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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꽃 대신 검을 (47/95)

47. 꽃 대신 검을2022.03.13.

16550811265999.jpg“에바, 괜찮아?”

16550811265999.jpg“얘 겁먹었나 보다.”

다른 하녀들이 에바의 눈앞에다 대고 손을 흔들었다.

16550811265999.jpg“아, 응. 괜찮아. 좀 놀랐어.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된 거래?”

16550811265999.jpg“그게 하녀장님이…….”

애써 표정을 관리한 에바가 묻자 하녀들이 저마다 주워들은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았다.

16550811265999.jpg‘거기서 일이 꼬였구나.’

에바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블린과 알리에타가 감옥에 드나드는 통에 데보라를 처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데보라가 먹을 음식에 독을 섞는 것도 겨우 해냈건만 결국 실패하다니. 증거 인멸은 해뒀으니 꼬리가 잡히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공작이었다.

16550811265999.jpg‘어쩌지? 임무에 실패했으니 공작이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아, 내가 아니라 가족들이 더 문제지.’

에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데보라는 이미 보호받고 있을 테고, 근위대와 기사단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침이 되면 공작도 상황을 알게 될 거다. 그녀가 보고하기도 전에 말이다.

16550811265999.jpg‘이 일을 맡는 게 아니었는데.’

원래는 알피도 자작 상단과 거래하는 길드 소속이었던 그녀다. 그녀에게 들어온 의뢰 내용은 이블린의 눈에 들어 그녀를 곁에서 감시하는 것뿐이었다. 금액에 비해 쉬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공작이 그녀의 가족을 인질로 삼기 전까지는.

16550811265999.jpg‘이렇게 되면, 공작이 좋아할 만한 다른 미끼를 물어다 주는 수밖에.’

어쨌든 지금 공작에게 받는 돈이 크기는 했다. 자질구레한 의뢰로는 몇 년을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이었다.

16550811265999.jpg‘공녀님, 당신한테 유감은 없지만 나도 지켜야 할 게 있거든.’

하녀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침대로 돌아온 에바의 눈에 독기가 피어났다. * * * [티에르 공녀, 화려한 사교계 데뷔] [황궁의 안주인으로 자리매김하나]

16550811266042.jpg“계획이 실패한 모양이군.”

늦은 아침. 티에르 공작이 신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원래대로라면 황궁 내 살인 사건 내용으로 도배됐어야 맞았다.

16550811266042.jpg“설마, 그것이 이블린에게 붙은 건 아니겠지?”

16550811265999.jpg“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족이 저희 손에 있는 한 허튼 생각은 못 할 겁니다.”

16550811266042.jpg“쯧, 돈 때문에 일하는 천한 것이 가족이라고 아낄까. 일 처리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돈값도 못 하는 군 그래.”

마음 같아서는 내치고 싶지만, 이제와 다른 이로 대체하기도 쉽지 않을 터.

16550811266042.jpg“시도했는데 실패한 건지, 시도조차 못 한 건지 알아봐.”

16550811265999.jpg“네, 공작님. 곧 보고가 들어올 겁니다.”

혀를 끌끌 찬 공작이 사진 속 웃는 이블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에바가 입을 열지 않는 한, 그가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에바가 입을 연다고 해도, 어차피 천한 것의 말을 누가 믿을까. 아니라고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16550811266042.jpg‘지금까지 둘 다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유언장에 대해 모르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럼 성급히 움직일 필요는 없지. 최근 디에스티 공작과도 꽤 가까워졌고 말이야.’

디에스티 공작은 귀족 세계에서 입김이 가장 큰 존재였다. 그를 아군으로 만든다면 어쭙잖은 잔챙이들을 끌어들이느라 돈을 쓸 필요도 없었다. 딸 사랑이 지극한 부친 행세를 한 게 이제 와 효과를 보는 거다.

16550811266042.jpg‘그래, 아직은 이블린이 쓸모가 있어.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다 활용해야지.’

여차하면 닭의 모가지를 비트는 것보다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

16550811266042.jpg“그깟 호위기사단장 직 따위 내버려 둬도 그만이었던 것을. 크게 실수했군.”

원래도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선호하던 그였다. 유언장 문제로 조급해지는 바람에 괜히 일을 키워서 황제의 경계심만 끌어 올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황제가 이블린에게 푹 빠져 있는 동안은 섣부른 시도를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러다가 괜히 부작용만 생길 수도 있고.

16550811266042.jpg“우리 황제께서 아직 어리시구먼. 그래, 이블린이 예쁘장하기는 해.”

아직 계집을 제대로 안아본 적이 없는 풋내기니 지금은 이블린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물리는 법이다. 과연, 언제까지 이블린이 그렇게 사랑스러울까. 주변에 많은 여자가 생기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사내라는 게 그런 법이었다.

16550811266042.jpg“다음 귀족 회의가 기대되는군.”

공작이 비열하게 웃었다.

16550811266042.jpg“알피도 자작에게 황궁으로 보석과 선물을 거하게 보내라고 해, 이렇게 된 이상 좋은 아비 흉내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네 엄마를 잃고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울며불며 빌기라도 하면, 그 마음 약한 이블린은 속아 넘어갈 거다.

16550811266042.jpg‘걱정하지 말아라, 이블린. 내가 바라는 건 하찮은 네 목숨보다는 티에르라는 이름이니까.’

네가 폐하의 품에 있는 한은 봐 주마. 십몇 년을 기다려왔는데, 고작 그 시간 못 기다려줄까.

16550811265999.jpg“네, 공작님. 그런데, 마르다 양의 편지에 답신은 어떻게 할까요? 한 번 만나 뵙길 청하고 있는데요.”

16550811266042.jpg“답신은 무슨. 페런 백작에게 약점이라도 잡히라고?”

그가 아직 딸 사랑 가득한 부친을 연기하는 한, 마르다는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별거 아닌 도구에 발목 잡힐 수는 없지. 지금은 마르다에게 얌전히 사탕을 물려줄 때였다.

16550811266042.jpg“보석이든 뭐든 필요하다는 건 쥐여 줘. 대신, 다시는 이쪽으로 직접 연락하지 못하게, 알피도 상단에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고.”

16550811265999.jpg“네.”

16550811266042.jpg“참, 그 목격자 놈은 찾았나?”

16550811265999.jpg“아직 행방을 쫓는 중입니다.”

16550811266042.jpg“후, 질기기도 하군.”

몇 년 내내 도피행각이라니, 독하기 그지없었다.

16550811266042.jpg“이블린보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 물론, 이블린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도록 거짓 정보를 계속 흘리는 거 잊지 말고.”

16550811265999.jpg“네, 명심하겠습니다.”

16550811266042.jpg“진작 처리해야 했는데. 쥐새끼 같은 놈.”

공작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같은 시각. 마르다 또한 같은 신문을 보고 있었다.

16550811327799.jpg“황궁에서 티파티가 열렸다고?”

기사 내용을 본 마르다가 분통을 터트렸다. 세상에, 이블린 티에르가 사교계의 모든 귀족 영애들을 초대했단다.

16550811327799.jpg“그럼 나는?”

페런 백작가에 온 건 얼마 안 됐지만, 먼 지방도 아니니 충분히 부를 수도 있었다.

16550811327799.jpg“아버지에게 내가 백작가로 갔다는 것도 전해 들었을 텐데. 그런데도 안 불렀다는 건 일부러 빼놓았다는 거지?”

게다가 황제에게 청혼까지 받았다고! 마르다가 발을 크게 굴렀다.

16550811327799.jpg“그건 내가 받았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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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져 보면, 이블린에게 제 남편이 될 사람을 뺏긴 거였다.

16550811266042.jpg“널 황후 자리에 앉힐 생각이다. 그러니 항상 몸가짐을 조심히 해. 어디서든 입조심 하고. 알겠느냐.”

  어릴 때부터 부친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었다. 설마 이블린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상식적으로 어떤 부모가 딸 둘에게 황후로 만들어주겠다고 동시에 약속할까. 그러니까, 저를 질투한 이블린이 황제를 유혹했을 게 뻔했다. 티에르 공녀의 자리를 지키려고.

16550811327799.jpg“……내가 미웠겠지.”

제국의 꽃이라며 어릴 때부터 온 제국민이 떠받들어 주었으니, 그 사랑과 관심을 뺏기기 싫었을 거다. 어머니를 잃고 상심했을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좋은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더니, 오히려 아버지에게 혼이나 나게 만들고.

16550811327799.jpg‘좋은 자매가 될 수도 있었는데.’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건 이블린이었다. 마르다는 신문을 구기려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16550811327799.jpg“후우.”

심호흡하며 성질을 죽인 마르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16550811327799.jpg‘아버지는 내 편지를 보긴 본 거야?’

사교계 데뷔를 서두르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날 여기 처박아두고서 입 씻으려는 건가?

16550811327799.jpg‘혹시 나 말고 다른 딸이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마르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16550811327799.jpg‘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마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도 없는 딸에게 비싼 보석과 드레스를 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도 불안했다. 귀족 영애라면 사교계 데뷔를 하고도 남았을 나이였다. 이왕이면 대규모 행사에서 등장하고 싶지만, 얼마 전 황제의 생일 연회가 있었으니 당분간 큰 행사는 없을 테고.

16550811327799.jpg‘이대로는 안 돼.’

이러다 이블린에게 뒤통수 맞은 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신세가 될 거다.

16550811327799.jpg‘빨리 사교계에 데뷔해야 해.’

그래야 그녀의 것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결심한 마르다가 몸을 일으켜 백작 부부를 찾아 나섰다. * * *

16550811351129.jpg“이블린은?”

침실로 돌아온 바스티안이 알리에타에게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함께해야 할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16550811265999.jpg“훈련장에 갔습니다.”

16550811351129.jpg“훈련장? 언제?”

16550811265999.jpg“밤에 가서는 지금까지 안 돌아왔어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알리에타에 바스티안이 헛숨을 흘렸다. 일부러 쉬라고 먼저 들여보냈더니. 그때가 새벽이 찾아오기 직전이었으니, 이미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알리에타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이블린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됐다.

16550811351129.jpg“가볍게 먹을 만한 것들 좀 준비해주게.”

16550811265999.jpg“네, 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알리에타가 후다닥 달려가고, 바스티안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보나 마나 이번 일이 제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겠지. 이블린의 심리가 뻔했다. . . 잠시 후. 침실에서 이어지는 정원으로 발을 내디딘 바스티안이 손에 든 바구니를 들어 확인했다. 감히 황제의 손에 도시락을 들려 보내는 게 민망했는지, 남들이 보면 바구니라는 걸 알 수 없게끔 커다란 벨벳 천을 덧씌워놓았다.

16550811351129.jpg‘눈치가 좋아.’

선대 공작이 알리에타 만큼은 계속 공작가에 둔 이유일 거다. 다시 바구니를 내린 바스티안이 긴 다리를 성큼 움직였다. 이블린에게 선사한 개인 훈련장은 황제궁에서도 가장 깊숙이 위치했다. 얼마 걷지 않아, 높은 나무들이 거대한 장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작은 공터가 나왔다. 혼자 훈련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크기였다. 햇빛을 받은 검이 반짝이는 걸 본 바스티안은 일부러 기척을 죽인 채 다가갔다. 재킷을 벗어놓고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헤친 이블린이 훈련에 몰두한 게 보였다. 제대로 검을 다루는 이블린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16550811351129.jpg“…….”

바스티안은 나무에 기대어 서서 잠자코 이블린을 지켜봤다. 진지한 눈빛과 표정.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어쩐지 고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래 박힌 굳은살에 꽤 놀랐던 게 기억났다. 그가 곁에 없는 동안 이블린이 보냈을 시간이 저절로 그려졌다. 어린 이블린은 꽃 만지는 걸 더 좋아하던 해맑은 꼬마 아가씨였는데. 어른이 된 이블린은 꽃 대신 검을 손에 쥐었다. 만약, 그 사고가 없었더라면 여전히 꽃을 가꾸는 데 시간을 보내며 살았을까. 역시 황위에 오르자마자 티에르 공작부터 치워버릴 걸 그랬나. 그랬다면 이블린은 저를 미워했을까, 칭찬했을까. 뭐, 지금은 하등 소용없는 생각이겠지만.

16550811351129.jpg“……음?”

상념에 젖어 있던 바스티안이 뒤늦게 당황하며 몸을 바로했다. 이블린이 사라지고 없었다.

16550811351129.jpg“이브……!”

걸음을 떼려는 순간, 눈앞에 날카로운 검날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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