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지나치게 진득한데2022.03.30.
“아무 일도.”
잠깐의 침묵 끝에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다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도 황제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바스티안의 눈은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블린에게 말해줄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가 티에르의 이름을 지키고 싶어 하니까. 바스티안은 햇빛에 반짝이는 이블린의 금발 머리를 보며 똑같은 금발을 가진 사내를 떠올렸다. * * *
“뭐야? 이블린이 궁을 떠나? 어디로, 어디로 간 거지?”
“황제 폐하와 함께 수해 지역 시찰을 나가는 거랍니다.”
“아, 난 또 뭐라고.”
긴장이 풀린 공작이 풀썩 앉았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붙일까요?”
“당연한 걸 뭘 묻나. 임신한 몸이라면서 잘도 쏘다니는군. 아팠다는 게 진짜 꾀병이긴 했나 봐?”
눈을 흘긴 공작이 투덜댔다.
“그 목격자 놈은 찾았고?”
“꼬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흔적이 발견된 곳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답니다.”
“빨리 찾아서 없애라고 해. 화근은 살려두면 안 돼.”
“네, 공작님. 그보다, 황궁에서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아침에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사건을 전부 공개하고, 궁을 폐쇄한다고 했답니다.”
“……그래? 증거는 남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하녀를 죽이려다 실패했으니, 예상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공작은 뒤늦게 입이 텁텁해졌다. 이블린이 마차 사고에 대해 의심하게끔 두지 말 것을. 마르다의 편지를 봤다는 말에도 끝까지 발뺌하며 부정할 것을. 선대 공작과 리본느는 죽어 버렸으니 어린 이블린이 뭘 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지어 버렸다. 지금 보니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이블린이 뭘 할 때마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영 피곤하고 거슬렸다. 마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칼리아노 티에르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며 크나큰 실책이었다.
“제기랄, 알피도 자작에게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티에르 공작은 부쩍 피곤해진 기분에 눈을 꾹꾹 눌렀다.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려서 그런 걸까. 자꾸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 * *
“으으.”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블린은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무너져내리듯 허리를 굽혔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곁을 스쳐 가며 핀잔했다.
“아무리 그대가 체력 훈련을 꾸준히 했더라도, 말을 타는 건 별개야.”
저도 알아요, 폐하. 무척 잘 알고 있거든요. 이블린이 입술만 꾹 깨물며 속으로 반박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장시간 동안 말을 탄 건 오랜만이라,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이 놀란 모양이었다. 신이 나서 잠깐 욕심을 부린다는 게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망토와 외투를 벗고 침대에 앉은 바스티안이 엉거주춤 선 이블린을 보고 혀를 찼다.
“이리와.”
바스티안이 제 옆을 툭툭 쳤다.
“이럴 줄 알고 다트에게 미리 약을 받아놨으니까.”
“……감사합니다.”
이블린이 어기적대며 바스티안에게 다가갔다. 바스티안에게 행동을 다 읽히는 것 같아 민망했다. 이블린이 약을 받으려고 손을 뻗을 때였다.
“벗어, 이블린.”
“……네?”
이블린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벗으라고.”
“…….”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블린이 살그머니 뒷걸음질 칠 때였다.
“약은 발라야 할 거 아니야.”
바스티안이 뭐하냐는 듯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옷 위에 바를 수는 없잖아.”
단정한 제복을 입은 탓에 드러난 곳이라고는 얼굴과 손밖에 없었다.
“아.”
이블린이 민망한 탄식을 흘렸다. 그러게 왜 오해하게끔 말을……. 이블린의 붉어진 귀를 본 바스티안이 알겠다는 듯 짓궂게 웃었다.
“이블린, 대체 뭘 상상한 거지?”
“......폐하께서 직접 해 주시겠다는 줄 알고요.”
“그러려고 했는데?”
바스티안이 당연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썹 한쪽을 까딱였다.
“일단 앉기나 해.”
바스티안이 쿡 웃으며 제 옆자리를 턱짓했다.
“내가 강제로 끌어다 앉힐까, 그대가 알아서 앉을래.”
이블린이 머뭇대자 바스티안의 말에 힘이 실렸다. 바스티안이라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 이블린은 잠자코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말로는 바스티안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진작에 깨달았고, 버텨봤자 시간만 끌 뿐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이블린이 소매를 막 걷으려 할 때였다. 동시에 일어난 바스티안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폐하! 그러시면 안 돼요!”
기겁한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팔을 붙잡았다.
“이런 바닥에 무릎을 대시다니요!”
“뭐 어때서.”
“안 돼요.”
이블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고집은.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시 침대에 앉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두 다리를 휙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폐하, 이건 좀…….”
“이것도 좀, 저것도 좀. 대체 되는 건 뭐지, 이블린? 그 소리 좀 안 듣고 싶어, 좀.”
바스티안이 눈에 힘을 주며 스읍, 소리를 내자 이블린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픽 웃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발목을 꾹 움켜쥐었다.
“윽.”
이블린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 강한 힘이 아니었는데도 꽤 아팠다.
“봐, 이럴 줄 알았지.”
바스티안의 커다란 손이 적당한 압력으로 발목을 주물렀다.
“조금 참아. 지금 풀어놔야 내일도 그대가 원하는 만큼 자유를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아니면, 내 말에 올라 얌전히 가야 할 거야.”
폐하의 말에 함께? 그건 안 되지. 그럴 수는 없지. 이블린이 신음을 참으며 고통을 버텼다. 그러다 발목 위로 미끄러져 올라온 손이 힘주어 종아리를 누르는 순간.
“윽!”
높고 낮은 신음이 동시에 터졌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블린이 후다닥 다리를 거두며 몸을 바로 했다. 바스티안이 배를 붙잡고 있었다.
“폐하! 괜찮으세요?”
강한 통증에 참지 못하고 바둥거리다 그만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불만은 말로 해, 이블린.”
“아니, 그게, 너무 아파서…….”
무릎걸음으로 바스티안에게 다가간 이블린이 쩔쩔맸다. 감히 황제의 배를 만져볼 수도 없고. 옆에서 우물쭈물하니 바스티안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그대랑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아, 이블린.”
“……어쩐지 나쁜 의미로 들리는데요.”
“그럴 리가.”
씩 웃은 바스티안이 그대로 이블린의 어깨를 툭 밀어 버렸다. 졸지에 침대 위로 풀썩 눕게 된 이블린이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 옆으로 바스티안이 조금 거리를 두고 비스듬히 누웠다.
“배가 아프니까 좀 쉬어야겠어.”
“그럼 제가 나가 있을…….”
“무슨 소리야, 원인 제공한 사람이 옆에서 간호해야지.”
“…….”
황제의 배를 걷어찬 죄인이 무슨 말을 할까. 두 손을 배 위에 포갠 이블린은 바스티안이 만족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머리를 팔로 받친 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무슨 생각해?”
바스티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속상해서요. 말 잠깐 탔다고 이렇게 아프다니…….”
“하여간, 자존심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콧등을 손으로 꾹 잡았다가 놓아 주었다.
“폐하. 전 기사단장이 되면서 말 타고 출퇴근하는 게 제일 좋았어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편 이블린이 말을 이었다.
“임신 스캔들이 터지고 공작저로 찾아오셨을 때 저희가 만났던 숲, 기억하시죠.”
“응.”
“유일하게 제가 자유로울 수 있는 장소였는데, 거기서 말을 타기는 어려웠거든요. 들킬 수도 있고.”
“그대는 참…….”
이블린이 조곤조곤 제 속내를 말하는 건 좋은데 안타까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게 만들어.”
바스티안이 낮게 속삭였다. 제법 달콤하게 들리는 말에 이블린이 눈을 내리떴다.
“기사단장이 된 후에 제일 좋은 게 그거였다니, 그보다 더 좋은 게 많지 않았나? 내 옆에 있는 거라든가, 나를 매일 보는 거라든가.”
“……네?”
이블린이 귀를 의심하는데 바스티안이 휙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엎드려, 이블린.”
이블린이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엉덩이, 약 발라야 하잖아.”
“폐하, 지금 무슨 말씀을.”
오늘따라 왜 이리 짓궂게 구는지 모르겠다.
“혼자 바르기 힘들잖아.”
“폐하,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내가 그대를 아이 취급한다고?”
되물은 바스티안이 그대로 이블린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러면, 이런 짓은 못 하지.”
순식간에 입술이 끈적하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다시금 닿을 듯 코앞에서 멈춘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볼을 감싸 쥐었다.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왜인지 의미심장했다.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꼭 맹수 앞에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저를 보는 황제의 시선이 좀 지나치게 진득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숨도 못 쉬게끔 농밀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보고 있으면, 심장 어딘가가 꽉 조여오는 듯했다. 꼭 눈빛에 잡아 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마치 둘 사이에 팽팽한 실이 있어서 누군가 끊기만 해도 균형을 잃을 것 같았다.
“이블린.”
낮게 이름을 부른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을 톡 건드렸다. 바스티안의 손가락 끝이 장난치듯 움직이며 동그랗게 말려 있던 이블린의 손가락을 하나씩 열어냈다. 손바닥을 간질이듯 문지르다 꾹 누른 바스티안이 그 안에 무언가를 놓았다. 그리고 다시금 이블린의 손가락을 하나씩 다시 접어 내용물을 쥐게 했다.
“약, 발라.”
“…….”
“내일 고생하지 말고.”
바스티안이 쿡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바스티안의 뒷모습을 보며 이블린은 눈만 깜빡였다. 철컥, 문이 닫혔지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는 없었다. 아마도 문 앞을 지키는 듯했다.
“하아.”
참았던 숨을 토해낸 이블린은 바스티안이 쥐여 준 약을 내려다보다가 꼭 움켜쥐었다. 지금처럼 시답잖은 일로 바스티안과 웃고 떠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부터 부친에게서 공작가를 돌려받기 위해 한 계약이었다. 목격자를 만나고 나면, 이 계약이 끝나는 때도 정해질 테니까.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건만.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이블린은 문을 힐끗 쳐다봤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난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이블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 * * 같은 시각, 제국 어딘가의 깊은 산 속.
“으아아악! 사, 살려만 주십시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바닥에 엎어진 사내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빌었다.
“그럴 리가? 공작부인의 마차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면서?”
“아니, 아니에요! 거짓말입니다!”
“오호라.”
복면을 쓴 이가 단검의 끝을 사내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그러니까, 거짓말이다?”
“모, 목격자 행세를 하면 돈을 준다고 했어요! 돈을요!”
“흠.”
“진, 진짜입니다.”
“거짓말이면, 알지?”
검을 휘리릭 회수한 이가 몸을 일으켰다.
“대장, 어떻게 할까? 이미 의뢰인에게는 목격자를 찾았다고 보고했잖아.”
“뭘 어쩌긴 어째, 다시 연락해. 더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고. 저놈, 아는 건 다 털어놓게 해. 돈을 준 놈이 누구인지도.”
복면 뒤에 가려진 이가 씩 웃었다.
“연락이 제때 잘 도착해야 할 텐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