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진실을 마주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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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진실을 마주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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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진실을 마주할 시간
2022.04.03.
“황제궁과 본궁은 한 번씩 더 확인해. 더 철저하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근위병을 발견한 휴이터가 잔소리를 했다.
“폐하께서 안 계시니 정신 바짝 차려. 얼마 전 사고를 잊은 건 아니겠지?”
“네, 대장님!”
부하들에게 한 번 더 당부한 휴이터가 황제궁 건물을 힐끗 쳐다봤다.
정확히는 이블린의 단장실이 있는 곳이었다.
“……잘 가고 있으려나.”
그렇게 멀리 나가 본 건 처음일 텐데.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고 싶었지만, 정작 아침부터 기자회견을 하느라 제대로 배웅도 못 했다.
이블린을 도우려고 근위대장직에 오른 건데, 오히려 이블린의 곁을 지키기가 더 어려웠다.
다 그만두고 호위기사단으로 들어갈까? 그러면 좀 나으려나?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데 문득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얼마 전, 다베르 후작과 단둘이 티타임을 가질 때였다.
“경은 티에르 단장과 오랜 친구였지요?”
“네, 그렇습니다.”
“어릴 때 말입니다. 혹 단장에게 특이사항 같은 건 없었습니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든가, 예를 들면, 정령술 같은?”
“……글쎄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아. 그냥 궁금해서 말입니다. 솔직히 폐하께서 공녀를 호위기사단장으로 임명한 게 뜬금없기도 했고. 쉽게 이해할만한 부분은 아니잖습니까.”
“…….”
“뭐, 예전부터 두 분 사이의 인연이 따로 있는 게 아닌 이상은. 안 그렇습니까?”
질문을 듣는데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그래, 이블린도 같은 걸 물은 적이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일단, 제가 알기로 따로 연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리 대답하자 다베르 후작은 대화를 어물쩍 다른 주제로 넘겼다.
“뭐지?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휴이터가 턱을 긁적였다.
‘특별한 능력이라. 그런 게 있지는 않은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이블린을 만난 건 열 살 때니까, 그 이전의 일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후작은 황제의 수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황제가 일부러 숨기지만 않는다면, 모든 걸 다 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
그런데, 그런 다베르 후작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게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
‘이블린이 돌아오면 물어봐야겠어.’
단장실에서 눈을 뗀 휴이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폐하, 제게 무슨 문제라도?”
이블린은 자꾸만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바스티안 때문에 난감해졌다.
이른 새벽, 떠날 준비를 막 마친 후였다.
“그대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나. 뭔가 시원한 향 같기도 하고.”
“어제 주신 약 때문이에요.”
이블린이 제 손목을 코에 대본 뒤 변명하듯 덧붙였다.
“흠, 꽤 새롭네. 평소 그대의 향과 달라.”
“……그런가요.”
별거 아닌 듯 툭 던지는 말에 이블린은 혼자 부끄러워졌다.
바스티안이 한 번 더 숨을 깊게 들이쉰 뒤에야 고개를 떼어냈다.
“두 분, 꼭 제 앞에서 이러셔야겠습니까?”
가만히 기다리던 다트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이 나이까지 혼자인 사람 생각도 해 주셔야지요.”
“그대가 결혼을 못 한 게 내 잘못은 아니지.”
다트가 투덜거리자 바스티안이 차갑게 응수했다.
“다트, 황궁으로 돌아가면 이 약의 재료를 하녀장에게도 주도록. 향유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군.”
향유까지 신경 써주는 황제라니.
괜히 민망해진 이블린은 볼을 긁적이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를 무의식에 새겼다.
다트는 아직 결혼을 안 했구나. 알리에타도 지금은 혼자인데.
그러다 문득 이런 평화로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 또한 바스티안이 곁에 있어서 그런 걸 테지.
그가 없었다면,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 차다 못해 어지러웠을 거다.
이블린이 픽 웃으며 말에 올랐다.
“저녁이면 목적지에 도착하겠군.”
“아, 그럼 가는 길에 마을 한 군데만 잠시 들러도 되겠습니까?”
바스티안이 조금 밝아진 하늘을 힐끔 보며 읊조리자 다트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두 분께 쓰는 약재가 나는 곳이라서요, 작은 산골 마을이니 안전할 겁니다.”
“폐하,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지.”
바스티안의 깔끔한 허락이 떨어지자 일행은 지체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금방 볼일만 보고 돌아오겠다며 다트가 떠나고 이블린과 바스티안은 작은 식당을 찾아갔다.
마을에 호기심을 보이는 이블린을 배려한 거였다.
“그대는 이런 곳이 처음이겠군.”
“네, 아무래도.”
두 사람은 텅 빈 식당 한쪽에 자리 잡았다.
심드렁한 태도로 주문을 받은 사장이 안으로 사라지고 두 사람은 후드를 느슨하게 내렸다.
“기분은 어때, 이브. 몇 시간 후면, 그대가 알고 싶어 하던 진실을 마주하게 될 텐데.”
“그냥……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이에요.”
이블린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으니까요.”
처음에는 그저 마차 사고의 진실이 알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몰랐던 부친의 악행을 알게 되었다.
“가문에서 부친의 존재를 지울 생각이에요.”
그 과정이 제국을 떠들썩하게 한다 해도, 바스티안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밀어붙일 각오였다.
“큰 결심을 했군.”
바스티안이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야 잠깐 떠들어댈 테지만, 이블린이라면 금방 잠잠하게 만들 터.
“그러고 나면…….”
이블린이 입술을 어름거리며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역시, 저희의 계약도 끝나는 거겠죠?”
물을까 말까 내내 망설이던 질문이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블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바스티안의 회녹색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맴도는 듯했다.
“이런, 이브.”
바스티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우리의 계약 조건을 벌써 잊은 건가?”
“조건, 이요?”
“기한은 ‘서로 원하는 게 충족될 때까지’였어. 그러니 그대의 목적을 이뤘다 해도, 우리의 계약은 내가 원하는 걸 이룰 때까지 유효해.”
“…….”
바스티안이 원하는 것.
그게 뭔지 이제는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겠다.
“그럼 폐……”
“이름.”
“아.”
바스티안의 지적에 이블린이 혀끝을 깨물었다.
“……바스티.”
이블린이 어색하게 그의 애칭을 부르자 바스티안의 입가에 미소가 진하게 번졌다.
“그럼, 바스티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뭐……!”
기껏 용기를 냈건만, 이블린은 질문을 끝맺지 못했다.
마침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 때문이었다.
‘이런.’
이블린은 후드를 아래로 깊숙이 끌어내려 얼굴을 가렸다.
식당 내부를 살피던 사내 또한 이블린과 바스티안을 보고 움찔하더니 주춤댔다.
이블린은 경계하며 사내의 동태를 살폈다.
깔끔한 옷차림과는 다르게 머리나 수염은 손질하지 않아 덥수룩했다. 마치 얼굴을 숨기고 싶은 사람처럼.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이런 외진 곳까지 온 걸 보면, 평범한 여행객은 아닌듯한데.’
이블린은 주인장에게 향하는 사내를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그런데 왜 낯이 익지? 기분 탓인가.’
이블린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볼일을 끝낸 사내는 다시 가게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브, 왜 그런 표정이지?”
“그게…… 아.”
불현듯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저 사람…….’
이블린의 눈이 곧 커다래졌다.
사고 당일, 마차를 몰았던 이.
“전에 공작가에서 일했던 마부와 닮았어요.”
바스티안이 눈썹을 까딱였다.
“……따라가 보지.”
두 사람은 음식도 나오지 않은 테이블에 돈을 올려두고 빠르게 일어섰다.
.
.
“젠장. 내가 왜 이런 신세가 됐지.”
어깨를 구부정하게 웅크린 사내가 품에 안은 말린 고기와 술 한 병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돈이 있으면 뭐 해. 어디 식당에 앉아 여유로운 식사를 즐길 수도 없고, 이렇게 말라비틀어진 고기나 뜯어야 하는 신세인데.
“네? 고의로 사고를 내라는 말입니까?”
“어허, 고의라니. 그대는 그냥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 위험한 절벽으로 향한 거고, 그날따라 바퀴가 고장 나 있던 걸 몰랐던 것뿐이야.”
“하, 하지만……”
“그리고 운 좋게 ‘혼자’ 살아남아 돌아온 자네는 사고를 알리는 거지. 그렇게만 하면 평생 써도 모자랄 만큼 거액을 갖게 될 거야. 간단해, 안 그런가?”
공작의 보좌관이 건넨 제안은 악마의 유혹이었다.
돈에 눈이 멀어 덥석 받아들인 게 실수였다.
“내 딸만이라도 살려줘서 고맙네.”
그리고 제 어깨를 붙잡고 말하는 공작의 눈빛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작이 사고를 지시한 장본인이라는 예감.
아니나 다를까, 돈을 받기로 한 날 그는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했다.
운 좋게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몇 년째 이런 산골 마을만 전전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사내가 덜덜 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끔찍하군.’
언제까지 이렇게 쥐새끼처럼 숨어 살아야 하는 걸까.
공작의 눈을 피해 제국을 뜰 수만 있다면.
사내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임시 거처의 문을 열었다.
.
.
“어떻게 할까, 이블린.”
반대편 골목에서 지켜보던 바스티안이 옆으로 시선을 내렸다.
“역시 한 번 만나봐야겠어요.”
“그렇군.”
어깨를 으쓱한 바스티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문 앞에 선 이블린이 짧게 심호흡했다.
‘정말 그자일까.’
목격자를 찾았다던 키르아와의 접선 장소는 여기서부터 반나절 거리였다.
똑똑.
이블린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어 한 번 더 노크했지만, 사내는 문을 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비척대던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낡은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
그리고 이블린과 바스티안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안에 다른 누군가가 또 있어요.’
‘내가 먼저 들어가지.’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검으로 손을 뻗으며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캉!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폐하!’
이블린이 깜짝 놀라 검을 움켜쥘 때였다.
“잠깐! 물러나, 너희들!”
집 안쪽에서 단호한 명령이 들리더니 습격자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다.
그제야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의 정체가 보였다.
이블린이 경계하며 바스티안의 옆으로 다가서자 그의 눈이 이블린을 빠르게 훑었다.
“쿠즈네의 검이야. 얼마 전에 오펜 상단에 판 거잖아.”
“……키르아로군.”
바스티안이 검을 까딱이며 읊조렸다.
“그럼 그쪽은…….”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끝을 흐렸다.
오펜 자작이 전담으로 거래하는 곳은 황궁이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쿠즈네의 검을 한꺼번에 주문할 수 있는 이는 황궁 내에서도 한 명뿐이었다.
“정체를 알았으면, 예의부터 갖추는 게 먼저 아닌가.”
바스티안이 검집에 검을 꽂으며 픽 조소하자 습격자들이 동시에 검을 거뒀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맡은 의뢰를 수행하려다 보니…….”
바스티안의 분노를 읽어 낸 자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
‘의뢰를 수행하려 했다고?’
그렇다면 역시 저 남자가.
“조금 전 이곳으로 들어온 사내를 좀 만나야겠군요.”
이블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