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인간 수면제2022.03.23.
이블린이 창틀을 짚었다. 타이밍도 그렇고, 조금 난감한 방문이었다. 출입이 금지된 곳은 아니지만, 창문 앞으로 정원 수풀이 있어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은 아니었다.
“공녀님께서 여기에 계시다고 해서 잠깐 와 봤어요. 데이지 꽃이 예쁘게 피었길래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예전부터 좋아하셨잖아요.”
에바가 앞치마 주머니에 있던 꽃을 꺼내 이블린에게 건넸다. 넘어지면서 떨어트렸는지 바닥에도 꽃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고마워.”
소담한 꽃을 받아든 이블린이 따스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바스티안이 검에서 손을 떼어내고 팔짱을 꼈다.
“그런데, 혼자니?”
꽃의 향기를 맡은 이블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늘 다른 하녀와 둘이 다니게끔 했는데.
“아,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에바, 혼자 다니면 안 돼.”
“네, 공…… 단장님.”
바스티안이 있는 쪽을 힐끔 본 에바가 금방 호칭을 고쳤다.
“저어, 그럼 가볼게요.”
“그래, 수고하렴.”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사라지는 에바를 보던 이블린이 곧 창문을 닫았다.
“앞으로는, 더 안전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어요.”
이블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 번 날을 잡아 공작가에서 데려온 아이들을 따로 불러 황궁 예법을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이블린, 의심하고 또 의심해.”
바스티안이 했던 충고도 있고…….
‘가족관계나 주변 상황을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
공작가 식솔들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필요한 변화였다. 다시는, 데보라 같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이가 없어야 했다.
“폐하, 황궁을 떠나는 시기를 앞당기면 어떨까요.”
잠시 고민하던 이블린이 의견을 냈다.
“그러지, 어차피 조용히 움직이려던 차였으니.”
바스티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블린의 볼을 쓸어내렸다. * * *
“공녀님, 제가 아무래도 같이 가는 게…….”
알리에타가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이블린의 머리칼을 정돈하면서 운을 띄웠다. 황궁 밖으로 시찰을 나간다는 통보가 너무 갑작스러웠다.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라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일 거야. 그리고 유모가 황궁에 남아 있어야 나도 안심이 돼.”
“그렇지만…….”
“휴이터가 황궁에서 상시 대기하기로 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휴이에게 알려.”
게다가 내일 오전이면 데보라 사건으로 휴이터가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었다. 황궁 또한 여러모로 바쁠 터.
“어휴, 일이 손에 잡힐까 모르겠어요.”
“난 폐하랑 같이 움직이잖아. 솔직히 유모가 더 걱정이야.”
“정말 눈물 없이는 못 보겠군.”
“폐, 폐하.”
빗을 집으려던 알리에타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이토록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던 터라 여유를 부리고 말았다.
“됐어, 매번 그렇게 움직일 건가. 그러다 허리라도 다치면 그대의 보물이 울지도 모르는데.”
“송구합니다, 폐하.”
바스티안의 농담에 알리에타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걱정 마, 그대의 소중한 아가씨는 내가 극진히 모실 테니.”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인사한 알리에타가 이블린에게도 잘 자라고 인사한 뒤 침실을 벗어났다. 알리에타가 떠난 자리에 풀썩 앉은 바스티안이 빗을 집어 들었다.
“폐하?”
머리칼을 조심스레 쥐는 손길에 이블린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가만히 있어.”
바스티안이 천천히 머리칼을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능숙한 알리에타와 달리 조금 어설픈 손길이 더 그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폐하, 이리 주세요. 폐하께서 이런 것까지 하시는 건 좀.”
이블린이 손을 뒤로 뻗으며 만류했다.
“괜찮아, 해 본 적 있으니까.”
“……네?”
얼마 전, 주방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
“머리를 묶어 달라고 매번 조르던 이가 있었거든.”
“…….”
“감히, 내게 말이야.”
저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블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유일무이한 존재였지.”
투덜대며 낮게 웃는 목소리에 따뜻한 애정이 묻어났다. 뭔가 묘한 그리움이 섞여 있는 것도 같고. 직접 머리를 묶어 줬다니, 대체 누구였기에? 어쨌든 상상하기 쉬운 장면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녀의 머리를 만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내가 처음은 아니라는 거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폐하. 저는 머리를 묶어 달라고 청을 드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왜인지 모르게 툴툴대듯이 말이 나왔다.
“그래? 그거 아쉽네. 직접 해주고 싶었는데.”
빨개진 이블린의 목덜미를 보며 바스티안이 웃었다. 혹 질투려나. 만약 본인이라는 걸 알면 뭐라고 할까.
‘그냥 가만히 있을걸.’
바스티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블린은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그 사이 바스티안이 몇 번 더 부드럽게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이블린.”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살짝 쥐었다 놓은 바스티안이 빗을 옆으로 내려놓고는 이블린의 양어깨를 감싸듯 쥐었다.
“그대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다 해줄 수도 있어. 얼굴도 씻겨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밥도 먹여주지.”
“폐하.”
“그대가 원한다면, 목욕 시중도 들어줄게.”
“아, 정말!”
귓가에 대고 장난스레 속삭이는 말에 이블린이 뿌리치듯 휙 고개를 돌렸다.
“좀 적당히……!”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바스티안에 하마터면 코끝이 부딪칠뻔했다. 깜짝 놀란 이블린이 숨을 참는 사이, 아슬아슬한 틈을 남기고 피한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황궁을 나가 있는 동안은, 어쨌든 내 몫이 되지 않겠어?”
“아니거든요. 폐하, 지나친 농담은 좀 자제해 주시겠어요?”
연녹색 눈동자가 정색하더니 딱딱하게 쏘아붙였다.
“지나치다니? 대체 어느 부분이?”
“그, 목…….”
목욕 시중이라는 단어는 차마 입 밖으로 내기에도 민망했다.
“부끄러워하기는. 뭐 어때, 우리 사이에.”
이블린이 말하기를 포기하자 바스티안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글쎄요, 저희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겠는데요.”
“음, 한 침대를 쓰는 사이?”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어깨 위에 있던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대로 이블린의 팔을 잡은 바스티안이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이 정도는 가능한 사이기도 하지.”
“…….”
가느다랗게 접힌 눈꼬리가 퍽 야살스러웠다. 와, 정말. 대체 왜 저렇게 웃으시는 거람?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저 얼굴에 홀리고 만 게 분명했다.
“자, 이블린. 화는 그만 내고.”
이블린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노려보기만 하자, 바스티안이 태연하게 웃으며 이블린을 일으켰다.
“위에 뭐라도 걸쳐.”
“……어디 가시려고요?”
“다트가 올 거야. 내일 떠나기 전에 몸 상태는 확인해야지.”
“또요? 어차피 같이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잊었어? 하루 세 번 다트에게 진료받는 건 필수야.”
“최근에는 한 번으로 줄었는…….”
“그건 그대가 그대의 몸을 혹사하기 전의 이야기였지.”
내내 장난만 치다가 이럴 때는 위엄 있는 상사로 구니, 감히 대들 수도 없었다.
“폐하, 솔직히 너무 과보호라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이것도 많이 참는 거야.”
적당히 말을 골라 꺼냈지만, 오히려 아무 말 말라는 듯 돌아오는 답이 단호했다. 그러면서도 어깨 위에 숄을 걸쳐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이렇게까지 그녀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알리에타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쩌면 알리에타보다 더한 것 같기도 하고. 이블린은 볼만 붉힌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요즘 식사를 잘 챙겨 드시는가 보군요.”
혈색이 화사하게 도는 이블린의 얼굴을 보며 다트가 뿌듯하게 웃었다.
“어지간히 황궁 밖으로 나가고 싶었나 봐. 무척 잘 먹더라고.”
바스티안이 짓궂게 지적하자 이블린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잘하셨습니다. 끼니는 거르지 마세요, 단장님. 안 그러면 폐하께서 저를 닦달하시니까요.”
“이블린. 내가 이렇게 그대에게 관심이 많아.”
“…….”
그, 다트 앞에서까지 이러실 필요가……. 이블린이 그만하라는 듯 눈으로 쳐다보자 다트가 눈치껏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수고했어.”
“참, 폐하. 혹시 침실에 둔 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바스티안의 불면증을 도우려 가져다 놓은 약재를 말하는 거였다.
“괜찮아. 지금은 인간 수면제가 옆에 있어서.”
바스티안이 고갯짓으로 이블린을 가리키자 다트가 껄껄 웃었다.
“다행입니다. 일부러 차로 만들기는 했지만, 많이 복용하면 내성이 생기니까요. 내일 출발할 때 뵙지요. 편안하게 쉬십시오.”
다트가 짐을 챙겨 떠나고 난 후.
“폐하, 잠을 잘 못 주무신다고요.”
이블린은 내내 궁금했던 걸 조심스레 물었다. 전에 보레아에게서 들은 것도 있으니 걱정스러웠다.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글쎄, 그대가 공작저에 있을 때 잠 못 이루던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
동그래진 이블린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하녀장에게 들으셨군요.”
유모, 이렇게 날 배신하다니! 바스티안은 생각보다 그녀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듯했다.
“개인적으로, 하녀장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어. 그대의 일에 있어서라면, 용기도 두둑하고 말이야.”
바스티안이 짓궂게 웃었다.
“그대에게 내 기사단을 넘겼으니, 나도 이점은 하나 있어야지.”
“어쨌든, 지금은 잠을 잘 주무시는 거죠?”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
“그대가 있어서 내 밤이 편안해졌으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괜히 술렁이는 기분이었다.
“그만 자는 게 좋겠어요, 폐하.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이블린은 숄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다른 손을 내밀었다. 바스티안은 제 앞으로 다가온 하얀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블린이 먼저 손을 내민 건 처음이었다. 늘 그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붙잡아야 했던 손이었는데. 회녹색 눈동자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바스티안이 작은 손을 감싸듯 쥐었다. * * * 다음 날 아침. 먼저 잠에서 깬 바스티안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눈을 떴다. 작은 손이 야무지게도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늘 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빼내려고 하더니만. 이러니까,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지. 가만히 이블린의 얼굴을 쳐다보던 바스티안이 다른 손으로 이블린의 입꼬리를 슬쩍 건드렸다. 움찔하면서도 이블린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같은 침대를 쓰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면서, 낯설고 불편한지 한동안은 매일 밤 뒤척이던 그녀였다. 이제는 그 옆에서 익숙한 듯 잠만 잘 잔다.
‘날 옆에 두고도, 잠이 와?’
좋아해야 하는 건지, 서운해야 하는 건지.
“일어나, 이블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깨가 흠칫 떨리더니 이블린의 눈꺼풀이 열리고 연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증거 수집하러 가야지.”
무해하던 얼굴에 금방 결연한 표정이 피어나는 걸 본 바스티안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옆에 두고 함께 누워만 있으면 좋을 텐데. 바스티안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겨우 다시 붙잡게 된 손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