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차라리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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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차라리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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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차라리 울어
2022.04.06.
“……이쪽입니다.”
바스티안의 명령에 의뢰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수장이 길을 비켰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이블린이 눈을 감았다 떴다.
이걸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온 거다. 오로지 이 진실이 알고 싶어서.
일렁이던 마음이 고요한 강물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찾으시던 목격자가 맞습니다. 일부러 돈을 주고 가짜 목격자를 계속 만들었더군요. 가짜에게 변고가 생길 때마다 흔적을 지우고 도망친 걸 보면, 켕기는 게 있었다는 거죠.”
“…….”
옆에서 덧붙이는 설명을 들으며 이블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블린이 문 앞에 이르자 눈만 빼고 전부 검은 옷으로 몸을 가린 사내가 문을 열어주었다.
좁은 방 안에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손목이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블린이 식당에서부터 따라온 그 사내였다.
“읍, 으으읍, 읍.”
입에 재갈을 문 사내가 흐느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블린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사내를 지키고 있던 이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 주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사내의 얼굴엔 공포심이 가득했다.
“……2년 전, 티에르 공작가에서 일했지?”
“!”
몇 번 눈을 끔뻑이던 사내가 이블린을 인지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누, 누구…….”
“…….”
“히이이익.”
이블린이 대답 없이 망토 후드를 벗자 사내가 곧 숨이 넘어갈 듯 괴상한 소리를 냈다.
바닥에 엎드린 비쩍 곯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대가 마차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라 들었는데.”
“잘,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숨을 꺽꺽대는 사내를 보니 더 캐물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이미 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어.’
이블린은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았다.
분노를 넘어선 커다란 절망이었다.
.
.
“이 정도면 허튼짓은 못 할 겁니다.”
“수고했어요.”
이블린은 다리만 빼고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인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직접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원하시는 곳까지 저희가 옮겨드려도 되는데요. 뭐, 제대로 의뢰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못 믿으셔도 할 말은 없지만요.”
이놈을 잡아서 약속 장소까지 데려가려 했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길드의 수장이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저 내 눈이 닿는 곳에 두려는 것뿐입니다. 그대들이 데려온 여인만 당분간 안전하게 보호 부탁해요.”
마르다의 모친을 말하는 거였다.
“물론, 오늘 있었던 일을 함구하는 건 당연하겠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음…….”
뭘 그런 것까지 확인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이가 턱을 긁적였다.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래요, 좋습니다. 이번 의뢰를 완벽히 마무리하지 못했으니, 그 대가로 재미있는 정보를 하나 드리고 가지요.”
그러다 결심했다는 듯 이블린과 바스티안을 번갈아 응시했다.
“요즘, 국경을 암암리에 넘나드는 이들이 늘었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
이블린이 당혹스러움을 숨기며 바스티안을 힐끗 쳐다봤다.
덤덤한 반응인 걸 보니 바스티안도 아는 내용인 듯했다.
“그럼 밀수 건이 늘었다는 것도 잘 아시겠군요. 제국으로 들어오는 물품이 무엇이며 자금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
이블린이 미간을 좁혔다.
“한 번 알아보시죠. 뭐, 손해는 안 보실 겁니다.”
“신뢰가 생명인 집단이 이런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전한다? 흠, 내가 그대들의 정보를 믿어도 된다는 보장은 어디 있지?”
바스티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상대편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의 중요한 고객이셨으면서도 저희의 정보를 못 믿으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늘 그렇듯, 저희는 돈을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솔직하군.”
“그럼 또 일을 맡겨주기를 기대하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옷의 무리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폐하, 저 말이 사실인가요?”
“안 그래도 주시하고 있던 차야.”
황제가 바뀌었으니, 느슨해진 연결 고리 몇 군데가 생긴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일단 출발할까, 이블린.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지.”
바스티안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게 묶여 있는 사내를 내려다봤다.
“……네.”
바스티안의 시선을 따라간 이블린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내려앉았다.
.
.
“아니, 두 분 정말! 대체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약속 장소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다트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상관을 쳐다봤다.
다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을 한참 넘겼는데도 안 오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습니다.”
“미안해요, 다트.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쳐서.”
“네? 아, 그자는…….”
뒤늦게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다트가 목소리를 낮췄다.
“중요한 인질.”
바스티안의 짧은 설명에 다트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캐묻는 건 그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사내의 목덜미를 움켜쥔 바스티안이 그대로 사내를 들어 이블린의 말 안장에 올렸다.
그리고 사내가 말에서 떨어지거나 도망가지 못하게 그의 포박된 몸과 손목을 안장과 고삐에 차례로 연결해 묶었다.
“이블린, 그대는 나와 함께 가.”
“네.”
길게 늘어진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 확인한 바스티안이 그 끝을 제 말의 안장에 엮기 시작했다.
바스티안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블린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살고 싶다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겁먹은 눈이 이블린에게 향했다.
공녀와 함께 있는 이는 분명 황제였다.
‘어쩌면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티에르 공작이라 해도 황제의 손에 있는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
공녀도 자신이 쓸모가 있는 동안은 바로 없애려 들진 않을 거다.
이대로 쫓겨 다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공작의 손에 죽는 것보다 어떻게든 공녀의 말을 따르는 게 백번 천번 나았다.
“이미 잘 알겠지만, 어차피 당신에게 선택지는 둘 뿐이야.”
이블린의 서슬 퍼런 경고에 사내가 고개를 마구잡이로 끄덕였다.
그 하찮은 모습을 본 이블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블린.”
“……네.”
이블린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잡아.”
먼저 말에 오른 바스티안이 이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
등이 바스티안에게 닿지 않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이블린은 험준한 산길을 멍하니 바라봤다.
평소라면 등 뒤의 바스티안을 신경 쓰느라 바빴겠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의 얼굴과 아버지, 그리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이 치솟는 여러 감정들도.
“비가 오려나 보군. 기사단과 최대한 빨리 합류하는 게 좋겠어.”
“…….”
바스티안이 읊조렸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바스티안은 동그란 정수리를 힐끔 내려다봤다.
이블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힘이 바짝 들어간 손등을 보니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됐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거겠지.
잠시 생각하던 바스티안이 말 고삐를 움켜쥐었다.
“……폐하?”
움직임이 덜컥 멈추자 이블린의 고개가 들렸다.
“다트, 잠깐 여기서 대기해.”
“네, 폐하.”
그대로 말에서 내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끌어내렸다.
“폐하, 무슨 일…….”
“다트, 상처에 바르는 약 있지?”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커다래진 눈을 무시했다.
“아, 네.”
“그냥 던져.”
“여기 있습니다.”
휙 날아오는 작은 통을 낚아챈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데리고 숲 안쪽으로 향했다.
“앉아.”
시야에서 다트가 사라질 때쯤에야,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손을 끌어 적당한 바위 위에 앉혔다.
약을 손가락 끝에 묻힌 바스티안이 다른 손으로 이블린의 턱을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그대의 마음은 알겠는데, 애꿎은 곳에 풀지는 마.”
바스티안이 옅은 한숨을 흘리며 이블린의 입술을 톡 건드렸다.
“……!”
쓰라린 고통에 이블린이 움찔했다.
입술이 찢어진 줄도 몰랐다. 깨닫고 나니 뒤늦게 비린 맛이 느껴졌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미간만 좁히고 신음을 참는 이블린에 바스티안이 손을 떼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럴 때 의지해오기를 바랐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인가.
“……폐하.”
못마땅한 것 같은 바스티안을 가만히 쳐다보던 이블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 듣고 있어.”
“예상했으면서도, 전부 알았으면서도…… 그래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나 봐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부녀지간이지만, 하다못해 실낱같은 희망은 붙잡고 싶었다.
제 핏줄인 부친이 그 정도로 최악인 사람은 아닐 거라고.
이블린의 눈동자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줄곧, 그대가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바스티안이 붉은 기가 역력한 이블린의 눈가를 엄지 끝으로 쓸었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런데, 눈물을 참는 게 더 보기 싫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어.”
바스티안이 쓰게 웃었다.
눈물만 흘리지 않았을 뿐, 지금 이블린의 표정은 오래전 신문에 실렸던 때와 똑같았다.
“그러니까 차라리 울어.”
“…….”
이블린의 입술 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말에 눈이 시큰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이블린은 고집스레 버텼다.
이 정도 약한 모습을 보였으면 됐지, 더는 싫었다.
“울어도 돼. 모른 척 해 줄 테니까.”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툭 떨어지는 눈물을 어쩔 수는 없었다.
“……오늘만이에요.”
“그래, 오늘만이야.”
“정말…… 이에요. 오늘 딱 한 번만…….”
한 번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 하고 대답해 준 바스티안이 소리 없이 이슬방울만 툭툭 떨어트리는 이블린을 가만히 품에 안았다.
오늘따라 이블린이 무척 작게 느껴져서, 더 마음이 아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투둑, 투둑.
두 사람의 위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블린의 눈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더 있어도 괜찮은데.”
이블린이 몸을 슬쩍 떼어내자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툭 얹었다.
“……이제 괜찮아요.”
들끓던 감정이 조금은 얌전해졌다. 이블린이 코끝을 훌쩍이며 몸을 떼어낼 때였다.
“……폐하.”
어깨를 움찔한 이블린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주 먼 곳이지만, 빗소리에 섞여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하나, 둘? 아니, 꽤 많은 인원이었다.
“키르아는 아닌 것 같고.”
바스티안이 중얼거렸다.
“……설마.”
목격자를 쫓아 온 자들인가.
“가보지.”
“……네!”
서둘러 다트가 있는 곳으로 향하자 반대편에서 오는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역시 습격이었다.
눈물 자국이 마르기도 전, 이블린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말 위에 묶여 있는 목격자부터 지켜야 했다.
검으로 밧줄을 쳐내자 기우뚱하며 떨어진 사내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사내에게 향하는 화살을 본 이블린이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 사내를 감쌌다.
화살을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
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굵은 나뭇가지들이 그대로 이블린을 감쌌다.