕분에 어릴 때부터 그를 따라 대륙 전역을 다녔다. 보통의 귀족 영애에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공국의 연회에서 바스티안을 처음 보게 됐다. 갓 성인이 된 그는 정말이지 근사한 남자였다.
“전하, 여기서 뵙는군요. 아쉴브 후작입니다. 아, 이쪽은 제 여식입니다.”
“보니카 아쉴브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회녹색 눈동자가 제게 닿는 순간, 보니카는 몸에 전율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멋있는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그날부터 보니카의 꿈은 황태자와 결혼하는 거였다. 이제는 그가 황제가 됐으니, 황후가 되는 거였고. 외모를 가꾸는 건 물론이고, 더 훌륭한 레이디가 되려고 귀찮아하던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황후 후보로 밀어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까지 받아낸 후였다. 그랬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방해물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 이블린 티에르. 아파서 공작가에서 투병하고 있다던 여자가, 갑자기 아이까지 가졌다며 그의 옆자리를 꿰찼다. 보니카는 신문에서만 보던 티에르 공녀의 실물을 떠올렸다. 어디 하나 흠이라도 잡을 수 있으면 기분이라도 시원한데, 짜증 날만큼 완벽했다. 일부러 곤란한 선물을 줬는데도, 내색 한 번 안 하고 우아하게 상황을 넘기는 건 또 무엇이며. 솔직히 그 선물을 확인하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러면 이블린 티에르가 얼마나 못난 여자인지, 황후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저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떡해, 정말.’
몇 년 사이 더 멋진 남자가 된 황제를 생각하니 애가 탔다. 청혼할 때의 그 다정하던 목소리와 눈빛이 제게 향한 거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 돼. 안 뺏길 거야.”
빨리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보니카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런 보니카의 마차가 떠나는 걸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뭔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잖아?’
연회장 입구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 까만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티파티에서 벌어진 일을 세세히 보고하라는 지시가 오길래, 이제는 영애들 놀이 시간까지 감시하라는 건가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나 보다.
‘흥, 귀족 영애들이란.’
유치하기 짝이 없어. 속으로 투덜댄 그림자가 근위병들이 지나는 길을 피해 걸었다.
‘슬슬 때가 됐는데.’
그림자는 특정 방향을 연신 힐끔거렸다. [실행은 티파티 당일 밤] 얼마 전 내려온 지시를 따라 판을 깔아 놓은 후였다. 계획대로 일이 벌어져야 한다. 안 그러면, 그 인간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가지고 협박하며 또 난리를 칠 테니까.
‘빨리 돈만 모이면 떠야지.’
그림자가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음?”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내고 침실로 들어서던 이블린이 걸음을 멈췄다. 정신없는 하루의 끝에, 또 다른 사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가 왜…….’
“아, 청혼한 걸 기념하려고 바꿨지.”
마침 이블린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바스티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폐하.”
분명히 더 큰 침대로 바꾸자고 했던 것 같은데, 새로운 침대는 이전보다 더 작은 거였다. 딱 붙어서 자야지만 떨어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날이 추워지니까, 좀 더 가까이서 자는 게 낫지 않겠어?”
언제는 더우니까 얇은 잠옷을 입으라더니? 이블린은 침대로 가 태연하게 자리 잡는 상관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오늘 난 그대에게 청혼했고, 그대는 받아들였으니.”
“…….”
“사이를 더 돈독하게 해보자고?”
싱긋 웃은 바스티안이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