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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불길한 예감 (45/95)

45. 불길한 예감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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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티안은 잠자코 기다렸다.

16550810689777.jpg“…….”

이블린이 파르르 떠는 게 맞닿은 손을 타고 느껴졌다. 유리구슬 같은 투명한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했다. 이런, 아직은 때가 아닌가. 아무래도 성급했나 보다.

16550810689777.jpg“이블린.”

바스티안이 엄지 끝으로 이블린의 볼을 쓸었다.

16550810689777.jpg“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그대는 지금 우리 계약에 충실히 임하는 것뿐이야.”

바스티안이 유혹하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16550810689777.jpg“지금부터 그대가 내게 하는 모든 행동은, 신하로서, 계약 상대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거라고.”

이렇게 핑곗거리를 얹은 면죄부를 주면, 네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바스티안이 손을 올려 이블린의 눈을 덮었다.

16550810689777.jpg“그러니까, 그만 눈감고 집중하도록 해.”

그리고 입술을 꾹 누르며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16550810689805.jpg“흡.”

이블린이 절로 가빠진 호흡을 토해냈다. 뜨거운 열기가 안으로 훅 밀려 들어온 듯했다. 시야가 강제로 가려진 탓에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심장 어딘가가 찌르르 울리는 것도 같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계약 때문이라고? 그가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준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밀어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쩌지. 나 어떡해. 침대 위를 짚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블린은 손아귀에 들어온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그 위로 따스한 온기가 덮였다. 바스티안의 손이었다. 바스티안이 열어달라는 듯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게 문질렀다. 잠깐 힘이 풀리자 사이사이로 굵은 마디가 끼어들었다.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꼭 쥐어오는 힘에 손이 얼얼했다. 입술도, 손도. 닿은 곳이 전부 뜨거워서 어지러웠다. 이러다 열기에 녹아내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입술이 떨어졌다. 시야는 여전히 가려진 채였다.

16550810689805.jpg“…….”

그가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으니 긴장이 됐다. 입술 사이로 흐르는 숨이 저절로 떨렸다.

16550810689777.jpg“슬슬, 이걸로도 부족하군.”

바스티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족하다니…… 뭐가?

16550810689777.jpg“아직 만족이 안 돼. 그래서 말인데, 이블린.”

바스티안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속삭였다.

16550810689777.jpg“조금, 더 욕심내볼까 하는데.”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욕심을 내겠다니, 대체 무엇을?

16550810689805.jpg“폐하?”

16550810689777.jpg“그러니까, 이런 거.”

이블린의 손가락을 풀어준 바스티안이 가느다란 손목을 휘감았다. 그의 손이 조금씩 위로 미끄러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피부 표면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이블린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자 눈을 가리고 있던 바스티안의 손이 떨어졌다. 아직 적응되지 않은 시야에 바스티안이 흐릿하게 보였다. 조금씩 뒤로 기울어지던 이블린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16550810689805.jpg“…….”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이블린은 기시감을 느꼈다. 몇 번이고 겪었던 상황.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스티안의 모습. 이럴 때마다 심장 한쪽이 꽉 조이면서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아찔하게 솟은 목울대, 손등이나 팔뚝에 존재감이 뚜렷한 핏줄, 미끈하게 뻗은 콧날이나 턱선. 자꾸 그런 게 눈에 띄었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휴이터를 보면서는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었는데. 어째서, 이 사람한테만. 걱정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들이 엄습해왔다. 동시에 바스티안의 손이 이블린의 허벅지에 닿았다.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잠옷 위에 앉는 열기에 이블린이 몸을 흠칫 떨던 때.

16550810715953.jpg“단장님!”

노크 소리와 함께 커다란 목소리가 벽을 뚫고 들어왔다.

16550810715958.jpg“…….”

바스티안과 이블린의 시선은 여전히 서로에게 머물러 있었다. 짙어진 공기의 밀도가 채 흩어지기도 전이었다.

16550810715953.jpg“단장님!”

16550810689805.jpg“폐하.”

다시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블린이 잠긴 목을 열었다.

16550810689777.jpg“하, 그냥 자를까.”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 쉰 바스티안이 몸을 일으켰다.

16550810689777.jpg“됐어, 내가 나가 보지.”

아직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며 이블린이 잠옷 위에 숄을 걸치려 하자 바스티안이 만류했다.

16550810689805.jpg“아, 네. 감사합니다.”

응접실로 나간 바스티안이 곧 침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16550810689777.jpg“오단, 그대는 잠도 없나.”

16550810715953.jpg“폐, 폐하.”

오단이 침을 꼴깍 삼켰다. 문을 두드리면서도 각오는 했지만, 황제가 직접 맞아주니 송구스러웠다.

16550810715953.jpg“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폐하. 급히 단장에게 전할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옷차림을 정돈하는 이블린의 손길이 빨라졌다. 잠옷 위로 커다란 숄을 걸치고 응접실로 나서자 식은땀을 흘리는 오단과 눈이 마주쳤다.

16550810715953.jpg“단장님.”

그의 눈빛이 구원자라도 맞이한 듯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16550810689805.jpg“오단, 무슨 일이죠?”

16550810715953.jpg“그.”

황제의 눈치를 보는 오단에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보고를 이어갔다. 오단의 행동을 보니, 이제는 그가 황제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믿음직한 제 오른팔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16550810715953.jpg“키르아에서 긴급 전언이 왔습니다.”

16550810689805.jpg“키르아에서?”

16550810715953.jpg“네.”

오단이 품에서 작은 봉투를 하나 꺼내 이블린에게 건넸다. 편지를 밀봉한 밀랍이 붉은색이었다. 이블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검은색은 일상적인 정기 보고, 붉은색은 특이점이 발생했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키르아에 의뢰를 맡기면서 정해놓은 규칙이었다.

16550810689805.jpg“고마워요, 오단. 확인해볼게요.”

16550810715953.jpg“네, 그럼 실례했습니다.”

오단이 허리를 꾸벅 숙인 뒤 문을 스스로 닫고 물러났다.

16550810689777.jpg“이제는 완전히 그대의 사람이 된 듯하군.”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서 있던 바스티안이 빈정댔다. 말과는 달리 그는 꽤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의 농담에 어색함이 사라졌다.

16550810689805.jpg“그래서 서운하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블린이 입꼬리를 늘였다.

16550810689777.jpg“그럴 리가.”

16550810689805.jpg“폐하의 사람이 제 사람이고, 제 사람이 폐하의 사람이고. 그런 거 아니었나요?”

이블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16550810689777.jpg“그거 상당히 달콤한 말인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이마 위로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16550810689777.jpg“그렇지, 부부 사이에는 모든 걸 공유하는 법이니까.”

마주쳐오는 회녹색 눈동자에 금방 열기가 지펴진 듯했다. 오단의 방해에 느슨해졌던 공기가 다시금 쫀쫀하게 들러붙으려 했다.

16550810689805.jpg“음, 아직, 부부는 아닌데요.”

16550810689777.jpg“…….”

16550810689805.jpg“그럼 폐하, 저는 보고 내용 좀 확인하겠습니다.”

한걸음 물러선 이블린이 몸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어쨌든, 긴급이니 빨리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다.

16550810689777.jpg“하.”

미간을 좁힌 바스티안은 미련 한 톨 없이 가버린 이블린이 우아하게 소파에 앉는 걸 지켜봤다.

16550810689777.jpg“청혼도 했는데?”

16550810689805.jpg“청혼만, 한 거죠.”

게다가 말대꾸까지. 이 변화를 반가워해야 하는 건지,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마음을 허락한 듯 흔들리던 이블린이었는데. 깨진 유리처럼 산산이 조각난 분위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역시 오단을 자를까. 괜히 화살을 오단에게 돌린 바스티안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16550810689805.jpg“먼저 주무세요, 폐하.”

16550810689777.jpg“……지금, 잠이 오겠어?”

투덜대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와 옆에 풀썩 앉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이 웃음을 삼켰다.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미소는 금방 사라졌지만.

16550810689805.jpg‘마르다가 페런 백작가로 갔다고?’

게다가 마르다가 떠난 직후 누군가가 그녀의 모친을 살해하려 했단다. 일단은 구해서 보호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6550810689805.jpg‘이게 대체?’

편지지를 무릎 위로 내린 이블린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길드에 의뢰를 넣은 것 중 하나가 마르다에 대해 조사하는 거였다. 부친이 숨겨놓은 딸. 이블린은 그들이 언젠가 가문의 수치가 되게끔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부친이 그 모녀를 끔찍이 아끼는 거라면, 그의 약점이 될 수도 있고. 그런데, 부친이 손을 쓴 방향이 의외였다. 페런 백작. 다베르에게 넘겨받은 귀족들 정보에서조차 존재감이 희미하던 이였다. 마르다의 모친을 없애려 했다는 건, 역시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고. 공작가로 데려올 거라더니, 왜?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었나? 그 여인을 버렸다는 건, 처음부터 필요한 존재가 그 아이 하나였다는 건가?

16550810689805.jpg“…….”

이블린은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부친이 계획을 변경하게 된 이유. 그 변수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가 호위기사단장이 되고, 황제의 아이를 가져 황궁으로 들어온 것.

16550810689805.jpg‘백작가로 보낸 목적이 뭐지.’

고민하면서 이블린은 편지를 차곡차곡 접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편지를 벽난로로 던지려던 이블린이 멈칫했다. 벽난로의 불이 꺼져 있었다. 바스티안이 침대를 바꾸면서 일부러 끄게끔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이블린이었다.

16550810689777.jpg“왜 그러고 서 있지?”

16550810689805.jpg“불이 꺼져 있어서요.”

16550810689777.jpg“아. 필요해?”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에 있던 편지를 가져가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입이 살짝 벌어진 이블린을 보니 쿡 웃음이 났다.

16550810689805.jpg“정말, 부러운 능력이네요.”

16550810689777.jpg“그대도 갖고 싶어?”

16550810689805.jpg“네.”

16550810689777.jpg“…….”

그래, 그대가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걱정 같은 거 안 할 텐데. 이블린이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체질만 되었어도.

16550810689777.jpg“그럼, 이제 볼 일은 다 끝난 건가?”

바스티안이 씁쓸함을 숨기며 물었다.

16550810689805.jpg“네.”

그렇긴 한데. 이대로 다시 침대로 가야 하는 건가? 뒤늦게 또 어색함이 몰려왔다.

16550810689777.jpg“잠은 안 올 것 같고, 산책이나 할까.”

그런 속내를 알아차린 듯 먼저 말을 꺼내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10689777.jpg“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도 있고.”

16550810689805.jpg“보여주고 싶은 곳이요?”

바스티안이 내민 손을 잡으니 그가 침실 밖으로 이블린을 이끌었다.

16550810689777.jpg“그래, 개인 훈련장을 준비해뒀어. 갖고 싶어 했잖아.”

16550810689805.jpg“!”

이블린의 눈이 커다래졌다.

16550810689805.jpg“오늘, 여러 번 놀라게 되네요.”

16550810689777.jpg“그래, 마음껏 감동해.”

16550810689805.jpg“감사해요, 폐하.”

16550810689777.jpg“말로만? 고마운 걸 표현할 방법은 많지 않아?”

복도를 나란히 걷던 바스티안이 걸음을 멈췄다. 바스티안이 이블린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이블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벽까지 밀려난 이블린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늦은 밤이라 희미한 조명만 남은 어두운 복도였다. 엉키는 시선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다시 몽글거리기 시작하는 분위기에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16550810689805.jpg“폐하, 여기서 이러시는 건 좀…….”

16550810689777.jpg“이블린, 내가 뭘 할 줄 알고?”

씩 웃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옆을 손으로 짚었다. 마주한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질 때였다. 쿵쿵쿵. 복도 끝에서부터 누군가 요란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이는 오단이었다.

16550810715953.jpg“다, 단장님!”

이블린과 바스티안의 존재를 인지한 오단이 급히 소리쳤다. 이블린은 황급히 손을 뻗어 바스티안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 사이, 구르듯 달려와 두 사람의 앞에 멈춰선 오단이 숨을 몰아쉬었다.

16550810689777.jpg“또 그대인가.”

16550810715953.jpg“죄송합니다, 폐하. 워낙 급한 건이라.”

아까와는 달리 오단의 얼굴이 창백했다. 불길한 예감이 이블린의 뇌리를 스쳤다.

16550810715953.jpg“근위대에서 알려왔는데, 살인 사건입니다!”

16550810689805.jpg“……뭐?”

이블린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숄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16550810715953.jpg“정확히는, 살해 시도입니다.”

오단이 급히 말을 고쳤다.

16550810689777.jpg“제대로 설명해, 오단.”

바스티안이 서늘한 얼굴로 명령했다.

16550810715953.jpg“얼마 전 체포한 하녀…….”

16550810689805.jpg“데보라? 데보라가 왜요?”

이블린의 눈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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