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굳이 번거롭게2022.03.27.
“비상식량은 어디 있지?”
“이미 기사단에서 챙겨갔습니다!”
“아, 그래, 그럼 또 뭐가 있더라…….”
부산스러운 아침이었다. 황제궁 주인의 갑작스러운 외출이라는 날벼락이 떨어진 탓이었다.
“하녀장님, 하녀장님도 가세요?”
“에바,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네 일이 따로 있을 텐데?”
여기저기 정신없이 지시를 내리던 알리에타가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바빠 죽겠는데 옆에서 종알대는 에바가 슬슬 거슬렸다.
“아니, 저는, 공녀님이 혼자 가신다니까 걱정돼서…….”
“금방 다녀오실 거다. 이미 현지에서 공녀님을 모실 이들을 고용해 둔 상태고.”
“네? 하녀장님! 어떻게 공녀님을 낯선 이들 손에 맡겨요!”
“에바! 너 때문에 더 정신이 없구나!”
알리에타가 이제 그만하라는 듯 매섭게 눈을 뜨자 에바가 꼬리를 말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아니, 무슨.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움직이냐고.’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이 없더니 아침이 되자마자 황제궁이 뒤집혔다. 꼭 일부러 몰래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설마 내가 엿듣는 걸 들켜서?’
아닐 거다. 이블린이 저를 의심할 리 없으니까. 게다가 바로 들키는 바람에 주워들은 것도 없었다.
‘얼른 움직여야겠어.’
한시가 시급했다. 에바가 황급히 몸을 돌릴 때였다.
“에바!”
“……네?”
커다란 외침이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아, 왜 또. 뭐를 시키려고! 에바가 어리숙한 척 어깨를 움츠리며 알리에타를 바라봤다.
“어딜 가는 거지?”
“이, 일하러요?”
“날 따라오거라.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저요?”
“어허, 어서 오지 않고!”
에바가 주춤대자 알리에타가 근엄하게 혀를 찼다.
‘아, 안 돼.’
에바는 울상이 됐다. 어서 공작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데보라의 사건 이후, 황궁 내의 경비가 삼엄해져서 약속했던 비밀 장소까지 가기가 어려웠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데.’
에바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녀장님, 저 혹시 휴가를 쓸 수 있을까요?”
“…….”
걸음을 우뚝 멈춘 알리에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 될……까요?”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에바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폐하께서 떠나시고 나면, 기자회견이 있을 거다.”
잠시 침묵하던 알리에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기자회견?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에바가 눈을 끔뻑이는데 알리에타가 말을 이었다.
“기자회견과 동시에 황궁이 봉쇄될 거다. 그동안 허가받지 않은 이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고, 황궁으로 들어오는 외부인들도 엄격한 통제하에 관리될 거다.”
“…….”
“그러니 당분간 네 휴가는 어렵겠구나. 따라오렴.”
말을 마친 알리에타가 휙 몸을 돌렸다. . .
“공녀님,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아셨죠?”
“걱정 마.”
알리에타가 마차에 오른 이블린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공작저에 있을 때도 종종 혼자서 저택 밖을 빠져나가던 이블린이지만, 짧아야 반나절이고 길어야 한나절이었다.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며칠을 보내야 한다니, 솔직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게 왜 가짜 임산부 흉내 같은 걸 내셔서는!
“물 같은 거 함부로 드시지 마시고, 음식 조심하시고…….”
“알리에타, 그만.”
“어휴.”
보는 눈이 많았다. 이블린이 그만하라며 눈치를 주자 알리에타가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유모,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잘 부탁해.”
황궁 내에 특이점은 없는지 잘 살피라는 거였다. 온전하게 믿는 알리에타가 아니라면 맡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블린의 마음을 알기에 알리에타도 걱정을 뒤로 미뤄두고 황궁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공녀님. 안 그래도 공녀님이 말씀하신 대로였어요.”
주변을 살핀 알리에타가 이블린에게 속삭였다.
“에바가 휴가를 달라고 말하더군요.”
“…….”
이블린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스쳤다.
“공녀님.”
“……그 아이의 가족, 친구, 연인…… 혹 금전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무엇이든 좋으니 주변 상황을 알아봐.”
“네.”
“무슨 일이 생기면 휴이와 의논해, 절대 혼자 행동하지 말고.”
“그럴게요. 잘 다녀오세요, 제 소중한 공녀님.”
알리에타가 이블린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아주었다.
“출발하지.”
이블린의 마차 문이 안전하게 닫히는 걸 확인한 바스티안이 고개를 까딱한 뒤 망토 후드를 썼다.
“출발!”
신호를 확인한 오단이 손을 크게 휘두르자, 대열을 갖춘 호위기사단이 황궁 정문을 벗어났다. 바스티안과 지휘관들이 행렬의 맨 앞에 자리하고, 기사단원들이 겹겹이 둘러싼 이블린의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황제의 행렬이라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없도록 모두가 새까만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채였다. 마차 안에 혼자 앉은 이블린이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 한나절은 쉼 없이 달리게 될 터. 내부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일부러 일정을 앞당겨 출발한 거였다. 누군가 따라붙기 전에 빠르게 거리를 벌려 시간을 벌 셈이었다.
‘내가 말을 타면 더 빨랐을 텐데.’
정작 그녀가 계획의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지만. 이블린이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불편한 마음과는 달리 마차의 탑승감은 지나치게 좋았다. 바스티안의 명령으로 쿠션을 과하다 싶을 만큼 두껍게 깔아놓은 덕분이었다.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지.’
마차를 선물 받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픽 웃은 이블린은 문득 창문 너머로 휘날리는 금빛 갈기를 발견했다. 기사단원 하나가 등이 빈 말의 고삐를 함께 몰아 데려가고 있었다. 바스티안이 그녀에게 선물한 말이었다. 선물 받은 후에도 한 번도 타보지 못했는데.
“여기서부터 데려가게 하시다니…….”
굳이 번거롭게. 그의 과한 처사가 민망했지만, 왜인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 . 몇 시간 후. 빠른 속도로 달린 일행은 새티나 숲 입구에서야 멈춰 섰다.
“단장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요. 예상보다 더 일찍 도착했네요.”
배를 감싼 이블린이 안부를 묻는 오단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황궁에서 매일같이 연기하다 보니 임산부 흉내를 내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고생했어, 이블린.”
다베르 후작과 대화를 나누던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다가왔다.
“아직 따라붙은 이는 없으니, 계획대로 여기서 찢어지도록 하지. 이블린, 그대는 그대의 말과 인사 좀 나누고.”
“네, 폐하.”
오단이 이블린의 말을 데리러 가고, 이블린은 바스티안을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뭐 할 말이라도?”
눈치챈 바스티안이 고개를 내렸다.
“폐하, 역시 폐하께서 저와 함께 움직이시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듣는 귀가 없는 걸 확인한 이블린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바스티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단이 기사단 일행을 데리고 오펜 자작의 차 밭으로 향하는 사이, 이블린은 마차 사고의 목격자를 만나고 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바스티안은 그녀와 동행하기를 원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넣어 둬, 이블린. 그대와 다트, 둘만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볼을 양손으로 꾹 누르며 경고했다.
“기사단을 딸려 보내면 눈에 띌 테고. 이게 가장 좋은 선택이야. 그러니 아무 말 마.”
쭉 밀려 나온 입술이 뻐끔대는 걸 본 바스티안이 쿡쿡 웃으며 놓아준 뒤 멀어졌다. 볼을 매만지며 그 뒷모습을 불퉁하게 보고 있자니 오단이 다가왔다.
“단장님.”
“오단. 폐하께서 고집을 꺾지 않으시네요.”
이블린의 목적지는 기사단 내에서도 상급자들만 아는 기밀이었다.
“원래 기사단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거 안 좋아하십니다.”
이블린의 말을 가져온 오단이 알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폐하께서 단장님과 움직이시는 게 더 안심입니다. 단장님 때문에라도 위험한 일은 안 하시겠지요. 궁의도 데려간다고 하시고.”
뭐, 자연과 공명하는 폐하께 감히 해가 되는 일이라도 있겠습니까? 오단이 머리 뒤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어쨌든 오펜 자작의 차 밭에서 반나절 정도 머무른 뒤 출발하겠습니다. 루체이에서 뵙지요, 단장님.”
“그래요, 모두 조심해요, 오단.”
“네, 모쪼록 일을 잘 해결하고 오십시오.”
말고삐를 건네준 오단이 씩씩하게 경례하고 사라졌다. . .
“아이고, 폐하. 꼭 이런 길로 가야 합니까?”
생각보다 험준한 산길에 다트가 허리를 두들기며 우는 시늉을 했다.
“그대 또한 같은 배를 탔으니 어쩔 수 없지.”
다트를 데려온 게 임산부인 이블린을 걱정한다는 핑계만은 아니었다. 이 짧은 여행길에 이블린의 몸에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니까.
“글쎄, 제가 원해서 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만이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미안해요, 다트. 제가 사과할게요.”
두 사람의 대화에 이블린이 미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다트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바스티안에게 끌려온 거니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단장님이 왜 사과하십니까.”
“그냥 조용히 가도록 해, 다트. 이 숲만 넘으면 평야가 나올 거야.”
“네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바스티안의 예고는 금방 현실이 됐다. 숲을 벗어나자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와.”
이블린이 감탄을 터트렸다. 마음이 절로 시원해지는 풍경이었다. 주인의 흥분을 느꼈는지 이블린의 말이 푸르릉 콧김을 뿜었다.
“승마를 즐기기에 제격이지. 누군가를 마주칠 위험도 없고.”
“폐하, 속도를 내도 될까요?”
“말을 타는 건 오랜만이니까 무리하지는 마.”
“네.”
내내 발을 구르던 이블린의 말이 잽싸게 튀어 나갔다.
“……급하기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이블린을 보며 바스티안이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하나로 묶은 이블린의 머리칼이 말 꼬랑지와 함께 흔들렸다.
“어휴, 저렇게 좋아하다니. 보는 제가 다 기쁘네요.”
이블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바스티안을 힐끗 본 다트가 감상을 전했다. 조금 전 투덜거린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저 모습을 보려고 바스티안이 이런 길을 택했구나 싶었다.
“심각한 얼굴로 가는 것보다야 보기 좋잖아.”
즐거운 일을 기대하고 가는 것도 아닐 텐데. 바스티안의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잠시 이블린을 물끄러미 보던 때였다.
“역시 그때 폐하께서 단장님을 살리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저 모습도 볼 수 없었겠지요.”
불쑥 입을 연 다트가 바스티안을 조심스레 훔쳐봤다.
“공녀님께는 과거를 계속 숨기실 겁니까?”
“…….”
바스티안은 오늘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이렇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나.’
아니, 기억을 잃었으니 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늘 의아했지만, 황제는 함구할 뿐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사고가 난 직후에 불려가 다친 공녀를 치료했고, 함구령을 지시받았다. 혹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폐하, 그날 사고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고민하던 다트는 내내 궁금했던 걸 결국 묻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