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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아버지의 선물 (49/95)

49. 아버지의 선물202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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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1162535.jpg“아버지께 감사의 편지라도 드려야겠어요.”

의도가 무엇이든, 준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보관해두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쓸 테고.

16550811625354.jpg“네,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1655081162535.jpg“참, 오펜 자작.”

이블린이 눈물을 쓱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알피도 자작의 의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1655081162535.jpg“그대의 차 밭을 빨리 보러 가고 싶은데, 언제가 좋겠어요?”

16550811625354.jpg“준비해둘 테니 언제든 오십시오.”

1655081162535.jpg“엘레모트 인들은 자연을 사랑하지요. 푸르른 차 밭, 상상만 해도 좋네요.”

16550811625354.jpg“저희 광산도 구경 오시지요, 단장님.”

이블린이 싱긋 웃는데 알피도 자작이 헐레벌떡 끼어들었다.

1655081162535.jpg“……광산이요?”

16550811625354.jpg“네, 보석부터 다양한 광물까지 흥미로운 게 많습니다.”

이블린이 흥미를 보이는척하며 알피도 자작을 살폈다. 그의 다급한 표정을 보니 초대에 다른 의도가 섞인 것 같지는 않았다. 오로지 오펜 자작보다 우위를 차지할 목적인 듯하고.

1655081162535.jpg“광산을 직접 본 적은 없는데, 무척 궁금하네요.”

부친의 비자금을 모아 놓은 곳으로 초대라니.

1655081162535.jpg‘내가 잘못 짚은 건가. 비자금은 그쪽이 아닌가.’

어쨌든 조사단이 돌아오면 알 수 있을 터. 이블린이 생각을 정리하던 때였다.

16550811660376.jpg“여기 있었군.”

1655081162535.jpg“폐하.”

이블린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바스티안이 앉아 있으라며 손짓했다. 이미 벌떡 일어나 있던 두 자작만이 고개를 숙인 채 예의를 갖췄다.

1655081162535.jpg“아, 아버지가 보낸 선물이에요.”

테이블 위를 훑는 바스티안의 시선에 이블린이 설명을 덧붙였다.

16550811660376.jpg“……그래?”

바스티안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16550811660376.jpg“그런데, 그대에게 어울리는 색이 없군. 물론 뭐든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1655081162535.jpg“폐하, 그보다…….”

이블린이 제 옆에 앉는 바스티안에게 바싹 붙었다.

1655081162535.jpg“알피도 상단의 보석 광산에 초대를 받았어요.”

16550811660376.jpg“광산? 안 돼, 위험해.”

바스티안이 딱 잘라 반대하자 알피도 자작의 얼굴이 하얘졌다.

1655081162535.jpg“폐하, 전 가보고 싶은데요.”

속으로 세 번 비명을 지르며 각오한 이블린이 앙탈을 부리듯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바스티안은 웃음을 참느라 애썼고, 오펜 자작의 표정은 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16550811660376.jpg“안 된다면 안 돼, 이브.”

1655081162535.jpg“그럼 폐하, 여기 있는 보석이 별로라면, 제게 무슨 색이 잘 어울리는데요?”

16550811660376.jpg“음, 그대의 눈동자를 닮은 색?”

1655081162535.jpg“거기에 가면 많이 있지 않을까요?”

16550811660376.jpg“굳이 갈 필요가? 그냥 여기로 가져오라고 하면 돼.”

1655081162535.jpg“너무하세요, 배 무거워지면 못 간단 말이에요.”

열심히 설득하는 데도 바스티안이 강경하게 나오자 이블린이 토라진 척 몸을 떼어냈다. 이블린이 귓불을 붉힌 채 애쓰는 게 귀여워서 더 버티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화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16550811660376.jpg“하, 내가 그대를 어떻게 이기겠어.”

1655081162535.jpg“폐하!”

바스티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락하자 이블린이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오펜 자작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감았고, 알피도 자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655081162535.jpg“참, 자작. 광산에 가려는 건,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줬으면 해요.”

16550811625354.jpg“네?”

1655081162535.jpg“제 걱정이 많으신 분이잖아요, 분명 홑몸도 아닌데 그곳까지 간 걸 아시면 크게 화를 내실 거예요.”

알피도 자작을 시험하려고 꺼낸 말이었다. 그는 과연 부친과 저, 어느 쪽을 우선시할까.

16550811660376.jpg“그러고 보니 슬슬 결혼식 준비도 시작해야겠군.”

바스티안이 잊고 있었다는 듯, 한마디를 흘렸다. 결혼식. 눈을 느리게 깜빡인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바스티안은 긴 다리를 꼬아 비스듬히 앉은 채 두 자작을 응시하고 있었다.

16550811660376.jpg“이번 티파티 때 그대의 공이 컸지, 오펜 자작.”

16550811625354.jpg“송구합니다, 폐하.”

지켜보는 알피도 자작의 눈이 탐욕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황궁에서 열린 티파티의 물품 전부를 오펜 상단이 전담했다는 소식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게다가 청혼을 받은 공녀가 크게 기뻐하는 바람에, 황제가 무척이나 만족했단다. 덕분에 오펜 자작은 몇 년 동안 벌어들여야 하는 수익을 한 번에 포상으로 받았고.

16550811625354.jpg‘내가 맡았어야 했어. 화려하고 웅장한 건 내 전문인데, 이런 촌스러운 자식이 뭘 안다고. 결혼식만큼은 내가 맡아야 해.’

황제의 결혼식이라니! 티파티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였다.

16550811660376.jpg“아. 둘 다 결혼식 이야기는 함구하게, 황궁에서 일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하는 건 기본인 건 알 테고.”

바스티안이 알피도 자작을 힐끔 보며 경고했다. 이블린이 그를 시험하는 걸 도와주려는 거였다.

16550811660376.jpg“알피도 자작이라 했나.”

16550811625354.jpg“네, 폐하.”

16550811660376.jpg“이블린의 눈동자와 꼭 닮은 색의 보석을 구해 오면, 후하게 쳐주지.”

16550811625354.jpg“……! 네, 폐하!”

알피도 자작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슬슬 공작보다 더 큰 어장으로 갈아탈 때가 온 듯했다. . .

1655081162535.jpg‘결혼식이라. 역시 하게 되려나?’

두 자작이 떠나고 난 뒤 이블린은 짧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계약이긴 했지만, 바스티안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거라며 확언하지는 않았다.

1655081162535.jpg‘결혼하면 황후……가 되는 건데.’

황후라니, 그렇게 큰 자리에, 내가?

16550811660376.jpg“난 그대에게 상당히 위험한 제안을 하고 있는 거야.”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라던 바스티안의 경고가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렇지만, 황후가 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혼 후에 여러 편의를 제공받기도 하고. 결혼까지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오히려 이혼하는 건 쉬운 편이고 흠이 되지도 않는다. 만에 하나지만, 정말 바스티안과의 사이에서 아이라도 몇 명 생긴다면, 후계 문제도 해결되니 또다시 다른 남자와 결혼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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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장만 생각하면 그렇다지만, 바스티안에게도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제국의 황제니까.

1655081162535.jpg‘폐하는 그래도 괜찮으신 건가?’

알피도 자작에게 먹잇감을 던지려고 일부러 흘린 말이라는 건 알지만, 그의 속내가 궁금하긴 했다. 이블린이 슬쩍 바스티안을 곁눈질로 살피려 할 때.

16550811660376.jpg“이블린.”

바스티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1655081162535.jpg“네.”

꼭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움찔한 이블린이 표정을 수습했다.

16550811660376.jpg“오늘 연기는 제법, 그럴듯했어.”

바스티안이 씩 웃으며 칭찬을 해왔다.

1655081162535.jpg“…….”

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가실 리가 없지. 이렇게 놀리실 줄 알았지.

1655081162535.jpg“폐하.”

이블린이 하지 말라는 듯 점잖게 부르자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귓불을 만지작댔다.

16550811660376.jpg“음, 아직도 너무 붉은데. 다트라도 부를까? 어디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1655081162535.jpg“……그만 하세요, 폐하.”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또 놀리시기나 하고. 하여간 요즘의 바스티안은 도통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16550811660376.jpg“너무 붉어서 뭐가 묻었나 했지. 그나저나, 보석 품질이 꽤 쓸만하군.”

갖가지 종류의 보석은 제국의 풍부한 자원 중 하나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보석들을 훑은 바스티안이 작은 머리 장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블린의 머리에 꽂혀 있던 장식을 빼낸 바스티안이 같은 자리에 장식을 꽂아 넣었다. 덕분에 휴이터에게 선물 받았던 장식이 이블린의 손 위로 돌아왔다.

16550811660376.jpg“잘 어울리네. 공작한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옅은 보라색 보석을 꽃 모양으로 세공한 장식이 금발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1655081162535.jpg“그러게요, 아버지께 선물을 다 받아 보네요.”

바스티안이 빙긋 웃으며 말끝을 늘이자 이블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16550811660376.jpg“기뻐해, 이블린. 공작이 자꾸 일을 벌인다는 건, 일이 그대의 계획대로 잘 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당분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려는 거겠지. 뒤에서 또 무언가를 준비하겠지만.”

1655081162535.jpg“……제 부친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아요.”

16550811660376.jpg“꽤 단순한 사람이니까?”

바스티안이 낮게 웃었다.

16550811660376.jpg“마음 가득한 야망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게 가상하지만, 조금 어설픈 구석이 있어. 그대에게 본색을 드러낸 것만 해도 그렇지.”

공작이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제 야망을 이블린에게 끝까지 숨겼어야 했다. 이블린을 우습게 본 게 그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1655081162535.jpg“어쩐지 엄청난 평가네요.”

입을 어름거리던 이블린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럼 나는 왜 곁에 두셨을까.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데, 아버지와 나를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건가? 이젠 바스티안이 잘해주는 게 연기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조금은 그 안에 담긴 진심이 보였다. 그러니 바스티안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어쩐지 상상만으로 마음이 먹먹해졌다.

16550811660376.jpg“이블린,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입꼬리를 끌어올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눈가를 쓸었다.

1655081162535.jpg“……아무것도 아니에요.”

망설이던 이블린이 조심스레 바스티안의 손목을 쥐었다. . .

16550811625354.jpg“그럼 단장님, 저는 무엇을 준비해두면 되겠습니까?”

알피도 자작이 황궁을 떠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돌아온 오펜 자작이 본론을 꺼냈다. 차 밭이 목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 진짜 필요한 게 무언지 묻는 거였다.

1655081162535.jpg“저는 며칠간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거예요. 물론 저는 거기 없겠지만요. 가능하겠나요?”

한마디로 모든 이의 눈을 속이겠다는 거였다.

16550811625354.jpg“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워낙 외진 곳이고, 외부인의 출입도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1655081162535.jpg“다행이네요.”

이블린이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한 몸으로 연극까지 벌이며 어딜 가려는 건지 묻지 않는 자작의 신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바스티안도 신뢰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맡기는 걸 테고. 바스티안이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녀 또한 오펜 자작을 신뢰하기로 했다. 새삼, 바스티안을 꽤 믿고 의지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1655081162535.jpg“출발 날짜는 사흘 뒤에요. 맞춰서 준비해주면 고맙겠어요.”

16550811625354.jpg“네, 염려 마십시오.”

바스티안과 같이 수해 지역을 둘러본 뒤, 조용히 목격자를 만나고 올 생각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도 없고, 특히 부친의 귀에 들어가는 건 더욱 곤란했다.

1655081162535.jpg“인원을 나눠서 수해 지역에서 차 밭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행렬을…….”

이블린이 자작과 세부사항을 논의하려던 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바스티안이 문득 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1655081162535.jpg“……폐하?”

이블린이 쳐다보자 바스티안이 계속 대화를 나누라며 눈짓했다.

16550811625354.jpg“그, 올해는 찻잎이 이르게 올라와서 보기에 더 좋으실 겁니다.”

오펜 자작이 눈치껏 아무 이야기를 떠들었고, 이블린 또한 창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창밖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숨어 있는 듯했다. 바스티안이 조용히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검을 스르륵 빼낸 바스티안이 창문을 휙 열었다.

16550811625354.jpg“으악!”

황제와 눈이 마주친 에바가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1655081162535.jpg“에바?”

16550811625354.jpg“아앗, 공녀님.”

어리숙한 미소를 흘린 에바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1655081162535.jpg“에바, 네가 여기는 왜…….”

이블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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