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죽었어야 하는데2022.03.09.
근위대 건물로 향하는 한 무리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녀장님의 부탁으로 간식을 전하려다 발견했답니다. 하녀의 몸에서 독 반응이 나타났는데, 스텔라인 것 같습니다.”
“……스텔라라면 증거 인멸이 목적이었겠군.”
휴이터가 표정을 구겼다. 시간이 지나면 시신에서 검출되지 않는 교묘한 독이었다.
“특정 시기를 노린 걸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비를 일으켜 결국 죽게 만드니까요.”
“길면 보름에서 짧으면 이틀, 그럼 잡히기 전에 이미 중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인데.”
“네, 그렇습니다. 어쨌든 해독제만 있으면 충분히 살 수 있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하녀장님이 때마침 찾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시신으로 발견됐을 겁니다.”
보고를 이어가는 근위병의 목소리가 연신 떨렸다. 하필 황제가 곁에서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었다. 아무 표정 없이 얼음 조각 같은 황제의 얼굴이 무서웠다. 황제가 당장 이 일의 책임을 묻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 근위병은 휴이터의 얼굴만 쳐다보려 애썼다.
“자결 시도일 확률은?”
“정황상, 거의 없습니다.”
건물 복도를 가로지른 무리가 잠긴 문 앞에 이르렀다. 근위병이 문고리에 걸린 자물쇠를 쥐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끼익, 음산하게 울렸다. 이블린은 근위병의 손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자주 들여다봐서 그런지 마음을 고쳐먹은 것 같아. 최근에는 확실히 조사에도 협조적이야.”
오늘 오전에만 해도 휴이터의 말을 들으며 안심했었다. 그랬는데……. 누군가 데보라를 없애려 했다. 데보라가 협조적으로 나올수록 수사의 속도가 빨라졌으니까, 불안했겠지.
“…….”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눈이 아렸다. 이블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만약, 또 아버지의 짓이라면…….’
분노가 끓어 오르니 되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 때였다.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이내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부드럽게 끌려간 이블린의 몸이 품에 안기듯 바스티안의 가슴팍에 닿았다.
“이블린. 진정해.”
바스티안이 단호한 듯, 다정하게 명령했다.
“……네.”
이블린은 제 눈을 덮은 바스티안의 손목을 붙잡고 이를 아득 물었다. 지금은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밝아진 시야로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데보라와 그 옆에 앉은 다트가 보였다.
“오셨습니까.”
먼저 와 있던 다트가 눈으로만 인사했다.
“데보라의 상태는요?”
“괜찮습니다,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블린이 침대 곁으로 빠르게 다가가며 묻자 다트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이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알아서 데보라를 챙겨 준 알리에타에게도, 독을 버티고 살아남아 준 데보라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 * *
“죄송합니다, 폐하. 제 불찰입니다.”
휴이터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의 뒤에 나란히 선 이블린과 다베르 후작도 표정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벌어진 일을 탓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바스티안이 혀를 찼다. 질책하지 않는 황제 때문에 세 사람의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폐하,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
휴이터가 침울해진 얼굴로 결심을 드러냈다. 누군가 악의와 의도를 가지고 벌인 사건이었다. 이걸 빌미 삼아 무언가 트집을 잡으려는 게 뻔했다. 근위대장으로서 황궁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막지 못했으니, 그 화살을 전부 제게 돌릴 셈이었다.
“이런, 디에스티 경.”
팔짱을 끼고 있던 바스티안이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이 일이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굴 텐데, 이대로 무책임하게 물러나겠다?”
“폐하, 그런 뜻이 아니라…….”
“다베르 후작.”
휴이터의 비장한 결심을 싹둑 잘라낸 바스티안이 몸을 바로 했다.
“기자들을 불러들여. 모든 언론사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이번 사건, 그냥 공표해.”
“네?”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다. 묻고 가도 모자랄 판에, 터뜨린다니?
“그쪽이 실패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아침 신문마다 ‘황궁 내 살인 사건 발생’이라며 떠들썩했겠지.”
바스티안은 책상 위의 신문들을 톡톡 두들겼다. 하필 이블린의 티파티가 열린 날에 벌어진 사건이다. 이블린 티에르의 존재감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거나, 혹은 황실의 무능을 주장하고 싶거나. 배후의 의도가 뚜렷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터뜨리지. 이참에 황궁 물갈이나 할까 하고.”
바스티안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대신, 기사가 나가는 건 사흘 뒤. 그전까지는 오늘 사건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관리해.”
“네, 폐하.”
다베르가 집무실을 떠나고, 바스티안의 시선이 남은 두 사람에게 향했다.
“두 사람은 지금부터 기자들에게 전달할 내용을 정리해. 여기서.”
“네, 폐하.”
바스티안이 손가락 끝을 까딱이자 이블린과 휴이터가 얌전히 소파로 향했다. 휴이터가 이블린의 옆에 나란히 앉으려 할 때였다.
“마주 보고 앉아, 붙어 앉지 말고.”
바스티안의 서늘한 한마디가 더 붙었다.
“…….”
이블린의 맞은편으로 가 앉은 휴이터가 조용히 펜을 집어 들었다.
“사건 전후 내용을 전부 밝혀. 아벤토 후작이 연루되었다는 것도. 그 하녀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도.”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바스티안이 여유롭게 내용을 읊었다. 차라리 이번 일을 계기로 말이 많아진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만 던져줘도, 언론은 알아서 귀족들의 문제점을 물어뜯을 거야.”
순간 집무실 안에 싸늘한 공기가 맴도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문지른 휴이터가 곧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블린이 밤새도록 일하느라 뻑뻑해진 눈을 누르며 침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였다.
“공녀님!”
계단 위에서 서성대던 알리에타가 이블린을 맞았다.
“……유모.”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눈 밑이 퀭한 걸 보니 알리에타 또한 내내 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유모가 걱정할까 봐 와 봤어. 유모 덕분에 살았대, 유모가 그 아이를 살린 거야, 고마워.”
언론사에 넘길 기사 내용을 작성한 뒤 데보라에게 한 번 더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다. 다트의 해독제가 잘 맞았는지 데보라의 안색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어휴, 다행이에요.”
다리에 힘이 풀린 알리에타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공녀님이 워낙 마음을 쓰시기에 티파티에서 남은 간식이라도 좀 가져다주려고 갔더니만, 갑자기 근위병들이 소리치면서 달려오고, 다짜고짜 황제궁으로 돌아가 있으라고만 하니 겁은 나고…….”
“고생했어.”
이블린이 알리에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인 뒤 부축해 일으켰다.
“전부 유모 덕분이야.”
알리에타의 푸근한 손을 꼭 부여잡고 방문 앞까지 데려다준 이블린이 알리에타를 꼭 안았다. 만약 데보라가 잘못됐더라면,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하지 못했을 거다.
“이제 마음 놓고 편히 자, 유모.”
“공녀님? 또 일하러 가시는 거예요?”
이블린의 목욕을 돕고 잠자리를 봐주려던 알리에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잠깐 훈련장에 다녀오려고.”
“네? 이 밤에요? 좀 쉬시지 않고요?”
알리에타가 말리려 했지만, 이블린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어째 표정이 안 좋으신 듯한데.”
알리에타가 걱정스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 .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 이블린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이블린은 품 안에서 꺼낸 종이를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편지였다. [매일 좋은 음식과 간식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감옥에 있는 동안 맛있는 걸 더 많이 먹었어요. 단장님께서 제 동생의 원통함을 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지요,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높은 분들은 우리 같은 존재를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동생이 겪은 일이 더 원통했고, 분했습니다. 지금은, 단장님의 약속을 믿고 있어요. 꼭 제 동생을 죽인 범인을 잡아주세요.] 데보라의 방에서 발견된 편지였다. 글을 써 본 적이 별로 없는 듯, 서툰 글씨라 더 마음에 와닿았다.
“네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서, 근위병에게 부탁했대.”
휴이터가 전해주며 덧붙인 설명에 마음이 울컥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펜 같은 날카로운 물건은 금지였다. 그러니, 감시하는 근위병 앞에서 한 자 한 자 고민하며 썼겠지. 데보라의 자색 눈동자가 지금도 선명했다. 두려움과 후회, 원망, 분노가 골고루 섞여 있던 커다란 눈망울.
‘요 며칠, 티파티 준비 때문에 신경을 못 써줬지.’
혹 부친의 방해 공작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연회장은 물론이고 사소한 물품 하나까지도 점검해야 했다. 티파티가 무사히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는 순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자신이 영애들과 웃고 떠들고 마시고 즐기던 때에 데보라는 제게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거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다시 걸음을 옮겨 훈련장에 이른 이블린이 머리를 고쳐 묶었다. 허락된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몸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온몸에서 절절 끓는 분노를 어떻게든 식히고 싶었으니까. * *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너무 무섭지 않니?”
“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 없어.”
숙소 한편에 모인 하녀들이 숙덕댔다. 전부 공작저에서 황궁으로 함께 이동한 이들이었다.
“다들 왜 그러고 있어?”
“에바, 너 어딜 다녀오는 거니?”
동료 하나가 뒤늦게 나타난 에바의 팔을 끌어당겼다.
“나 연회장 청소 담당이었잖아. 끝나고 남은 간식 좀 먹었지.”
“궁이 발칵 뒤집혔는데, 태평하게 간식 같은 소리는! 진짜 맹하다니까? 연회장도 근위대가 다녀가지 않았어?”
“안 그래도 우르르 몰려와서 막 뒤지던데. 무슨 일이야?”
에바가 눈을 끔뻑이자 하녀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이게 했다.
“왜, 얼마 전에 감옥에 갇힌 본궁 소속 하녀 말이야.”
“아, 응. 그 하녀가 왜?”
에바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숨을 죽였다.
“오늘 죽었…….”
“죽었대?”
에바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니, 죽지는 않았고, 죽을 뻔했다나 봐. 그래서 밤새 근위대랑 기사단이 황궁 곳곳을 쥐잡듯 뒤지는 거잖아.”
“…….”
죽을 뻔했다고? 그럴 리가.
“하녀는, 살았대?”
“응, 그렇다는데?”
“…….”
왜? 왜 살았지? 죽어야 하는데? 계획이 큰 차질이 생겼다. 에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