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대도 눈이 있다면2022.03.02.
벌어진 가운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이블린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시선을 내렸다. 옷차림부터 지적해야 하나, 아니면 침대부터 지적해야 하나. 지적할 것이 너무 많아서 순서를 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오늘 도움받은 것이 많으니까, 그냥 좋게 넘어갈까? 이블린이 잠시 고민할 때였다.
“왜? 침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야…… 당연하죠. 너무 작고 좁지 않나요.”
결국, 솔직하게 불만을 토로하자 바스티안이 혀를 찼다.
“!”
지금, 혀를 찼어? 황당해진 이블린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이블린.”
바스티안은 당장 응접실로 나가버릴 태세인 이블린을 보며 근엄한 얼굴을 했다.
“그대 말이야, 내게 보고할 게 있지 않아?”
“……네?”
뭘 보고하라는 거지? 티파티에서 특이점이 있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짐작 가는 게 없었다.
“폐하,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이블린이 조금 긴장한 채 물었다.
“그대가 황궁 밖으로 나가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지?”
바스티안은 티파티를 끝낸 시점에 이블린이 가장 흥미로워할 주제를 꺼내 들었다. 유인하기 위해 당근을 흔들어 보는 거였다.
“나도 그 일로 그대에게 할 말이 있거든.”
“아.”
그 이야기였구나. 노곤하게 몸을 억누르던 피로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의 이블린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부친이 마차 사고와 관련 있다는 증거를 확보할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직접 지시한 건지, 아니면 개입한 건지. 혹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를 이용했든. 진실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할 참이었다.
“이리 와 앉아서 이야기해. 피곤해도 난 지금 확인하고 넘어가야겠으니까.”
진지한 얼굴로 지시한 바스티안이 턱 끝을 까딱였다. 이블린은 곧장 침대로 다가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바스티안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뭔가 침대에 앉아서 보고하는 상황이 좀 우스운가 싶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듣자 하니, 오펜 자작의 차 밭을 가겠다고 했다던데?”
“네.”
이블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짜 차 밭을 구경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그게 실은…….”
망설이던 이블린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젠 그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늘 티파티에서도 그와 꽤 좋은 파트너라는 걸 확인하지 않았나. 어차피 손을 잡은 이상, 차라리 전부 내보이고 서로 돕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폐하.”
이블린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 무게감을 눈치챈 바스티안의 눈빛이 변했다. 수해 지역을 둘러 볼 참인데 마침 오펜 상단의 차 밭과 가까운 곳이니 같이 가면 되겠다고, 그런 말을 꺼내려 했었다. 그런데 이블린의 어두워지는 표정을 보니, 무언가 그의 예상과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제 모친의 사고, 알고 계시지요?”
그리고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 그래, 기사로 접했지.”
바스티안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고 때문에 제국으로 돌아오는 걸 서둘렀으니까.
“그 사고의 목격자를 만나려고 해요.”
“목격자라.”
회녹색 눈동자에 담겨 있던 장난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고 직후의 일을 알아보려고요. 사고의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이거든요. 그들 중에 진짜를 찾은 것 같아요.”
“그대는, 사고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군.”
바스티안이 차분하게 읊조렸다.
“혹, 그대의 부친을 의심하는 건가?”
“……네.”
이블린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버지를 의심하는 제가, 불순해 보이시나요?”
중요한 문제였다. 티에르 가문은 대표적인 친황제파 가문이었고, 그런 티에르 가문의 추문은 황실에도 골칫거리가 될 테니까.
“아니.”
고개를 내저은 바스티안이 손을 뻗었다. 이블린의 얼굴을 감싸듯 작은 턱을 가볍게 쥐고는 단단한 연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블린이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어쩌면 이블린은 그를 전보다 더 믿게 된 건지도 모른다. 휴이터 디에스티를 믿는 것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블린, 그대와 나의 차이가 뭔 줄 알아?”
바스티안이 진중하게 이블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고, 아끼지.”
“…….”
“하지만, 난 아니야.”
차가운 목소리에 이블린의 눈가가 움찔했다.
“함부로 믿지 마, 이블린. 무엇이든 의심하고 또 의심해.”
“…….”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 어딘가가 걸렸다.
“그럼, 폐하.”
이블린이 입술을 어름거리다 열었다.
“혹, 저도 믿지 못하시나요?”
바스티안의 딱딱한 눈길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음, 어떨 것 같은데?”
“……믿으시니까 계약도 제안하신 거 아닐까요?”
바스티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섰다.
“그럼 그대는?”
바스티안이 몸을 조금 더 가까이 숙이며 물었다.
“그대는, 날 믿어서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나?”
이블린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의심과 경계뿐이었으니까.
“이런, 서운해지려 하는데. 모두에게 다정한 티에르 영애께서 정작 나는 믿지 못하다니.”
바스티안이 쿡 실소했다. 이블린이 무어라 변명을 덧붙일까 고민할 때였다.
“믿어.”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믿도록 해, 이블린.”
그의 말이 꼭 간절한 부탁 같기도 하고, 설득 같기도 했다.
“그대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엇이든.”
다정하면서도 확고한 통보였다.
“약속할게.”
“…….”
이블린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약간 울컥하는 것도 같고. 불꽃놀이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걸까. 그래서 자꾸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몽글거리나.
“음, 믿지 못하겠으면 계약서에 추가라도 할까?”
“안 그래도 계약서를 보강할까 싶었는데요.”
이블린은 일부러 크흠, 소리 내어 헛기침했다.
“철저하기도 하지. 좋아, 지금…….”
“나중에요.”
이블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은, 날 믿는 거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반쯤은요, 반쯤은 믿어 볼게요.”
“뭐, 그러시든지.”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하고서야 이블린을 놔주었다. 이블린은 조금 멀어지는 바스티안을 빤히 바라봤다. 사실, 이참에 그녀 또한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진작 물어볼 걸 그랬다고 오늘 내내 후회했던 것.
“폐하.”
“응?”
“라크리마 차, 좋아하세요?”
“?”
바스티안의 고개가 기울었다. 지금 갑자기 그걸 왜 묻는 거지? 이블린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폐하께서 그 차를 좋아하신다던데요. ……아쉴브 영애가.”
“그래? 내 취향을 내가 미처 몰랐군.”
단호한 대답에 묻기가 조금 더 편해졌다.
“그러니까, 음, 아쉴브 영애와는 아무……사이도 아니신 거죠?”
이블린은 최대한 담백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물었다.
“사이? 내가 그 영애와 무슨 사이여야 하나?”
바스티안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내 기억에는 없다고. 내가 마주치는 사람을 다 기억해야 하는 건 아니지.”
“네, 그렇죠.”
이블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티파티에서 보니카에게 아무 태도도 취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거기서 기 싸움이라도 했으면,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되었겠지.
“그런데, 일단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좀 알고 싶은데?”
“아, 그게…….”
이블린의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자 한다면, 바스티안에게 보니카와 있었던 일을 전할 사람이 없을 것 같기는 했다. 말하지 말까?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아쉴브 영애의 입장도 그렇고.
“이블린.”
한 번 더 말하라며 재촉하는 목소리에 이블린은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가 알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알게 되긴 할 거다.
“전에 제게 하신 말씀 있었잖아요. 계약을 제안하셨을 때요.”
으, 결국 내 입으로 고하게 되는구나. 이블린이 속으로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말을 꺼냈다.
“뭐지?”
“계약을 제안하신 이유가 마음에 둔 여인이 있어서라고…….”
“아, 그랬지.”
바스티안이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냥 대충 둘러댄 말인데, 이블린이 마음에 담아둔 줄은 몰랐다. 물론 거짓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여태 그 말을 신경 쓰고 있었다 이 말이지. 바스티안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래서?”
“저는, 그 여인이 아쉴브 영애인 줄 알았어요.”
바스티안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이건 좀 이해하기 힘든데.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지?”
“…….”
그야, 편지 보고 이상하게 반응하셨잖아요. 이블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것까지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의 사소한 반응 하나까지 주시하고 있다는 소리처럼 들릴 테니까.
“이블린.”
바스티안이 말을 아끼는 이블린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졸지에 바스티안의 코앞까지 다가가게 된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거지?”
“…….”
“무척 나쁜 습관이군. 궁금하게 만들잖아.”
“별 이유는 없었는데요.”
“이블린.”
“그냥.”
“그냥?”
“……아쉴브 영애가……미인이라서?”
대충 둘러대자 바스티안이 황당하다는 듯 가만히 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네, 진심인데요.”
“글쎄, 내 눈에는 이블린 티에르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던데.”
“…….”
아니,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러니까 또 혹시나? 하는 의구심이 싹 트는 거다. 다시 심란해지는데 바스티안의 고개가 스르르 다가왔다.
“이블린, 거울도 안 보고 사는 건 아닐 테고.”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바스티안이 속삭였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숨결이 간지럽게 입술 위를 스쳤다.
“그대도 눈이 있다면, 본인이 예쁘다는 거 알 텐데?”
“!”
좀 이상했다. 예쁘다는 말이, 이렇게 야하게 들릴 일인가? 진짜, 정말…… 나인가? 그런가? 폐하, 혹시 저를 좋아하세요? 어…… 그럼 안 되는데. 그건 곤란한데. 이블린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바스티안이 입술을 겹쳐왔다.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은 금방 사라졌다. 쪽, 일부러 살갗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게 짓궂었다.
“이블린.”
바스티안이 웃음을 꾹 참는 게 훤히 보였다.
“질투했어?”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이블린은 깨닫고 말았다. 처음 의구심이 싹 텄을 때부터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한 이유. 내가? 내가, 설마?
“!”
이블린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표정을 보아하니 대답은 들은 것 같고.”
바스티안이 당황한 이블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 눈 감아.”
“…….”
“어서, 이블린.”
이마를 맞댄 바스티안이 짧게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